주간동아 828

2012.03.12

화재 출동 사이렌 웽~ 웽 양보는커녕 ‘귀 막고’ 모른 척

‘긴급자동차 진로양보’ 시행 석 달 동승 취재… 규정 모호 단속은 한 건도 없어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12-03-12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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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 출동 사이렌 웽~ 웽 양보는커녕 ‘귀 막고’ 모른 척
    “화재 출동! 화재 출동! 종로구 낙원동 일반 가(家·가옥을 의미) 화재 수부(受付·신고 접수를 의미). 지휘차, 펌프차, 탱크차, 구조대 일백 이백(각기 차량 고유번호를 지칭) 화재 출동!”

    3월 7일 오후 6시 35분, 서울 종로구 중학천길에 위치한 종로소방서. 출동 지령이 떨어지자마자 현장지휘대장과 운전, 통신, 촬영, 감식, 조사, 당직요원 등 7명이 탄 지휘차를 필두로 5대의 차량이 일제히 붉은 경광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렸다. 긴급 출동이다. 기자도 긴급자동차의 진로 확보 실태를 살펴보려고 지휘차에 동승했다.

    꽉 막힌 도로 사정으로 차량 이동은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바퀴를 ‘동동’ 구를 지경. 교통체증이 유독 심한 퇴근시간대와 겹친 탓에 종로통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각종 차량과 인파로 넘쳤다. 화재 현장까지 도착하는 일이 수월치 않다. 연신 귓속을 파고드는 사이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가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 인도 옆 차로의 가장자리를 마구잡이로 ‘점거’한 불법 주정차 차량과 택시, 긴급 차량임을 알고도 교차로 신호를 받으려 막무가내로 길을 비키지 않는 배짱 운전자, 소방차 사이로 끼어들어 빨리 가려는 얌체 운전자….

    “출동 중입니다. 횡단보도 건너지 마시고 양보해주세요. 각 차량은 좌우로 피양(避讓·안전 공간으로 이동)해주십시오.”

    지휘차에 탑승한 종로소방서 현장지휘대 소속 홍진식(40) 소방장이 보다 못해 마이크를 잡았다. 길을 터달라는 안내방송을 하기 위해서다. 홍 소방장은 “도로가 편도 3차로만 돼도 소방차가 지날 정도의 출동로를 확보할 수 있는데, 2차로인 경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심한 경우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다고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나 몰라라’ 하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강심장’ 시민도 있다”고 귀띔했다.



    편도 2차로에서 유독 지연

    그래도 다행히 화재 현장까지 5분 만에 도착했다. 화재 진압엔 지장이 없을 듯했다.

    종로소방서 홍보교육팀 홍성현(30) 소방사는 “지난해 말 긴급자동차의 진로를 방해하면 단속한다고 홍보한 뒤 며칠 동안은 ‘반짝 효과’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이전과 거의 같은 수준”이라면서 “소방차 출동 시 일반자동차의 차로 가장자리 정차는 양보 아닌 의무라는 점을 시민 스스로 깨달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긴급자동차에 대한 진로양보를 의무화한 도로교통법 일부 개정안을 시행한 지 3월 8일로 만 석 달. 하지만 사정은 개정안 시행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지난해 6월 8일 개정해 같은 해 12월 9일부터 시행 중인 이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소방차, 구급차, 구조차, 혈액공급차 등 긴급자동차에 대한 진로양보 의무를 위반한 차량의 단속을 관할 지방자치단체가 할 수 있도록 한 것. 위반 사실이 사진, 비디오테이프 혹은 그 밖의 영상기록매체를 통해 입증되면 해당 차량 소유주에게 2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했다. 과태료 액수는 이륜차 4만 원, 승용차 5만 원, 승합차 6만 원이다.

    이는 갈수록 심해지는 교통량 증가와 불법 주정차, 양보 의식 부족 등으로 긴급자동차의 출동이 지연됨에 따라 화재, 구조, 구급 등의 신속한 초기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마련한 것이다.

    실제로 대형 화재 같은 재난 상황 발생 시 긴급자동차의 진입로 확보는 중요하다. 통상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관이 5분 이내에 현장에 도착해야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른바 ‘골든타임(Golden Time)’이다. 이를 넘기면 불길 확산 속도가 빨라지고 피해 면적도 급격히 늘어 구조대원이 인명 구조를 위해 건물로 진입하는 것이 곤란해진다.

    소방방재청의 국가화재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한 해 국내에서 발생한 화재는 4만3875건. 이로 인해 263명이 사망하고 1599명이 부상을 당했다. 재산피해액도 2565억4761만여 원에 달한다.

    전국 소방서는 3월 현재 192개소, 화재 빈발 지역이나 인구 밀집 지역에 설치한 119안전센터(옛 소방파출소)는 928개소로, 광역시 이상에서는 발생 신고 접수 후 골든타임 안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소방시설을 배치했다. 그럼에도 실제 골든타임 내 도착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게 문제다. 서울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2008~2010년 기준으로 소방차의 화재 현장 도착시간이 10분을 초과할 경우 사망자 발생률이 10분 이하인 때보다 2.5배가량 높았다.

    구급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응급환자 대부분은 골든타임 안에 응급처치를 받아야 소생률이 높아진다. 특히 심혈관계에 이상이 생긴 응급환자는 병원까지의 이송 시간이 매우 중요한데, 이때 골든타임을 넘기면 응급처치를 받아도 뇌손상이 시작돼 소생률이 크게 떨어진다. 소생하더라도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화재 출동 사이렌 웽~ 웽 양보는커녕 ‘귀 막고’ 모른 척
    “양보운전은 미덕 아니라 의무”

    이 때문에 마련한 것이 앞서 언급한 도로교통법 일부 개정안이다. 서울지역의 경우 개정안 시행일에 맞춰 소방차 및 구급차 309대에 블랙박스 등 영상기록매체를 설치해 가동 중이다. 긴급자동차에 시동을 걸면 블랙박스가 자동으로 작동하며, 출동 과정에서 블랙박스에 촬영된 양보의무 위반 차량의 소유주에게는 과태료를 부과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단속 실적은 얼마나 될까.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실제로 단속한 경우는 전국에서 단 한 건도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소방방재청 방호조사과 관계자는 “진로 양보의무 위반 차량은 소방관서에서 적발해 관할 지방자치단체로 넘겨도 위반 차량 소유주가 위반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발뺌 진술을 하면 사실상 과태료를 부과하기 어렵다”며 “이는 과태료 부과 대상을, 여러 상황을 고려해 소방당국의 계속적인 양보의무 요청에도 진로를 방해하는 경우 등 ‘제3자가 봐도 고의적으로 길을 비켜주지 않는 것이 명백한 경우’에 한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고의성 입증이 쉽지 않아 단속의 실효성을 상실한 것이다. 법은 시행 중인데, 법 집행은 제대로 되지 않는 건 모순이다. 고의성의 기준을 명확히 정해줄 ‘애정남’이라도 필요한 걸까.

    미국 오리곤 주의 경우 양보운전 의무를 위반하면 720달러(83만 원)의 벌금을 부과한다. 러시아도 2500루블(약 9만 원)의 벌금과 함께 2~6개월 면허정지 처분을 내리는 등 해외 각국은 강력한 단속을 편다.

    길은 좁고 차는 많다. 누구나 바쁘다. 하지만 분초를 다투는 긴급자동차의 출동 시간은 위급한 상황에서 생사와 직결된다. 법 개정 후 6개월의 홍보 및 계도 기간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양보운전 의무. 길이 좁다고 마음까지 좁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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