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1

2011.08.22

벌써부터 자리 싸움?

박근혜 ‘대세론’에 친박 진영 잇단 잡음…‘최대 적(敵)은 친박계’ 걱정과 한숨

  • 김기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kimkhy@donga.com

    입력2011-08-22 09: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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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부터 자리 싸움?

    7월 4일에 있었던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나선 후보들.

    7월 29일 부산 해운대 벡스코에서 한나라당 부산시당대회가 4년 만에 열렸다. 휴가철인데도 대의원 10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열띤 분위기였다. 이날 대회는 시당위원장 경선을 위한 자리였다. 지역구 국회의원끼리 시당위원장을 합의 추대하는 관행을 깨고 경선을 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후보 네 명 중 친박(친박근혜)계가 두 명인 점도 눈길을 끌었다. 재선 유기준 의원(부산 서구)과 초선 현기환 의원(부산 사하갑)이 경쟁을 벌인 것이다.

    유 의원은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의 공보지원총괄단장을 맡았다.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해 ‘친박계 공천 학살’ 피해자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됐다. 결국 친박 깃발을 내걸고 무소속 후보로 출마, 재선에 성공해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현 의원 역시 박근혜 경선 캠프의 대외협력단 부단장으로 활약한 골수 친박계. 이런 두 사람이 시당위원장 자리를 놓고 경선에서 맞붙은 것은 뜻밖이었다.

    친박 의원끼리 자리 놓고 경선

    원래 부산지역은 재선의원이 시당위원장을 돌아가며 맡기로 했다. 부산지역에서 재선한 이는 유 의원과 김정훈 의원 두 명뿐. 합의에 따라 유 의원이 2009~2010년 시당위원장을 맡았고 그 후 김 의원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다시 유 의원이 맡을 차례였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경선이 결정되자 현 의원도 도전장을 낸 것이다. 현 의원은 “관례처럼 된 오더 투표를 없애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유 의원이 45.7%를 득표해 현 의원(26.8%)을 눌렀지만 친박계 강세 지역인 부산에서 친박 의원끼리 시당위원장 자리를 놓고 경선까지 했다는 것 자체가 범상치 않았다.



    이에 앞서 7월 26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서울시당위원장 경선에서는 친박계 지원을 등에 업은 중립 성향의 이종구 의원이 범친이(친이명박)계의 지원을 받은 전여옥 의원을 46표 차로 겨우 이겼다.

    경선 막판까지 관심을 모은 것은 권영세 의원의 태도. 권 의원은 ‘중립’을 자처하지만 친박에 가까운 중진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신임도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권 의원은 2009년 전 의원과 시당위원장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했다. 또 전 의원은 원래 박 전 대표 진영에 있다가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한 전력 때문에 친박 진영에서는 ‘배신자’로 통한다. 이런저런 점을 생각하면 권 의원이 이 의원을 시당위원장으로 지원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벌써부터 자리 싸움?

    2005년 12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시절의 유승민(대표 비서실장), 김무성(사무총장), 전여옥(대변인) 의원(왼쪽부터). 하지만 현재는 친박계에 유 의원만 남았다.

    그러나 권 의원은 끝까지 애매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당내에선 “권 의원이 사실상 전 의원을 지원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권 의원이 실제로 누구를 지원했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이런 권 의원의 태도에는 시당위원장 경선 20여 일 전에 있었던 7·4전당대회(이하 전대)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권 의원은 전대에서 대표 후보 7명 중 꼴찌를 했다. 5위 안에 들어야 하는 지도부 입성에 실패했다. 권 의원은 친박계의 전폭적 지원을 기대했지만 예상 외로 표를 받지 못했다. 친박계는 1인 2표 중 첫 번째 표는 친박계 ‘대표선수’였던 유승민 의원에게 던졌다. 문제는 두 번째 표가 권 의원에게 쏠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부산권의 일부 친박계 의원은 홍준표 대표를 공공연히 지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권 의원은 전대 결과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친박계 일부에도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은 통일된 행동 없는 구조

    벌써부터 자리 싸움?

    2010년 2월 한나라당 현기환 의원(왼쪽)이 김무성 의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반면 전 의원은 전대에서 권 의원을 적극지원했다. 두 사람의 지역구는 영등포갑(전여옥), 을(권영세)로 이웃이다. 전 의원에게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은 권 의원은 고마움을 느꼈고, 결국 시당위원장 경선에서 친박이 지원한 이 의원보다 전 의원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대와 일부 시·도당위원장 경선에서 범친박 진영은 단일 대오를 갖추지 못한 채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5월 원내대표 경선과 전대를 거치며 친이계 구주류를 밀어내고 사실상 당 주류로 부상한 친박계답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대해 한 친박계 의원은 “우리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라며 억울해했다. 친박계가 과거처럼 계파 보스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일일이 당 현안에 대해 지침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의원들도 자기 소신에 따라 각자 행동하기 때문에 친박은 통일된 행동을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세론’이 강해지면서 벌써부터 친박 진영 내부에서 주도권 다툼이 시작됐다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이런 분위기는 박 전 대표가 대권에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란 전망이다. 먼저 전국 각 지역에서 친박 조직을 자처하는 각종 모임이 난립하는 것이 문제다. 친박계는 최근 ‘희망포럼’을 중심으로 전국조직을 가다듬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자생적 박근혜 지지 조직과 ‘팬클럽’ 중 일부가 희망포럼의 우산 밑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며 독자성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부 친박계 지역구 의원 역시 자기 지역조직을 희망포럼에 넘겨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영남권의 한 지역에선 지난해 6·2지방선거 당시 구청장, 시의원 공천을 받지 못한 친박계 인사들이 현역 지역구 의원(친박계)과 희망포럼에 함께 들어가 그 안에서 갈등을 빚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 불리기’를 하면서 친박 성향의 지역조직끼리 경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문제가 있는’ 인사를 받아주거나, ‘바닥’이 넓지 않은 지역 특성상 한 사람이 복수의 친박 조직에 가담하는 일도 적잖다. ‘시너지’ 효과를 내기는커녕 ‘교통정리’조차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친박계 속사정은 복잡하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현재 한나라당의 뿌리는 모두 친박계”라고 말했다. 두 차례 대통령선거에서 모두 패한 한나라당은 2003년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로 ‘차떼기당’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주도했다가 역풍을 맞아 당 존립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때 당을 구해 2004년 총선에서 기적 같은 선전을 이끌어낸 것이 박 전 대표다. 박 전 대표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테러를 당하면서도 압승을 가져와 정권 탈환의 기틀을 다졌다. 당시 당 주류는 자연스레 ‘박근혜계’였다. 비주류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의 대선후보는 박 전 대표 몫이 아니었다. 박 전 대표의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의원이 대선 당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는 이명박 후보 쪽으로 넘어갔다. 대선과 2008년 총선을 치르면서 오히려 친박계는 당내 비주류로 밀려났다. 이런 부침을 겪다 보니 친박계 내부 구성은 복잡하다.

