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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포도원 기행

“즐겁게 골라 마셔라, 와인은 그뿐이다”

와인 양조가 사이몬

  • 박일원 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즐겁게 골라 마셔라, 와인은 그뿐이다”

‘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빔바젠은 리지와 에스테이트, 시그너처 이렇게 세 등급의 와인을 생산한다. 소비자가 예산과 라이프스타일, 개인적 취향에 따라 고르도록 선택의 폭을 넓혔다. 리지는 만든 지 얼마 안 돼 바로 즐길 수 있는 ‘젊은 와인’이다. 에스테이트는 기후나 토질이 다른 여러 지역에서 생산한 포도를 섞어 만드는 것이라 다양한 포도 맛이 어우러졌다. 프리미엄급으로 헌터밸리 빔바젠에서 나오는 최고의 포도로 만든 시그너처는 10년 이상 병에서 숙성시킨 다음 마셔야 제맛이 난다고 한다. 게다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도 더 기다려야 할 무엇이 있는지 잔에 따른 뒤에도 천천히 음미하며 마셔야 한다니 성질 급한 필자의 음주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나파밸리 젊은 도사 보고 큰 감동

언젠가 친구와 함께 시드니 근교 블루마운틴에 갔을 때 일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통에 춥고 출출하기도 해 카페에 들어가 와인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렇게 하다 결국 한 시간 반 만에 두 병 가까이 비우고 말았다. 그때 맞은편 창가에 홀로 앉은 여인을 보니 와인을 우리처럼 병째 놓고 마시는 게 아니라, 잔으로 주문해 입술을 축여가며 조금씩 나눠 마시는 게 아닌가. 먼 산에 안개가 드리운 모습이 그림 같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소란을 피우던 산새들이 눈요깃감이 돼주기는 했지만 어떻게 와인 한 잔으로 버틸 수 있는지 참으로 놀라웠다. 카페 주인 처지에서는 취하면 술과 물을 분간 못하고 배포가 한없이 커지는 우리 같은 손님이 많아야 좋겠지만, 창가의 그 여인이야말로 분위기나 체면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와인에 대한 예를 갖추지 않았나 싶다.

빔바젠의 와인 양조가인 사이몬은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영국에서 호주로 이민 왔다. 어린 시절 생물도감에서 본 상어에 푹 빠져 해양생물학자를 꿈꾸던 그는 시드니대에서 해양생물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봤던 날렵하고 영리한 상어가 어느 날 다른 상어를 무참하게 공격해 피 묻은 살점을 뭉텅 뜯어내는 모습을 보고는 해양생물학자의 꿈을 접었다.



“그렇다고 전공과 아주 멀어졌던 건 아닙니다. 학교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이 바로 수산시장이었으니까요.”

사이몬은 크게 웃으며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줬다. 그는 수산시장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닐 옷을 겉에 걸친 채 생선비늘 벗기는 일을 했다. 온몸에서 생선 비린내가 진동해 저녁마다 비누로 박박 닦았다. 그런데도 냄새가 가시지 않아 여자 사귀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렇게 2년여 일하다 다른 직장으로 옮겼지만 거기도 만만치 않았다. 콩을 재배하는 농장이었는데 그가 맡은 일은 온종일 콩을 골라내는 것. 허구한 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벌레 먹은 콩, 속이 텅 빈 콩, 쭈글쭈글한 콩, 새까맣게 썩은 콩 등을 일일이 손으로 집어내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운 좋게 와인 업계로 굴러 들어왔다”고 말하는 사이몬. “굴러 들어왔다”고 하지만 와인 양조가가 되려고 그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등 주요 와인 생산국을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았던 것. 그러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에서 만난 빌 너트라는 청년에게서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

“도사는 원래 그런 건지, 빌 너트 역시 얼핏 봐서는 전혀 전문가 같지 않았어요. 덥수룩한 머리에,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 녀석이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죠. 나파밸리에서도 꽤 알아주는 양조가였는데, 하루는 그가 블렌딩하는 것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졌어요. 와인과 와인을 섞는 블렌딩은 무척 신중하고 섬세하게 해야 하는 작업인데 그 녀석은 양조장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더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닥에 놓인 항아리를 들었다 놨다면서 적당히 섞지 뭐예요.”

“즐겁게 골라 마셔라, 와인은 그뿐이다”
시시콜콜 ‘와인 속물’ 와인 망쳐

“즐겁게 골라 마셔라, 와인은 그뿐이다”
용량을 달아보거나 맛을 보거나 냄새를 맡지도 않았다. 사이몬은 지금껏 유명 양조가는 블렌딩할 때 실험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실린더에 와인을 담아 눈금을 유심히 확인한 뒤 기계에 넣어 변화를 살필 것이라고 상상해왔다. 그런데 너트는 완전히 기분 내키는 대로 들이붓고 좀 모자라다 싶으면 더 붓고 하는 식으로 블렌딩했다. 밤잠 설치며 기대에 부풀었던 사이몬으로서는 실망이 컸다. 그런데 그렇게 얼렁뚱땅 만든 와인이 병에 담겨 라벨을 달고 나가면 와인 애호가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듣는다니 아이러니했다. 섬세하고 예민한 와인 맛이 투박한 손과 눈대중으로 척척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저게 바로 연륜이며 저자야말로 도사’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후 와인 업계에 몸담은 사이몬, 지금은 그 자신이 빔바젠 최고의 와인 양조가다. 그가 헌터밸리를 찾아오는 와인 애호가에 대해 한마디 했다.

“어떤 사람은 와인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 한 병에 수천 달러나 하는 와인을 찾으면서 격식을 갖추고 빈티지를 달달 외우며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으려 하죠. 이런 사람을 일컬어 ‘와인 스노브(Wine snob·속물)’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와인을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해 큰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 게 오히려 탈이죠. 와인이란 존재하는 것이지 의미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사이몬은 “와인은 결코 까다로운 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스승이던 너트가 최고의 와인을 눈대중으로 척척 만들어냈듯, 우리도 세상에 존재하는 수천 가지 와인 중 자기 스타일에 맞는 와인을 코와 입으로 골라내 즐겁게 마시면 되는 것이다.



주간동아 2012.01.09 820호 (p64~65)

박일원 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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