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7

2011.10.10

현대인 상처 근본적 치유 철학서의 부활

  •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11-10-10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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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 상처 근본적 치유 철학서의 부활
    우리 출판역사상 최초의 철학서 밀리언셀러는 1983년 출간한 ‘철학에세이’(동녘)다. 이 책은 마오쩌둥의 ‘모순론’ ‘실천론’과 함께 중국혁명을 이념적으로 떠받친 3대 문건으로 일컬어지는 ‘대중철학’을 모태로 하고 일본의 철학개론서를 가미해 집필한 것이다.

    내가 살려면 세상부터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철학적으로 규명한 이 책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고민에 값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대중의 고민이 오로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로 바뀐 뒤로는 철학서를 손에 쥘 여유가 없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명예퇴직 위협을 크게 받고부터는 무조건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 시대에 대중은 철학서보다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심리학 서적에 심취했다. 그러다 보니 인문서 시장을 심리학 서적이 독점하다시피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현실 유지 지향성을 지닌 자아심리학으로 변형되고, 페미니즘이 심리학 언어를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자기계발 시장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는 하늘과 나 사이에 믿을 것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으니 자신부터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법이 자신 안에 있다는 긍정 신학과도 맥을 같이한다. 자기계발의 이데올로기가 긍정심리학, 긍정의 종교와 결합하자 자기계발은 거대한 산업이 됐다.

    하지만 자기계발은 지배계급의 현실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심리학 서적이 정신적, 물질적, 사회적 성공을 위한 자기 변화의 방법론을 제시했지만 독자가 얻은 것은 심리적 위안이라는 ‘정신적 마약’이 유일했다. 그러니 자기계발을 통한 성공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극단적인 양극화로 소수가 부(富)를 독식하는 세상에서는 자기계발을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져 ‘시달리는 자아’만 남을 뿐이었다.

    이런 인식이 본격화한 2006년 이후 독자는 자기계발을 통한 ‘성공’을 포기하고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의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를 크게 의심하면서 자기계발서가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의 자기계발 의지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는 자기계발서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기계발서는 다시 철학과 결합하는 중이다. 이 덕분에 이명박 정부의 ‘논술 포기’로 암흑기를 맞았던 철학서가 다소 숨을 쉬기 시작했다. 대형 서점은 심리학 서적 대신 철학서를 판매대의 맨 앞에 진열해놓았다. 이렇게 된 것은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서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가 인문서로는 최단 기간인 11개월 만에 밀리언셀러가 된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런 징후의 대표적인 책이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이다. “지금은 자기 위로와 자기 최면이 아닌, 아파도 당당하게 상처를 마주할 수 있게 하는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 책의 표지에는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아파도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나는 왜 이러고 살지?’의 주인공을 위한 인문 공감 에세이” 등의 광고 문구를 넣었다. 우리가 최근까지 심리학 서적에서 익숙하게 만났던 문구다.

    현대인 상처 근본적 치유 철학서의 부활
    솔직함과 정직함이 인문정신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강신주는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말한다. 이런 진술이야말로 나와 타자, 그리고 나와 타자를 둘러싼 구조(환경)를 함께 변화시킬 철학서의 부활을 기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1958년 출생.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학교도서관저널’ ‘기획회의’ 등 발행. 저서 ‘출판마케팅 입문’ ‘열정시대’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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