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6

2011.12.12

저절로 가슴이 쿵쾅 황홀한 타락을 생각했다

탬벌레인 와이너리 2

  • 박일원·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입력2011-12-12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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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저절로 가슴이 쿵쾅 황홀한 타락을 생각했다
    사륜마차는 허수아비가 허술하게 지키는 포도밭 사이를 쉬엄쉬엄 돌아나갔다. 바람에 빨래가 나부끼는 잡역부 숙소와 녹슨 경운기가 할 일 없이 포도밭을 지키는 그곳.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하나하나 따서 트레일러에 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겨울을 지나더니 금세 가지마다 복슬복슬한 포도꽃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세월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계절도 잊지 않고 찾아온다. 세월과 계절의 변화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포도밭이다. 탬벌레인 와이너리에서 오랜 세월 일했다는 와인 컨설턴트는 필자가 술꾼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술이 한잔씩 돌아가자 그는 마음이 끌리는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들려줬다. 시음장에서 방문객에게 해줄 수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탬벌레인 세미용 끼고 행복한 인생

    “서호주 마거릿 강가의 루윈 포도농장에 들렀을 때입니다. 뭐, 작정하고 간 것도 아니고, 출장길이었어요. 해가 질 무렵이라 모텔을 찾다 목도 마르고 자동차도 덜컹거리고 해서 잠깐 쉬어가자고 들렀던 곳입니다. 거기서 우연히 포도원 주인장을 만나 샤도네이와 카베르네 소비뇽을 맛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군요.”



    와인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건 술이라기보다 종합예술품에 가까웠다. 미각과 후각에 이어 시각까지 자극하는 작품이었다. 혀와 코, 목구멍에 눈까지 모든 감각기관이 자다 깬 것처럼 갑자기 일어나 황홀한 맛에 우왕좌왕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는 와인에 코가 꿰었다. 세상에서 좋다는 와인이란 와인은 모두 찾아다니며 마셨다. 얼마나 와인에 미쳤던지 고액 연봉의 은행 투자상담직도 그만뒀다.

    이제 그는 자신이 맛본 각종 와인과 온 세계 술꾼들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정신없었다. 은행 상담가에서 와인 상담가로 변신한 그. 그동안 은행에 다니며 열심히 돈을 모았다면 근사한 해안가 저택에 살면서 포르쉐를 몰고 다닐 만큼 부자가 됐을 텐데, 오크통 속에 그 돈을 죄다 퍼붓고 다닌 셈이다. 도수 높은 안경을 끼었기 때문일까. 아님 그의 말투 때문일까. 인상 자체는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은행 고객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기에 더 알맞아 보였다.

    “우리 와인 중에서 내가 제일로 치는 것은 ‘헌터 리저브 세미용(Hunter Reserve Semillon)’입니다. 신선하면서도 강렬한 맛이 나는데 마치 싱싱한 레몬을 입에 넣었을 때처럼 상큼하죠. 와인은 살아 있는 유기물이라 해를 거듭할수록 맛도 변하는데, 헌터 리저브 세미용의 경우 와인 셀러에서 10년 이상 잘 보관했다 마시면 여운도 길고 맛 또한 훨씬 풍성해집니다.”

    그는 가족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자신을 빼놓고는 술을 마시는 사람이 없지만, 최근 어머니를 와인 마니아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며 연신 자랑이었다. 그러면서 와인은 뭐니 뭐니 해도 겨울철 벽난로 앞에서 마시는 게 최고라고 주장했다. 상처했는지, 이혼했는지 세스녹이라는 동네에 혼자 살고 있다는 그는 다소 쓸쓸하긴 하지만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기 때문에 편하다고 했다. 스산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겨울밤에 생굴 한 접시와 즐겨 마시는 탬벌레인 세미용 한 병을 끼고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단다. 겉보기와는 달리 행복한 인생의 비밀은 헌터밸리 곳곳에 숨어 있다.

    탬벌레인 포도원을 한 바퀴 돌아본 마차는 주차장에 그를 내려놓고 큰 길로 나아갔다. 성실하게 말을 모는 마부에게 와인 한잔을 권하자 근무 중이라 마실 수 없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헌터밸리에 와서 처음으로 술을 마다하는 사람을 봤다. 지나가는 자동차에 일일이 차선을 양보하던 착한 마부는 반짝반짝 햇빛을 튕겨내는 아스팔트 길 한쪽으로 말을 몰아가다 갑자기 고삐를 당겨 방향을 바꿨다.

    이제 마차는 잘 포장된 직선의 길을 버리고 편백나무와 히말라야 삼목으로 뒤덮인 구불구불한 흙길로 들어섰다. 그러자 헌터밸리의 다른 모습들이 포도껍질처럼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욕을 마친 듯 연초록의 구릉이 다리를 포갠 자세로 말갛게 누워 있고 그 위로 구름이 음영을 그리며 느리게 지나갔다.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는 규율보다 방임을 허락하고, 도덕보다 본능을 자극한다. 그래서인지 헌터밸리는 술 취한 방문자에게 황홀한 타락을 넌지시 권한다.

    저절로 가슴이 쿵쾅 황홀한 타락을 생각했다
    지극한 아름다움 도덕보다 본능 자극

    으슥한 숲에는 빨간색 촛대와 체크무늬 식탁보가 유난히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레스토랑, 그리고 몽롱하고 끈적끈적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카페가 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연인들을 기다렸다. 마차가 그 옆의 이끼 낀 돌담과 라벤더, 재스민이 어우러진 정원을 돌아서자 마구가 잘 정돈돼 걸려 있는 양철집이 나온다. 까까머리 시절, 젊은 가슴을 후려쳤던 영화 ‘엠마누엘 부인’에 나옴직한 그런 집. 이제 말은 마부의 지시 없이도 제 갈 길을 알아서 갔다. 폭은 좁지만 유속이 빨라 세상 온갖 소음을 잦아들게 할 냇물을 건너자 담쟁이덩굴 사이로 창문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펜션이 나타났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숲 속에 은밀히 자리 잡고 있다. 곁눈으로만 바라봐도 저절로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이제껏 헛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른다.

    이 모든 풍경이 바로 두 번도 아닌 딱 한 번만이라도 첫사랑을 만나 불륜을 저지르고 싶은 이들에게 짜릿한 모험을 감행하게 만드는 헌터밸리의 숨겨진 모습이다. 그럴 배짱도 없이 쩨쩨하거나 소심하다면 황홀하고 꿈결 같은 상상 정도는 속으로 품어봐도 되지 않을까. ‘목포’라는 시를 쓴 김사인의 말처럼 늙어가며 문득문득 생각나는 게 옛 애인인데, 흔들리는 마차 에서 와인 한잔 마신 김에 그런 생각에 잠시 빠져봤다고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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