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9

2010.10.25

막걸리

色 - 각 지역 특산품과 만나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 戒 - ‘술에 물 탄 듯’ 너무 닮은 맛 정체성의 위기도

  • 이소리 시인·‘막걸리’저자 Isr@naver.com

    입력2010-10-25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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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

    지역 농특산물과 만난 우리 막걸리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와인을 울리는 우리 전통술 막걸리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국내산 쌀 막걸리, 유기농 쌀 막걸리를 넘어 토종 농산물을 넣고 빚어 새로운 맛과 향을 지닌 막걸리가 속속 등장한다. 누룽지 막걸리, 더덕 막걸리, 인삼 막걸리, 오미자 막걸리, 복분자 막걸리, 선인장 막걸리, 민들레 막걸리, 대추 막걸리, 포도 막걸리, 체리 막걸리, 홍시로 빚은 감 막걸리에 이어 사과 막걸리까지 나왔다. 이들 막걸리는 지역 농특산물을 활용해서 지역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막걸리는 그동안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쌀, 보리, 밀, 옥수수, 조 등 곡물을 재료로 빚었다. 여기에 다양한 농특산물과 결합해 막걸리의 옷이 더욱 화려해진 셈. 이러한 농특산 막걸리는 독특한 맛과 향, 색상, 뒷맛, 목넘김 등에서 곡물로 빚은 막걸리와는 확실히 차별성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특산물을 많이 넣었다 해도 곡물을 주재료로 한 막걸리 그 바탕은 바뀌지 않는다.

    화려한 농특산물은 막걸리 맛과 향을 더욱 빛내주는 양념일 뿐이다. 지난 5월 ‘환족이 빚은 신비스런 술방울’이라는 덧글이 붙은 책 ‘막걸리’를 낸 필자가 곡물로만 빚은 막걸리를 고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낸 지 6개월도 안 돼 책에 소개한 곡물 막걸리들의 맛이 너무 많이 바뀌어 책을 다시 써야 할 판이다.

    지난 추석에 고향 창원에 간 필자는 오랜만에 만난 벗들과 허름한 목로주점에서 막걸리를 시켰다가 60대 주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요즘 통합창원시(창원, 마산, 진해)뿐 아니라 경상남도 전체에 있는 막걸리 집이 모두 부산 ‘생탁’만 취급하고, 손님들도 부산 ‘생탁’만 찾습니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합창원시가 되긴 했지만 옛 창원시에는 그 유명한 북면과 동읍막걸리가 있고, 마산에는 가고파, 마산 인근에는 진동막걸리, 내서막걸리, 중리막걸리, 수정막걸리 등이 있고, 진해에는 군항주가 있잖습니까. 그런데 손님들이 왜 고향 막걸리를 찾지 않고 부산 ‘생탁’만 찾는 거죠?”

    “손님들이 ‘생탁’이 제일 맛있다카는데 우짭니꺼. 오죽했으믄 마산서 나오던 가고파 막걸리를 부산 ‘생탁’ 이름을 따서 창원 ‘생탁’으로 바꿨겠습니꺼. 그뿐 아입니더. 이 지역 양조장에서 말통으로 나오던 막걸리도 전부 플라스틱 병에 담겨 나온다 아입니꺼. 위생 때문이라 안 캅니더.”

    그랬다. 부산의 대표적 막걸리인 산성막걸리와 생탁은 그동안 수입산 쌀에서 우리 쌀로, 우리 쌀에서 유기농 쌀로 원료를 바꾸면서 지역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지역축제가 열릴 때마다 막걸리 마케팅을 적극 펼쳤고 일본 등 해외 수출도 꾸준히 늘리고 있다. 특히 부산 ‘생탁’을 빚는 부산합동양조는 지난 7월부터 2005~2009년에 수확한 우리 쌀을 원료로 막걸리를 빚으며 으뜸 막걸리 맛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생탁’이 경남지역 소비자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비결이 여기에 있다.

