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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의 5분 세계사

“죽음아 비켜라!”… 검투사의 추억

잉글랜드 요크에서 80여 구 검투사 추정 유골 발굴 … 운명에 복종 철저한 행동규범 요구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죽음아 비켜라!”… 검투사의 추억

잉글랜드의 요크 지방에서 검투사로 추정되는 유골이 집단적으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있었다. 아직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라 80여 구의 유골을 검투사로 단정하기에는 이르지만 사자, 표범, 곰 등 맹수가 물어뜯은 흔적, 목이 찔린 흔적, 팔 한쪽이 비대칭적으로 발달한 흔적 등이 검투사의 유골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요크의 유골은 로마제국의 변방에서도 로마 고유의 전통이 널리 수용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양 고대의 ‘글로벌 문화’로서 로마 문화의 위상과 영향력을 시사한다.

로마 사회에서는 이미 공화정 시대부터 검투사들이 벌이는 격투기가 성행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격투기는 처음에 제례(祭禮)의 형태로 등장했다. 기원전 264년 로마 귀족가문의 브루투스 형제는 부친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3쌍의 검투사가 묘지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도록 했다. 또 기원전 216년 레피두스라는 인물이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들은 사흘간의 장례기간에 로마의 광장에서 총 22쌍의 검투사로 하여금 격투를 벌이게 했다. 기원전 206년 이베리아에 주둔 중이던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도 포에니 전쟁에서 사망한 부친과 삼촌의 장례식에 검투사들을 동원했다. 장례행사에 등장한 이들 검투사는 일종의 인신공양에 해당하는데, 이는 죽은 노예나 부하들의 영혼이 사후 세계에서 주인이나 지도자를 섬기도록 하는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이후 로마에서는 검투사의 격투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록되지 않을 정도로 흔한 것이 됐다. 검투사들을 동원해 장례식 행사를 치르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관직에 진출하거나 권력을 갈망하는 로마의 엘리트들은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검투사들의 격투기는 로마 시민에게 인기 있는 구경거리였기 때문에 정치적 야심을 가진 권력자나 정치가들은 이를 통해 시민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개인적인 제사의식에서 공적인 경기로 발전

예컨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의 실력자로 등장한 술라는 한때 사치금지법을 만든 적도 있지만, 부친의 장례를 치르면서는 검투사를 동원해 호화로운 격투기 행사를 거행했다. 술라를 이어 로마의 권력을 장악한 카이사르는 시민의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술라를 능가했다. 그는 죽은 지 무려 20여 년이나 된 부친의 장례식을 거행한다는 구실로 320쌍의 검투사에게 무기와 갑옷을 은으로 치장하고 싸우게 했다. 카이사르가 마련한 검투사들의 격투기는 규모와 비용에서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는 것으로 행사의 성격이 그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보여준다. 원래 개인이 주관하고 묘지나 광장에서 거행하는 사적인 제의(祭儀)였던 검투사들의 격투가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국가가 후원하고 대형 경기장에서 치르는 공적인 경기(競技)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국가적 행사로서 검투사들의 격투기는 제정시대에 접어들어 정점에 달했다. 원수정을 세워 제정을 확립한 아우구스투스와 후임 황제들은 대부분 검투사 경기를 적극 후원하고 즐겼다. 사실 제정시대 검투사의 경기는 본질적으로 황제 숭배를 위한 국가 행사로서 황제와 그의 통치에 대한 존경과 지지를 구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이에 따라 경기의 규모와 경비도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였다. 예컨대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는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약 1만 명의 검투사와 그보다 많은 수의 동물을 동원해 무려 123일 동안 경기를 열 정도였다. 2세기 후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경비 지출에 상한선을 두려 했지만 후임자들이 이를 무시함으로써 소용이 없었다.

3세기 이후에는 사회적, 경제적 위기 속에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황제가 베푸는 대규모 유흥으로서의 검투사 경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4세기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제의로서 검투사의 격투행위는 이교적 관습이란 이유로 법적으로 금지됐다. 그럼에도 검투사의 격투기는 부분적으로, 즉 맹수와 싸우는 형태로 제국의 몰락 시점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죽음아 비켜라!”… 검투사의 추억

1960년에 개봉한 영화 ‘스파르타쿠스’에 나오는 검투 장면.

