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0

2010.11.01

비운 후 채우는 기쁨 파도와 바람이 알려주는구나!

부안 변산마실길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10-11-01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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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 후 채우는 기쁨 파도와 바람이 알려주는구나!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듣고, 낙엽을 밟으면서 숲길을 걷는다. 이처럼 오감을 열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바로 마실길이다.

    “여행이 뭐라고 생각해?”

    며칠 전 술자리를 함께 한 친구가 문뜩 이렇게 묻더니 말을 이었다.

    “여행은 바닥까지 완벽히 비우는 것이라고 봐. 충전지도 확실히 방전돼야 충실하게 채울 수 있듯, 여행을 통해 불필요하게 부유하는 찌꺼기를 싹 없애야 그 힘으로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무려 18km에 이르는 전북 부안군 변산마실길을 7시간여 걷는 내내, 기자의 머릿속에 머문 생각 역시 ‘비움’이다. 바닷가 모래 위에 작은 흙무더기 자수를 놓은 게들과 대화하고, 거친 파도와 벗하며, 바스락바스락 숲 속 낙엽까지 밟을 수 있는 이 길은 각종 장르가 잘 어우러져 속이 꽉 찬 ‘웰 메이드’ 영화 같다. 그런데 ‘비움’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새만금전시관에서 격포항까지 들쭉날쭉한 해안선 따라 이어지는 변산마실길은 2009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됐다. ‘마실’은 ‘마을’의 방언으로, 마실길은 마을로 나가는 길을 뜻한다. 그 이름처럼 길 중간 중간 사망마을, 유동마을, 죽막마을 등 오래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은 촌락을 만날 수 있다. 가을바람이 본격적으로 차지기 시작한 10월 25일 이 길에 첫발을 디뎠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3시간여 시원하게 달리면 부안IC가 나온다. 30번 국도를 따라 30분쯤 가면 변산마실길(이하 마실길)의 시작인 새만금전시관이다. 오전 10시쯤 이곳에 다다랐다. 전시관 앞에는 마실길 임시안내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물때 시간 및 마실길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마실길은 3단계 코스로 구성된다. 1단계는 새만금방조제에서 송포에 이르는 5.3km 길, 2단계는 송포에서 성천에 이르는 5.7km 길, 3단계는 성천에서 격포항에 이르는 6.5km 길이다. 코스별로 펼쳐지는 풍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게 마실길의 매력이다.

    들쭉날쭉 해안선 따라 이어지는 길

    오전 10시 30분쯤 마실길 이정표를 따라 1단계 코스(이하 1코스)로 들어섰다. 1코스는 바닷길과 숲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바닷길은 썰물 때만 걷는 게 가능하다. 다행히 이날 오전에 물이 많이 빠져 바닷길로 걸을 수 있었다. 새만금방조제를 뒤로한 채 고운 모래가 펼쳐진 바닷길에 들어서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게들이 팔딱팔딱 난리를 치며 반겼다. 처음엔 푹신푹신한 느낌이 좋아 발을 꾹꾹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그랬더니 동행한 안내인 김상용 씨가 “바닥을 찬찬히 살펴보라”고 했다. 동글동글 작은 흙무더기가 바닷길 전체를 수놓고 있었다. 이를 창조해낸 게들이 작은 구멍으로 쏙 빠져나왔다가 다른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게가 하도 많아 옮기는 걸음에 밟히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게들이 미리 도망칠 수 있도록 발을 내딛기 전 바닥을 툭툭 치라”는 김씨의 조언에 따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바닷길엔 백합, 조개 등이 지천이었다. 조개 캐는 사람도 여기저기 보였다. 갯바위엔 천연 굴과 어린 소라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칼로 살짝 떼어내 초고추장에 찍어 소주와 함께 먹으면 제맛이란다. 거기서 만난 동네 주민들은 “방조제가 생기기 전 더 많은 갯벌 생물이 살았지만, 지금 많이 죽어버렸다”며 아쉬워했다.

    저 멀리 파도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1시간 30분쯤 걷자 1코스가 끝났다. 작은 포구인 송포항 인근의 한 음식점에서 오징어와 조개 그리고 양배추가 듬뿍 들어간 해물짬뽕국밥을 먹었다. 국물이 무척 시원했다. 보통 서울 등 외지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사람들이 10~11시에 마실길 초입에 도착해 1시간여 동안 1코스를 걷고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한다고 했다.

    “‘해풍 맞은 대파’라고 들어봤어요?”

