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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칼자루 바뀐 이상한 ‘약 싸움 ’왜?

정신과 의사는 “너희 약 쓸래” vs 제약사는 “쓰지 마” … 간질 치료제 허가 외 사용이 원인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yurim86

칼자루 바뀐 이상한 ‘약 싸움 ’왜?

칼자루 바뀐 이상한 ‘약  싸움 ’왜?
공황장애, 사회공포증 등 불안장애 치료제로 널리 쓰여 ‘정신 질환의 아스피린’으로 불렸던 의약품 ‘리보트릴(성분명 클로나제팜)’. 이 약을 둘러싸고 정신과 전문의와 제약사 한국로슈 간 ‘이상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약사와 의사의 관계를 보면, 제약사가 의사에게 “우리 회사가 판매하는 약을 처방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상식. 그런데 상황이 뒤바뀌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리보트릴을 계속 처방하고 싶어 하지만 한국로슈는 이를 껄끄러워하는 것. 의사와 제약사 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은 1983년 한국로슈의 리보트릴을 간질 치료제(항전간제)로 승인했다. 이 약품은 반드시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쓸 수 있는 전문의약품. 그런데 국내의 정신과 전문의들은 지난 27년간 항전간제로 승인받은 이 의약품을 주로 공황장애, 사회공포증, 강박장애 등의 정신 질환에 처방해왔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이 약을 간질 치료제와 공황장애 치료제로 인정했고, 80여 개국에서 정신과 치료제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대한신경정신과의사회(이하 정신과의사회) 이상민 이사는 “한 가지 약에 다양한 치료 효과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식약청 허가 과정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에 대부분 일단 약의 한 가지 효능을 앞세워 사용 승인을 받고, 이후 약을 폭넓게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정신 질환의 아스피린 ‘리보트릴’

리보트릴은 본 허가사항인 간질 치료보다 불안장애 치료에 더욱 많이 사용됐다. 경기 소재 A대학병원은 2010년 한 해 동안 리보트릴을 8만5000여 정 처방했는데, 그중 간질 치료를 위한 것은 1만여 정에 불과했다. 나머지 7만5000여 정은 모두 불안 치료제로 쓴 것. 서울의 B대학병원도 올 1월 한 달간 정신과 외래 환자에게만 리보트릴을 1200여 건 처방했다. 입원 환자까지 합치면 한 달간 정신 질환 치료 명목으로 7만~8만 정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역시 2007년 4월부터 1년간 통계를 살펴보면, 리보트릴 전체 사용량의 10%만이 간질 치료를 위해 처방됐고 불안장애(48%), 양극성장애(20%) 등 정신 질환에 처방된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올 3월부터 각 정신과클리닉에선 리보트릴 처방이 사실상 금지됐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의 ‘오남용 약물 전산심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오남용 약물 전산심사는 의사가 DUR(의약품 처방조제 지원 시스템)을 통해 자신이 처방한 처방전을 심평원 중앙 서버에 전달하면 심평원이 그중 허가 외로 쓴 의약품을 전산 대조로 찾아 보험료 삭감 조치를 취하는 제도. 보험료를 삭감하면 그만큼의 돈은 병의원과 의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 실질적으로 식약청이 허가하지 않은 용도로 의약품을 사용하던 관행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동안 리보트릴을 불안장애 환자에게 주로 처방해온 정신과 전문의들은 현재 공황 상태다.



“1990년대 제가 레지던트 시절부터 불안장애에 써온 약입니다. 한순간에 ‘식약청 허가사항’이 없다며 쓰지 말라니, 말이 됩니까?”

정신과 전문의 A씨는 “리보트릴은 가격, 효능 면에서 불안장애 처방에 가장 적당한 약”이라고 주장했다. 리보트릴은 한 정에 30원. 공황장애 치료제로 식약청 승인을 받은 알프라낙스정(0.5mg)은 한 정에 119원, 진정 효과를 주는 향정신의약품 자이프렉사정은 2096원으로 리보트릴보다 최소 5배 이상 비싸다. 이상민 이사는 “정신과 약은 장기간 투약하는 경우가 많아, 약값 인상은 장기 복용 환자에게 엄청난 부담”이라고 우려했다.