    곡물로 빚은 막걸리와 차별성

    막걸리

    다양한 막걸리로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이 회사는 생막걸리 외에도 저온살균을 거친 살균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그 이름은 ‘생탁’이 아닌 ‘살탁’으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전국 곳곳은 물론 일본 등 해외 유통도 더욱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금정산성막걸리’도 ‘생탁’ 인기에 밀리지 않으려고 원료 고급화, 지역 브랜드화로 새로운 꿈을 꾸지만 지금은 그 명성과 유통망을 부산 ‘생탁’에 빼앗긴 상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난 추석 때 마신 부산 ‘생탁’은 올 초 설 연휴 때 마신 그 부산 ‘생탁’ 맛이 아니었다. 올 초에 마신 부산 ‘생탁’은 톡 쏘는 맛이 강했다. 여기에 외국쌀로 빚은 막걸리여서 그런지 뒷맛이 약간 느끼하면서 취기가 빨리 올라왔다. 하지만 추석 때 마신 부산 ‘생탁’은 깔끔한 신맛에 약하게 톡 쏘는 감칠맛이 좋아 막걸리 잔을 자꾸만 들게 했다. 물론 필자가 국내 최고로 꼽는 여수 개도막걸리 맛은 따라잡지 못했지만 그 맛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목넘김도 아주 깔끔했다.

    그뿐이 아니다. 지난 9월 종로구 인사동에서 벗들과 마신 전주 생막걸리와 밀로 빚은 전주 명가생막걸리(옛 비사벌)도 맛과 향이 많이 바뀌었다. 필자가 지난해 겨울, 전주 서신동 막걸리타운에 가서 마신 막걸리는 약간 시큼하면서도 혓바닥 위를 톡톡톡 튀는, 톡 쏘는 맛이 좀 강했다. 하지만 인사동에서 마신 전주 생막걸리와 명가생막걸리는 시큼한 맛보다 달큼한 맛이 짙어졌고, 톡 쏘는 것도 부드러워 그야말로 술술 넘어갔다.

    그러나 막걸리 잔을 내려놓으며 아쉬움도 컸다. 각 지역에서 빚는 막걸리 맛이 날이 갈수록 ‘짝퉁’처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전주에서 빚은 막걸리를 마시는 건지, 서울 장수막걸리를 마시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필자가 막걸리 맛의 진화를 무조건 반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막걸리의 진화가 거듭될수록 그 지역만의 맛이 사라지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너무 닮아가는 것은 분명 막걸리 진화에 걸림돌이 아니겠는가.

    요즘 막걸리 맛이 시큼달큼함보다 달큼한 맛으로, 혀를 강하게 톡 쏘는 거친 맛보다 부드럽게 휘감는 약탄산성으로 바뀌는 것은 여성과 신세대는 물론 외국인의 입맛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막걸리는 막걸리다워야 한다. 아무리 맛이 달라져도 막걸리가 지닌 시큼달큼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막걸리 고유의 맛이다. 따라서 무조건 여성과 신세대, 외국인 입맛에 맞출 게 아니라 다양한 맛을 지닌 막걸리로 진화하는 것이 대한민국 막걸리가 영원히 사랑받는 지름길이다.

    그동안 막걸리 양조장에서는 국내산 쌀로 막걸리를 빚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다. 대부분 국내산보다 값이 싼 수입쌀로 막걸리를 빚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국내산 쌀로 빚지 않으면 막걸리 시장에서 버티기 어렵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아스파탐(단맛을 내는 인공감미료)을 뺀 막걸리도 등장했다. 쌀을 생산하는 농민에게도 좋고, 막걸리 애호가의 건강에도 좋으니 일석이조다.

