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8

2010.05.24

디지털 시대 최고의 중개자

58년 개띠 기업리더 전성시대…치열한 경쟁 이겨낸 경험이 경쟁력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10-05-24 1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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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시대 최고의 중개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경험한 58년 개띠들은 자유분방함과 집요함으로 한국사회의 리더가 됐다. (왼쪽 사진부터)권오철, 박인식, 신동원, 박현주, 이영미, 표현명, 이미경.

    치열하게 살았다. 58년 개띠는 앞서나가진 못할지라도 최소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유신독재 끄트머리에 대학에 들어가 1980년대 광장에서 민주화를 외친 그들은 뜨거웠던 함성이 잦아들면서 그 열정만을 가슴에 간직한 채, 그들이 그토록 바꾸려고 했던 기성사회 속으로 들어갔다. 58년 개띠가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로 흩어져 자신의 영역에서 업을 쌓아온 지 어느덧 20년이 훌쩍 지났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던 58년 개띠가 이제는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중추세력이다. 이 중 일부는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어 말단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로 성장했는가 하면, 직접 회사를 차려 대한민국 경제를 받치는 중소기업 대표로 자리 잡았다.

    자유분방함과 치열함이 특징

    실제 국세청 조사 자료에도 이런 양상은 뚜렷이 나타난다. 국세청이 수입금액 100억 원(2008년 기준) 이상을 신고한 법인의 CEO 2만2203명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CEO 평균연령은 51.6세로 50대가 전체 CEO의 38.9%(8632명)를 차지해 명실상부 한국 경제의 주역임을 말해준다. 59년생 돼지띠가 1069명으로 가장 많았고 57년 닭띠가 1014명, 58년 개띠가 998명을 차지했다.

    삼성전자종합기술원 김기남 원장, 하이닉스반도체 권오철 대표이사, KT 개인고객부문 표현명 사장,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SK브로드밴드 박인식 사장 등이 대표적인 58년 개띠 CEO. CJ그룹 엔터테인먼트·미디어사업부 이미경 부회장, 농심 신동원 부회장처럼 기업 오너일가 중에서도 58년 개띠가 눈에 띈다. 이 밖에 CEO는 아니지만 대기업에서 상무, 이사 등 임원으로 CEO를 보필하며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이들 58년 개띠 기업리더는 스스로 돌이켜보건대 ‘개’라는 동물의 특성과 자신의 경영 스타일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중소기업 S사 강모 대표는 “개의 자유분방함과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 집요함이 58년 개띠 기업리더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58년 개띠들은 오만 가지에 관심을 갖지만 일단 어떤 분야에 집중하면 외골수 기질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모순된 듯한 이런 개띠의 특성이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집요함은 KT 개인고객부문 표현명 사장이 국내 최초 지능망서비스 오픈을 위해 며칠 밤을 새우며 시험한 경험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표현명 사장은 과거 KTF의 마케팅부문장으로 재직할 당시 ‘오렌지 드림팀’이라는 청년 아이디어 뱅크를 운영했다. 이동통신의 주력 사용자인 20, 30대의 문화코드를 이해하기 위해 젊은 사원들과 홍대클럽을 가고, 명동에서 타운워칭(Town Watching)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객들의 통찰력을 이해하고자 했던 집요함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더욱이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득권을 버리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이 마흔에 중학교 과학교사를 그만두고 주얼리 공부를 시작해 2007년 대통령 표창을 받을 만큼 적수공권 기업을 일궈낸 세미성 이영미 대표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리더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교사는 보람 있는 일이지만 제가 원하는 길은 아니었어요. 생활이 안정되면 원하는 삶을 찾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드디어 그때가 왔다고 판단해 교사를 그만두고 주얼리 디자이너가 됐지요.”

    가정보다 회사와 일에서 행복 찾아

    58년 개띠 기업리더들은 학창시절부터 사회생활을 하는 지금까지 스스로가 굉장히 활동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주변의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SK텔링크 사장을 비롯, 그룹의 중책을 맡아온 SK브로드밴드 박인식 사장에 대해 직원들은 58년 개띠 특유의 활동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SK브로드밴드의 한 직원은 “그냥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CEO가 아니라 회사 안을 돌아다니며 직원들과 소통하려고 한다. 일단 결정이 되면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물고 늘어지는 추진력이 강점”이라고 전했다.