    친박은 크게 2007년 대선후보 경선 이전부터 박 전 대표를 도운 ‘구(舊)친박’과 이후에 친박 진영에 가담한 ‘신(新)친박’으로 나뉜다. 홍사덕, 서병수, 유승민, 유정복, 이성헌, 이혜훈, 최경환, 한선교, 구상찬, 김선동, 이정현 의원이 구친박 인사다.

    친박 범위 넓어 문제 생길 소지

    2008년 총선 공천 파동이 신친박 탄생의 한 계기가 됐다. 당시 친박계 의원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했다. 친박계 인사들은 한나라당 서청원 전 대표를 중심으로 친박연대를 창당해 총선에 뛰어들었다. 친박을 내건 무소속 후보도 대거 출마했다. 이들 중에는 원래 친박 인사도 있었지만 박 전 대표와 일면식도 없는 인사도 꽤 있었다. 총선 당시 영남권을 휩쓴 친박 바람을 타고 박 전 대표와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친박을 내걸고 당선된 경우도 있었다.

    친박 의원 대부분은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그러나 친박연대의 후신인 미래희망연대가 한나라당과의 합당을 결의했지만 성사되지 않아 당외 친박까지 존재하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세론이 확산되자 눈치를 보면서 친이계에서 ‘월박(越朴)’하는 의원도 늘고 있다. 이렇게 친박 범위가 넓고 복잡하다 보니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은 것이다.

    친박계의 핵심에 진입하려는 경쟁도 치열하다. 내부에선 “‘원조 친박’들이 박 전 대표 주변에 장벽을 치고 신진 인사들의 진입을 막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 전 대표의 신임을 얻으려는 충성경쟁이 격화하면서 친박 내부에서 음해가 난무한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속에서 한때 ‘친박 좌장’으로 불렸던 김무성 전 원내대표나 친박계 핵심이던 진영 의원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친박계에서 이탈하는 경우도 생겼다. 친박계 한 중진의원은 “박근혜 대세론이 힘을 얻을수록 ‘친박계의 최대 적(敵)은 친박계’인 상황이 될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 우려했다.

    이회창 대세론 vs 박근혜 대세론

    대세론에 취해 후보 눈과 귀를 가린 측근들


    벌써부터 자리 싸움?
    2002년 대통령선거(이하 대선)를 앞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대세론’이 정치권을 지배했다. 김대중 정부 말기 잇따른 권력형 게이트로 대통령의 아들들까지 줄줄이 구속되면서 정권이 흔들리고 민심 이반이 심각해졌다. 여야를 통틀어 이 총재를 능가할 만한 대권주자가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당에서는 “대선은 해보나마나” “정권 탈환은 시간문제”라는 낙관론이 고개를 들었다. 대세론이 강화될수록 이 총재 측근 그룹의 목에도 힘이 들어갔다. 2002년 대선에서 어이없이 패배하자 한나라당에선 ‘정권을 이미 손에 넣은 것처럼’ 행동했던 이들에게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지만, 이미 때늦은 책임 소재 가리기가 됐을 뿐이다.

    당시 이 총재 측근들은 이 총재의 ‘눈과 귀’를 가렸다. 이 총재의 대쪽 이미지는 여당의 병풍 공세 등으로 흐려졌고, 여권에서 노무현이라는 참신한 인물을 내세워 이 총재를 ‘구시대 인물’로 몰아가는데도 그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을 제대로 보고하기는커녕 이 총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별문제 없다”며 안심시키기에 바빴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그 시기 이회창 캠프는 측근들의 발언권이 너무 강해 핵심 그룹에 끼지 못한 당직자들의 소외감도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를 하나 올려도 몇 단계나 거쳐야 해 의사결정이 늦어지거나, 실무자가 올린 아이디어가 묵살되는 경우도 적잖았다고 한다.

    당시 대선을 지켜봤던 여권 관계자는 “현재의 박근혜 대세론과 이회창 대세론은 다른 점이 많지만, 그때 대세론에 편승한 측근들의 행태만은 박근혜 진영이 앞으로 꼭 참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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