    그러나 국내산 쌀로 빚고 아스파탐을 넣지 않은 막걸리라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앞으로 막걸리 시장의 승부는 막걸리 발효과정에 쓰이는 미생물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곡자’ ‘국자’라고도 부르는 우리나라 누룩은 예부터 밀을 굵게 갈아 반죽한 뒤 덩어리를 만든 다음 누룩곰팡이를 띄워 만들었다. 필자가 어릴 적 어머니께서 누룩을 만들 때 우선 밀을 절구통에 빻아 물로 반죽했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로 뭉쳐 삼베로 감싼 뒤 꾹꾹 밟아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 보름가량 두었다가 곰팡이가 잘 뜨면 꺼내 햇볕에 말려 막걸리를 빚을 때마다 썼다.

    이 누룩을 잘 띄웠느냐, 못 띄웠느냐에 따라 막걸리 맛이 좌우된다. 이런 까닭에 같은 마을에서 같은 우물물로 빚은 막걸리도 집마다 맛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누룩을 골고루 잘 띄우기가 어렵다는 방증. 계절과 온도, 습도에 따라 누룩이 뜨는 것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막걸리 대량소비시대여서 오랜 시간이 걸리는 누룩을 한 번에 많이 만들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조금만 실수해도 누룩은 변질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막걸리 업체들은 막걸리를 빚기 위해 전통적인 누룩 대신 ‘아스페르질루스 오리재(Aspergillus oryzae)’라는 미생물을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하고 있다. 이 미생물은 메주에서 나오는 일종의 곰팡이로 쌀을 당화(糖化)하는 구실을 한다. 당화는 막걸리 빚기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이 미생물의 특허권은 일본이 갖고 있다.

    막걸리

    최근 막걸리는 국산 쌀로 빚어 예전보다 맛이 훨씬 좋아졌다. 막걸리를 담그는 과정(왼쪽) 시연과 고두밥(오른쪽).

    막걸리 발효제 일본에서 수입

    또 일부 업체에서는 ‘아스페르질루스 오리재’ 대신 전통 누룩에서 찾아낸 ‘리조푸스 오리재(Rhizopus oryzae)’라는 곰팡이를 쓰기도 하나, 이 곰팡이의 대표 균주 또한 이미 미국과 캐나다 연구진이 특허등록까지 마친 상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막걸리를 빚는 ‘미생물’의 뿌리를 나라 밖에 빼앗기고 있는 형국이다.

    이제 국내 막걸리 제조업체들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무리 우리 누룩 만들기가 까다롭고 번거롭다 하더라도 우리 균주를 만들어내야 한다. 언제까지 일본에게 막걸리 균주를 기댈 것인가. 또한 일본이 만든 균주를 우리가 만들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막걸리는 우리 쌀과 균주로 빚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 CJ, 오리온, 농심 등 대기업들도 점점 덩치가 커지는 막걸리 시장을 잡기 위해 눈독을 들이고 있다. 막걸리가 주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5년간 5%대였다가 2009년 7.8%로 치솟았고, 2010년 1분기에는 12%를 차지하며 매출 5000억 원대를 넘어섰다. 주류업계 관계자들은 앞으로 막걸리가 1조 원대 시장을 형성할 것이라 내다본다. 막걸리 시장은 ‘장수막걸리’를 빚는 서울탁주가 점유율 53%로 선두를 달리고, 국순당이 13%의 점유율로 추격하는 양상이다. 나머지는 지역에 뿌리를 둔 영세업체가 고만고만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막걸리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위대한 민족 문화유산이다. 지역 곳곳에서 나오는 막걸리가 와인을 밀어내고 지구촌을 누비는 것도 지역마다 지닌 독특한 막걸리 맛 때문일 것이다. 대기업들이 막걸리 시장에 뛰어드는 것을 보며 우려스러운 마음이 든다. 혹 대량유통과 대량생산에 눈이 멀어 지역만의 막걸리 맛과 향을 무시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대기업들도 우리나라 곳곳에서 빚고 있는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지역 막걸리를 있는 그대로 보듬을 줄 알아야 한다. 막걸리 세계화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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