로마의 검투사들은 직업적인 투사로서 전문적인 양성소에서 엄격하고 고된 훈련을 거친 자들이었다. 그러나 로마 사회에서 검투사는 뚜쟁이나 백정처럼 천대받은 신분이었고, 검투사라는 말도 모욕적인 의미로 사용됐다. 로마의 검투사들은 주로 노예 출신이었는데, 그 사회에서 노예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거나 채무관계로 인신의 자유를 상실한 자로서 신분적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검투사 가운데는 자유민 출신도 상당했다. 그들은 경제적 파산에 당면해 부채 탕감을 조건으로 계약을 통해 자원한 자들이었다. 검투사는 천한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격투기술로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이들은 관중에게 큰 인기를 누렸을 뿐 아니라 상금으로 재산을 모으거나 신분적 해방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검투사 경기가 성행하면서 검투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죄수들도 경기장에 투입됐다. 로마의 법원은 강도, 살인, 신성모독, 반역 등 중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경기장에 내보내는 형을 선고했고, 경기는 흉악범이나 중죄수를 처형하는 기회로 활용됐다. 경기장에서 그들은 맹수와 싸우거나 치명적인 역할의 극중 인물로 분(扮)해 목숨을 잃었다.

1년에 2, 3회 출전, 2대2 검투사 대결 특히 인기

로마의 검투사 경기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일정한 패턴으로 표준화됐다. 경기는 사전에 벽보를 통해 공지됐으며, 구호 식량을 받는 빈민 가운데 추첨을 통해 무료입장의 기회가 주어진 자를 제외하고는 관람권을 구매해야 했다. 경기는 대개 오후에 진행됐고, 경기에 앞서 당일 아침과 점심 녘에는 맹수의 싸움이나 악명 높은 죄수의 처형 같은 구경거리가 별도로 제공됐다. 오후의 경기는 일련의 화려한 행진이 있은 뒤 최종적으로 검투사들이 입장하면서 시작됐다.

로마의 검투사들은 투구, 방패, 창, 칼, 채찍 등 무장과 무술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구분됐다. 경기장에 모인 관중도 좋아하는 검투사의 유형에 따라 몇 개의 ‘파당(faction)’으로 나뉘었다. 관중이 가장 선호하는 경기 형태는 한 쌍의, 서로 다른 유형의 검투사가 일대일로 격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유형 외에도 집단으로 싸우거나, 한 경기의 승자가 이어서 새로운 도전자를 상대하는 등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경기도 있었다. 검투사가 치르는 경기의 수는 일정치 않았지만, 30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총 34차례 경기를 했다는 한 검투사의 묘비 기록을 고려하면 1년에 평균 2~3차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숙련된 검투사끼리의 경기는 사전 각본에 따라 진행되기도 했고, 승패가 생사를 가르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갈수록 자극적인 것을 찾는 관중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경기의 승패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로마시대 검투사의 격투는 삶에 활력을 주는 하나의 경기에서 살인을 포함한 잔혹한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검투사에게는 여전히 일정한 행동규범이 요구됐다. 검투사는 용감하게 싸우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검투사에게 죽음은 패배라는 불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검투사의 경기를 모티프로 한 로마시대 벽화는 무릎을 꿇고 승자의 칼에 목을 내민 채 처분을 기다리는 패자의 모습을 담았다.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나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검투사 경기에는 비판적이었지만 검투사에게는 스토아적 가치를 기대했다. 즉 검투사는 주인과 운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목전의 죽음에도 평정을 유지함으로써 죽음을 무력하게 할 뿐 아니라 천한 본성마저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실제 경기장에서 죽음을 ‘훌륭하게’ 맞은 검투사들의 최후처리는 일정한 절차와 의식을 거쳤는데,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치거나 목을 찔러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는 관행도 포함됐다. 반면 검투사로서의 서약을 지키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죽은 자는 그런 ‘자비’마저 받지 못했으며, 시신도 매장되지 못하고 방치됐다.



주간동아 2010.07.12 745호 (p82~83)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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