리보트릴은 오래 먹으면 의존성(중독)을 일으키는 향정신성의약품이 아닌 까닭에 부작용이 적은 약품에 속한다. 반감기(몸 안에 축적된 물질의 양이 반으로 줄어드는 데 소요되는 시간)도 다른 효능의 비교 약품보다 길어 약을 자주 먹을 필요도 없다. 약물에 대한 의존성이 그만큼 크지 않다는 얘기다.

심평원에선 ‘공황장애 사용 허가’

칼자루 바뀐 이상한 ‘약  싸움 ’왜?

미국 대학 신경정신과 전문의 70% 이상이 이용하는 한 교재에도 리보트릴은 간질 치료제(anticonvulsant)뿐 아니라 불안 치료제(anxiolytic)로 사용된다고 명시됐다. 또한 ‘흔히 처방하는 분야’에 공황장애(Panic disorder), 불면증(Insomia) 등이 포함됐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리보트릴을 다시 처방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문제는 이 약품의 생산판매원인 한국로슈가 이에 ‘협조할 마음이 없다’는 것. 정신 질환 치료에 이 약을 다시 이용하려면 판매회사가 식약청으로부터 ‘정신 질환 치료제’로 재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한국로슈는 그럴 계획이 없다.

한국로슈 관계자는 “식약청에서 허가 외 다른 질환 치료제로 재승인을 받는 것이 쉬운 과정은 아니다. 최소 3차례의 임상은 거쳐야 하므로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고 말했다. 정신과의사회에 따르면 이 약품을 임상실험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20억 원 정도. 한국로슈는 “우리도 사업을 하는 기업인데, 나온 지 30년 된 약품에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임상실험을 하는 것은 기업의 경영 계획과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국로슈가 재승인 요청을 머뭇거리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리보트릴 1정은 30원으로 정신과에서 주로 사용하는 약 중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한다. 서울 강북에서 정신과를 운영하는 B박사는 “다른 제약사들은 자사 약품 홍보를 위해 의사를 자주 찾는데, 한국로슈는 정신과에 와서 판촉하는 경우가 없다”고 말했다. 리보트릴이 워낙 싸기 때문에 많이 팔아봤자 이익이 남지 않아 회사 측이 재승인을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하등의 동기가 없다는 얘기다. 한국로슈 측은 “많은 정신 질환 전문의가 오랫동안 우리 약을 써준 것에 대해선 감사히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로서도 사업상 한계가 있다. 현재로서는 리보트릴의 정신 질환 치료제 재승인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정신과 전문의의 반발이 심해지자, 심평원은 4월 1일 “FDA의 기준에 맞춰 리보트릴이 공황장애 치료제로 사용되는 것을 허가하겠다”고 고시했다. 하지만 나머지 불안장애 항목에 대해서는 여전히 사용이 금지된 상황. 이상민 이사는 “사회공포, 강박장애, 불안 등 정신 질환은 공황장애와 유사하지만 공황장애는 더욱 심각한 수준의 질환이다. 큰 범위에서 인정해놓고 개별 항목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심평원 약제기준부 김규임 부장은 “우리는 식약청이 허가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다. 간이 임상이라도 해서 근거가 마련되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이상민 이사가 운영하는 의원의 경우 3월 한 달간 리보트릴을 300여 정 처방해 30만 원 내외의 보험료를 삭감당했다. 1년간 지속된다면 400만 원 가까이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럼에도 대부분 정신과 의사는 보험료를 삭감당하면서 정신 질환에 리보트릴을 처방하고 있다. A박사는 “정신 질환 환자는 기존에 자신이 먹던 약의 색이나 모양만 바뀌어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약을 섣불리 바꿀 수 없다”며 “리보트릴 사용 금지가 지속되면 많은 환자가 고통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간동아 2011.04.04 781호 (p38~39)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yurim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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