    1코스와 2코스 사이에는 작은 텃밭이 이어졌다. 배추와 대파, 쪽파, 마늘, 호박 등이 빼곡히 심어져 있는데, “거세면서 짭조름한 해풍과 강한 햇살을 듬뿍 받아 다른 지역 채소보다 훨씬 맛나다”고 김씨가 자랑했다. 그러더니 무화과 열매를 하나 따서 기자에게 건네면서 “어제 비가 내려 먼지가 싹 쓸려갔으니 그냥 먹어도 좋다”고 했다. 한입 베어 물자, 살짝 떫은 듯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찼다.

    비운 후 채우는 기쁨 파도와 바람이 알려주는구나!

    1 숲길로 걷는 2코스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아 1코스보다 걷기 힘들다. 하지만 땅이 폭신폭신해 발과 다리에 큰 무리를 주지 않는다.

    이정표를 따라 2코스에 접어들었다. 1코스가 바닷길이라면 2코스는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숲길이다. 물론 물때를 잘 맞추면 바닷길로도 걸을 수 있지만,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개인적으로는 숲길을 추천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아 1코스보다 걷기 힘든 편이다. 원래 2코스는 서해를 지키던 군인들 길이었다. 지금도 녹슨 철조망이 쭉 둘러쳐 있고,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엔 낡은 해안 초소가 예전 그대로 있다. 이곳에서 경비를 서던 젊은 군인들은 저 멀리 망망대해와 부서지는 하얀 파도를 보며 무엇을 떠올렸을까. 나라를 지킨다는 애국심이었을까. 아니면 고향에 두고 온 ‘순이’의 뽀얀 살결이었을까. 거센 바람과 파도, 바스락바스락 낙엽 소리가 묘한 앙상블을 이뤄 귓가를 계속 울렸다.

    송포항을 지나 사망마을에 이르렀다. 기자가 “무슨 마을 이름이 ‘사망’이냐”고 묻자 김씨는 “‘선비 사’자를 쓴다. 이 마을 사람은 다 선비처럼 점잖다”며 허허 웃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1시간여 걷다 보니 방풍림으로 유명한 고사포해수욕장이 나타났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소나무 숲길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바람이 무척 시원해 여름철이면 이곳에서 야영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천천히 이야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으며 걷다 보니 2시간가량이 훌쩍 지났고, 어느새 2코스 종착점인 성천이었다.

    볼거리 많은 3코스, 걷기에는 부적절

    3단계 코스는 하섬과 적벽강, 수성당, 채석강 등 볼거리가 많다. 혹자는 ‘마실길의 백미’라 칭하기도 한다. 입구부터 20여 분 걸으니 하섬전망대에 다다랐다. 저 멀리 하섬이 보였다. 사리(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커지는 시기) 때 모세의 기적처럼 하섬전망대에서 하섬에 이르는 2km 바닷길이 열려 유명한 곳이다. 안타깝게도 기자가 갔을 때는 밀물이었고 이미 거대한 물길이 갯벌을 삼켜버린 뒤였다. 그 엄청난 바닷물을 싹 빠져나가게 하는 자연의 힘이 참 경이로웠다. 홍해를 갈랐다는 모세도 실은 물때를 잘 아는 바다 사나이 아니었을까.

    수사자가 앉아 있는 형상인 적벽강 해안절벽과 바다에 나가기 전 서해를 다스리는 여해신 개양(수성)할미에게 제를 올렸다는 수성당, 태고부터의 세월이 두꺼운 장서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채석강을 차례로 지났다. 온몸을 날려 보낼 듯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찾아간 이곳들은 유명세만큼이나 절경이었다. 하지만 ‘길’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3코스는 이전 두 코스보다 훨씬 못하다. 그저 경관이 좋은 유명 관광지를 억지로 이어놓은 듯하다. 국도를 따라 아스팔트 바닥을 걸어야 하는 구간이 많아 체력이 약하거나 체중이 좀 많이 나가는 이,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이는 자동차로 이동하는 게 낫지 싶다.

    마실길 중간 중간 이정표가 지금까지 얼마나 걸었고, 앞으로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채석강을 지나 16km쯤 걸었을까. 발바닥과 뒤꿈치가 알싸하게 아파왔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 뻐근함 속에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입 안 생채기를 혓바닥으로 계속 건드릴 때 느껴지는 감각이랄까.

