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9

2010.05.31

‘재정위기’ 암초에 걸린 유럽연합

유로화는 창의적 대응의 결과물 … 오늘 위기 또 다른 통합으로 발전 가능성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입력2010-05-31 1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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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세계경제에 다시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이번에는 미국 월가 대신 유로존, 즉 1999년 이후 유로화를 공용 화폐로 사용하는 유럽 국가들이 위기의 진앙이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부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 여파 속에서 유로존 국가들이 고강도 긴축정책을 추진하면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유로화가 폭락하고, 유럽뿐 아니라 미국과 아시아 등 전 세계 증시와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그리스의 재정 적자에서 촉발한 유로존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전망은 사뭇 비관적이다. 긴축정책에 대한 사회적 저항으로 유로존 국가들이 위기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지적과 함께, 결국 유로 체제가 붕괴하고 유로화가 사라질 것이라는 극단적 전망까지 등장했다. 당면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서 유로존의 태생적 결함이 거론되기도 한다. 단일통화권을 창설하면서 역내 회원국 간 경제 격차를 무시했고, 통화 정책은 유럽중앙은행을 통해 단일화하면서도 재정 정책은 회원국 정부 소관으로 방임했다는 비판이다. 이에 따라 재정 불량국가를 유로존에서 축출하거나 통화권역을 경제수준에 따라 분리,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여러 난관을 헤쳐온 유럽 통합 과정이 재정위기로 큰 암초에 부딪힌 형국이라 통합유럽의 장래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 대한 통찰이 미래 전망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유럽 통합의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초국가 공동체가 유럽 미래 보장 인식 확산

    이념상 통합유럽의 기원은 기독교 보편제국의 이념이 지배한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연합(EU)처럼 개별 국민국가가 스스로 주권을 양도하고 초국가적 지배를 수용하는 형태의 통합에 대한 구상이 등장한 것은 20세기에 들어 유럽이 사상 유례없는 대전쟁을 경험하고 난 뒤였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럽의 정치가들 가운데는 국가 간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는 국민국가의 전통을 극복하고 초국가적 공동체를 창설하는 것만이 유럽의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이들이 나타났다. 1, 2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戰間期)에 활동한 독일과 프랑스의 정치가 슈트레제만과 브리앙이 그러했다. 그들은 전쟁과 전후처리 과정에서 상호 증오와 적대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양국의 화해를 추구하고, 나아가 유럽 전체의 경제·정치 과제를 다룰 국가연합의 결성을 촉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지도자 처칠도 전후 유럽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동서 유럽국가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통합기구의 창설을 제안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의 상황은 파시즘이 득세한 전간기에 비해 유럽 통합의 비전에 유리했다. 국제분쟁의 종식과 경제부흥이 전후 지상과제였고, 통합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으로 인식됐다. 실로 전후 세대에게 유럽 통합은 평화와 번영의 동의어가 될 정도로 관심과 기대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유럽 통합에 대한 열망만으로 통합유럽이 출현한 것은 아니다.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수사와는 달리 유럽 각국의 지도자나 국민은 국민국가의 상징인 주권의 양도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다. 국민국가의 이익이 침해받는 한 통합은 불가능했으며, 통합 과정에는 국민국가의 이기심이 작용했다.

    이러한 점은 유럽 통합의 출발점이었던 1952년 유럽 석탄철강공동체의 창설에서 잘 드러났다. 프랑스 경제학자 장 모네의 구상과 프랑스 외무부장관 슈만의 제안에 따라 석탄과 철강산업의 공동관리를 목표로 설립된 이 기구에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6개국이 가입했다. 이들 국가가 석탄 및 철강산업에 대한 관할권을 초국가적인 기구에 이양하는 데 동의한 배경에는 국익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 독일의 침략전쟁을 경험한 프랑스와 베네룩스 국가들은 군수산업으로서 독일 중공업의 위협적인 잠재력을 초국가적 기구를 통해 통제하려 했던 반면, 서독은 국제기구에 참여함으로써 침략국가의 오명을 씻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유럽 통합은 범유럽의 이상을 향한 뜨거운 열망보다 국가적 이해득실이라는 차가운 계산에서 출발한 셈이다.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출현 역시 유럽 통합의 과정이 국가적 이해관계로 추진됐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석탄철강공동체의 6개 회원국이 공동시장의 범위를 광업 분야에서 농업과 대외무역으로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한 주 동기는 유럽 내 관세와 시장의 통합으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통합 주역은 투철한 애국심 소유자들

    유럽 통합 과정에서 주역을 담당한 인물들도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으며 투철한 애국심의 소유자들이었다. 1960년대 독일과 프랑스 간 화해와 협력을 주도하며 유럽 통합의 토대를 다진 아데나워와 드골이 그러했다. 아데나워의 서방 편입 정책은 일차적으로는 냉전체제 아래 분단된 신생 민족국가의 존립을 위한 것이었다. 드골에게도 유럽 통합은 어디까지나 ‘조국들의 통합’일 뿐이었다. 그는 유럽 통합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통합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로 경제적 이점, 특히 농업 정책에 있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유럽공동체가 창설 당시부터 추진한 다수결 원칙 대신 개별 회원국의 비토권을 관철했으며, 이 비토권을 이용해 유럽공동체에 가입하려는 영국의 시도를 끝내 좌절시켰다. 영국의 가입은 프랑스의 국가적 이익을 위협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유럽공동체가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 등으로 확대된 것은 드골이 퇴임한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였다. 그러나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졌던 1970년대에는 통합이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고 유럽공동체는 사실상 빈사 상태에 빠졌다. 영국을 비롯한 여러 회원국이 유럽공동체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 맞서 되도록 독자성을 유지하려 했고 재정 부담도 회피하려 했다.

    유럽 통합 과정이 생명력을 회복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80년대 초 그리스에 이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새로운 회원국이 됐다. 회원국들은 날로 경쟁이 심화하는 세계경제의 도전에 직면해 유럽시장의 통합 강화에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냉전 종식이라는 당시 국제 정세도 유럽 공동의 외교 및 안보 정책에 대한 관심을 자극해 통합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엽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취임한 자크 들로르가 통합의 진척을 위해 새로운 구상을 내놓았으며, 들로르의 구상을 지지한 독일의 콜 정부와 프랑스 미테랑 정부가 다시 유럽 통합의 견인차 구실을 떠맡았다.

    통합의 진전은 1992년 유럽공동체 12개 회원국 정상이 서명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구체화됐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노동, 자본, 상품, 용역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폐하고, 경제 및 통화연합을 단계적으로 실현하며, 공동체 차원에서 통일된 외교 및 안보 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유럽공동체가 경제뿐 아니라 정치 측면에서도 그 비중에 걸맞은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마스트리히트 조약이었던 것이다. 이 조약을 통해 유럽공동체는 면모를 일신하고 유럽연합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1999년에는 이 조약에 따라 유로화를 단일 화폐로 도입한 유럽통화연합(EMU)이 탄생하면서 유럽 통합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1950년대 이후 유럽 통합의 역사는 통합 과정이 추상적인 이상이나 원칙의 실현보다는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적응의 형태로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실로 유럽 통합은 변화하는 정치, 경제, 전략적 상황에 대한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대응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당면한 재정위기가 유로존의 붕괴나 유로화의 종언을 초래할 것이라는 전망은 공감하기 어렵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치적 실용주의가 통합의 폭과 형태를 결정해왔다는 점에서 작금의 위기는 오히려 새로이 통합을 다지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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