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7

2011.12.19

사주만 믿고 아이 진로 덜컥 결정?

엉터리 철학관 등 난립 이상한 상담 피해 속출… 꾸준한 관심과 사랑으로 미래 설계 필요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1-12-19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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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주만 믿고 아이 진로 덜컥 결정?
    내년이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딸을 둔 김은영 씨는 벌써부터 아이 진로 때문에 걱정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성적은 오르지 않고, 다른 방면에 관심이 많아 미술과 피아노를 가르쳤지만 지금은 피겨스케이트를 배우고 싶어 한다. 하나라도 가능성 있는 재능이 엿보이면 일찌감치 그 방면으로 밀어주겠지만 아직 확신이 서지 않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아이의 관심사를 모두 충족시키기도 쉽지 않다. 김씨는 지금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러다 중고등학교에 들어가 성적이 더 떨어져 대학에 못 갈까 봐 걱정이에요. 요즘 같아서는 아이에게 뭘 가르치면 좋을지 점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에요.”

    치열한 입시경쟁 탓에 아이 진로를 일찍부터 고민하는 부모가 많아지면서, 이들의 불안감에 기대 새로운 돈벌이에 나서는 업종이 등장했다. 이른바 ‘사주로 보는 아이의 적성·진로 상담’을 겨냥한 역술원, 철학관, 점집이 늘고 있는 것. 사주로 진로상담을 잘한다고 입소문이 난 강남의 한 점집은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예약손님만 하루 수십 명에 달할 만큼 인기를 누린다. 2008년 6월 개설한 한 인터넷 카페 철학관은 지금까지 총 방문자 수가 18만여 명을 헤아린다.

    ‘진로·적성 전문’ ‘진로·진학 미래 컨설팅’을 표방한 인터넷 사주카페나 철학관, 역술원에는 “중학 2학년 아이의 진로를 선택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사주 좀 봐주세요”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우리 아이 사주에 맞는 최적 진로는 무엇일까요?” 같은 글이 쉴 새 없이 올라온다. 특정 직업을 콕 찍어 묻는 사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생년월일 음력 1995년 ○월 ○일, 이름 이○○, 성별 여자, 가족관계는 부모와 1남2녀, 출생지 서울. 현재 고1인 제 딸아이의 사주로 법관이 가능한지, 아나운서가 가능한지를 알고 싶습니다.”



    “생년월일 음력 1990년 △월 △일, 성별 여자, 내년 초 미국 유학을 가게 될 것 같아요. 미국에 가도 될지 확신이 들지 않아 불안해요. 유학 가서 무엇을 전공할지도 아직 선택하지 않았는데, 광고나 패션 쪽으로 일해보고 싶어요. 사주와 진로에 대한 상담 부탁드려요.”

    속성 1개월 교육받고 프랜차이즈 영업

    동양철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주 섭리를 인간에게 적용해 선천적 운명을 감정하는 것이 사주명리학의 기본 논리다. 사주에 따라 개인의 성격과 기질이 형성되고, 성격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 이런 이유로 그들은 사주명리학을 “타고난 적성을 찾아 진로를 결정하는 데 유용한 학문”이라고 말한다. 대학에서 아동복지학을 전공하고 동양철학 석·박사를 마친 장옥경 씨는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선천적 기질과 운을 지닌다. 따라서 사주와 진로·적성의 접목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아이의 장점을 발견하고 발현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수용한다 해도, 사주로 아이의 적성과 진로를 파악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사주와 음양오행을 알고 거기에 사회 변화 및 흐름을 덧붙여 다각도로 신중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 사주에 나타나는 선천적 성격과 기질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처한 사회환경이나 가정환경 등 후천적 여건에 따라 관심사와 적성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장씨는 “과거에는 한 직업, 한 직장에 평생 몸담으며 장기간 근무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나 지금은 사회환경이 다직업, 다직장 분위기로 급격히 변했다. 그만큼 직업과 직장 선택이 유연해지고 유동적으로 변했는데, 사주를 보고 어떤 직업이 맞는지 안 맞는지만 좇는 것은 현명치 못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진로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사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들을 겨냥해 각 지방자치단체 복지관이나 주민센터, 백화점 문화센터, 대학 평생교육원이 앞다퉈 관련 강의를 개설하고 있다. 3~6개월 과정의 수업을 듣는 사람은 20대부터 70대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직업도 대학생에서 직장인, 주부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최근에는 심리학이나 아동학 전공자도 사주 강의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독자적으로 사주를 이용한 적성검사 방법을 개발했다고 주장하며 교육생을 모집하고 민간 자격증을 주는 곳도 생겨났다. 그중에는 ‘속성 1개월’을 내세워 수강생을 모집한 뒤 수료자를 대상으로 자신이 개발한 사주 툴을 이용한 프랜차이즈 형식의 영업을 부추기는 곳도 있다. 쉽게 말해 무자격 업체들이 충분한 연구 없이 돈벌이에 나선 셈. 사주에 관심이 많아 평소 틈틈이 공부해왔던 김지현(42·가명) 씨는 다음과 같이 분통을 터뜨렸다.

    “속성 강의를 내세운 한 업체에 수강생으로 등록하고 수업을 듣다가 강의실에서 쫓겨났다. 강의내용 중에 궁금한 게 있어 꼬치꼬치 물었더니 ‘사주를 아는 사람이 오면 안 되고 백지 상태에서 우리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료로 임대해주는 회의실에서 강의하는 엉터리 업체였다.”

    사주만 믿고 아이 진로 덜컥 결정?

    서울 대학로의 한 점집 풍경.

    이 때문에 공식 과정을 통해 동양철학을 연구해온 전문가들은 사주를 볼 때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고 강조한다. 먼저 사주를 봐주는 사람의 이력을 확인해야 한다. 아이의 미래를 조언해줄 상담자의 자질과 전문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검증된 능력이 있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는 것. 또한 “이 아이는 의사를 시켜야 한다”거나 “경영학과에 보내야 한다”는 식으로 특정 직업, 특정 전공과목을 100% 확신하는 곳은 피하는 것이 좋다. “1명을 소개해주면 커미션을 주겠다”는 곳도 피하라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시행착오도 과정

    동양철학에서는 사주를 명(命)에 운(運)을 대입하는 통계학이라고 본다. 명과 운 또한 개인마다, 시기마다 각각 다르다고 여긴다. 기본 데이터인 사주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각자에게 맞는 해석과 상담 과정이 필요한 셈이다. 따라서 사주를 이용해 진로를 가늠해보려면, 1회성 상담보다는 선천적 기질과 후천적 능력을 조합하고 주변 환경까지 파악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심층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생년월일만 보고 척하니 미래를 점쳐주는 진로상담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문용린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아이의 적성을 알려면 부모가 평소 관심을 갖고 아이를 꾸준히 관찰해야 한다. 관심이나 재능을 보이는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뒷받침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지 그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며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는 과정 역시 아이에게는 중요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문 교수는 또한 “부모는 여유를 갖고 아이의 미래에 대해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게 중요하다. 점에 의존해 아이의 미래를 부모가 무턱대고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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