    3코스 종착점인 격포항을 1km 앞둔 지점에 이르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바다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는 해가 마치 홍시 같았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석양을 찍기 위해 그 자리에 멈췄지만, 기자는 계속 앞으로 걸었다. 종착점을 ‘찍고’ 와야겠다는 ‘오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힘이 불끈 솟았다. 10분여를 갔을까. 3코스 종착점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아침부터 시작한 마실길 걷기는 이렇게 해가 질 때 끝이 났다. 기쁘고 뿌듯했다.

    기자와 마실길을 동행했던 안내인 김상용 씨는 “오감을 열어놓고 걸으라”고 조언했다. 바다와 갯벌, 숲 풍경, 바람과 파도, 갈매기 소리, 그리고 짜고 달고 신 냄새가 어우러지는 마실길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라는 것. 특히 마라톤 완주하듯 쉬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걷는 이들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고 했다.

    비운 후 채우는 기쁨 파도와 바람이 알려주는구나!

    2 부드러운 바닷길을 걷다 보면 바닷바람에 짭조름한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3 하섬으로 가는 2km 바닷길을 걸으려면 물때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사진은 사리 때 바닷길이 열린 모습.

    “오감을 열어놓고 걸으라”

    “사실 1코스만 걸어도 되거든요. 썰물 때 바닷길로 걷고, 밀물 때 숲길로 걸어 돌아오는 거죠. 그리고 다음 날 2 또는 3코스를 걸으면 되잖아요. 요즘엔 도로가 잘 뚫려 당일치기로 왔다가 길만 정신없이 걷고 돌아가버리는 사람이 많아요. 이곳에 온 사람들이 천천히 여유를 가지면서 걷기도 하고 쉬기도 하며 식사도 하고 마을에 들러 민박도 하면 지역 경제에 도움도 되고 좋을 텐데, 그저 ‘완주’에만 의미를 두고 걸으니 아쉬울 뿐이죠.”

    현재 새만금전시관에서 격포항까지 개발된 마실길은 변산반도 남쪽 해안을 따라 부안자연생태공원까지 확장될 예정이다. 그러면 2012년 총거리 66km의 변산마실길이 완성된다.

    “여행은 누군가 또는 무언가와 함께 하는 게 아닐까.”

    “여행이 뭐라고 생각해?”라는 친구의 질문에 대한 기자의 답이었다. 18km를 7시간여 동안 줄곧 걷다 보니 확실히 방전된 충전지처럼 완벽히 비워졌다. 그리고 ‘누군가’와 ‘무언가’로 충실히 채웠다. 지금도 입술을 훔칠 때마다 거센 바닷바람의 ‘짠내’가 느껴진다.

    비운 후 채우는 기쁨 파도와 바람이 알려주는구나!
    Basic info.

    ☞ 교통편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고속도로 →서천공주고속도로 →서해안고속도로 →부안IC →30번 국도 →새만금전시관

    ☞ 코스

    1단계 코스 | 새만금방조제 →합구마을 →대항리패총 →변산해수욕장 →송포, 5.3km, 1시간~1시간 30분

    2단계 코스 | 송포 →사망마을 →노리목 →고사포해수욕장 →성천, 5.7km, 1시간 30분~2시간

    3단계 코스 | 성천 →하섬전망대 →변산해안도로 →격포자연관찰로 →적벽강 →수성당 →격포해수욕장 →채석강 →격포항, 6.5km, 2시간 30분~3시간

    Tip.

    1. 마실길을 걸을 때 반드시 물때를 알아야 한다. 부안군청 환경녹지과(063-580-4382)나 변산마실길 임시안내소(016-654-7660)에 문의하면 알 수 있다. 국립해양조사원 홈페이지(www.khoa.go.kr)에서 ‘바다갈라짐 정보’를 검색하거나, 부안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www.buan.go.kr/02tour)에서 ‘관광정보’ 산하 ‘조석 및 바다갈라짐 정보’를 찾아봐도 된다.

    2. 길 중간 중간에 ‘마실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대형 현수막이나 나뭇가지에 빨간 리본을 걸어 안내하기도 하니, 길을 찾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다만 길이 자주 마을을 통과해 시골집 옆을 따라가더라도 잘못 들어선 게 아니므로 당황하지 말자.

    3. 1코스 시발점인 새만금전시관에 차를 세워놓고 걷기 시작한다. 3코스 종착점인 격포항에 ‘콜택시’를 불러 새만금전시관으로 돌아가면 된다. 둘 다 유명 관광지라 콜택시를 부르기 쉽다. 비용은 1만3000~1만5000원. 물론 격포항 인근 격포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새만금전시관으로 돌아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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