    젊은 시절 민주화의 열망에 대한 시대적 고민은 58년 개띠 기업리더가 비즈니스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학우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며 다른 각도에서 국가의 미래를 고민했다. 표현명 사장은 “민주화 운동을 경험하면서 공학도로서 한국의 IT 성장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중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제가 졸업한 대학은 4학년 때 두 번 휴교를 할 만큼 민주화 운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학우들과 많은 토론과 논쟁을 하면서 국가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지요.”

    58년 개띠 기업리더들은 태어난 직후부터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온 경험 자체가 현재 기업을 이끌어가는 데 큰 경쟁력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그들은 같은 또래 수가 많고,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 속에서 치르며 대학에 들어갔다. 지금의 위치까지 가기 위해 약육강식의 기업세계에서 개처럼 일했고, 선택의 순간마다 특유의 끈질김으로 살아남았다. 강모 대표는 “평준화로 수평적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어느 세대보다 경쟁이 심한 탓에 자립심과 역경을 헤쳐가는 의지도 남달랐다”고 말한다.

    “오늘날 기업 환경은 너무나 치열합니다. CEO의 잘못된 판단으로 회사가 망하고, 수천수만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으며 그 가족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강한 자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한 자가 강한 자입니다. 저는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매일매일 깎아지른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밧줄 위를 걸어 다니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경쟁을 뚫고 생존해온 경험이 기업 경영에 큰 도움이 됩니다.”

    경쟁의 연속이다 보니 개인보다는 조직, 가정보다는 회사를 우선으로 여기며 살아온 경우가 대부분. 한화손해보험 보상지원실장 강성덕 상무는 “가정으로부터 외면 아닌 외면을 당하니 일에서 삶의 행복과 쾌락을 찾아야만 했다”며 씁쓸한 마음을 털어놨다.

    “가정을 일으켜 풍요로움을 확보하고,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 젊은 시절 목표였습니다. 그 성공을 쟁취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기업리더는 젊음을 불태웠던 시절 속 자신의 모습이 마치 공장의 부품 같았지만 그런 틀에 짜인 것마저 좋았다고 말한다.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획일적이고 유치하고 딱딱하지만 오늘날보다 훨씬 로망이 남아 있는 경쟁이었다는 것.

    좌절보다는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

    디지털 시대 최고의 중개자

    전하진 대표는 “산업화 세대와 디지털 세대를 이어주는 중개자로서 58년 개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58년 개띠는 선배 세대들처럼 가정을 뒤로한 채 회사에 충실하고,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살아왔지만 한국 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부(富)를 축적하지 못한 세대로 기록된다. 강성덕 상무는 “개는 주인을 지키고 보호하고 대신하다 생을 마감하는 희생형, 충신형 삶을 사는 동물”이라며 “결코 자신의 삶을 위하는 운명이 못 된다. 우리 58년생은 이와 같은 운명이라 생각한다”고 담담히 고백했다.

    1998년 초고속 인터넷망이 설치되고 불과 4년 만에 1000만 회선이 깔리면서 한국은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었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20, 30대에 비해 50대는 디지털에 무지하며 기껏해야 디지털 이민자 또는 이방인에 머문다.

    이는 기업리더들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벤처붐이 일어난 것은 1990년대 후반. 이때 IT벤처를 이끌고 오늘날 굴지의 IT기업을 선도한 이들은 40대 초반이다. 58년 개띠가 산업화 시대의 마지막 주자지만 다가온 디지털 시대의 첫차를 타는 데는 늦었다는 평가도 여기서 나온다. 그들은 산업화 시대의 막내로서 1980년 한국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과연 21세기 디지털 시대에서 나름의 몫을 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고민해야 할 문제다.

    “IT 세례를 받은 10, 20대와 지금의 50대는 DNA부터 다르다”는 한 58년 개띠 기업리더의 자조 섞인 말에서는 아날로그의 마지막 문을 닫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어설픈 진입자에 그쳤다는 아쉬움이 배어났다. 한미파슨스 전하진 e-jip 부문 대표는 “58년 개띠가 권위적인 가치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기에는 시대가 너무나 변했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제가 IT업계 1세대라 멘토를 자청해 20, 30대 젊은 기업가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한테 아이폰 사용법과 트위터를 배웠습니다. 비즈니스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과연 기존의 산업사회 주역이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산업화 세대와 디지털 세대를 이어줄 중개자로서 58년 개띠 기업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58년 개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하진 대표는 “디지털 세대가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싫든 좋든 더욱 적극적으로 젊은 세대가 꿈을 펼치게 해줘야 우리도 살고 그들도 삽니다. 그동안 우마차에 포르셰를 실어놓고 ‘속도는 30km가 최고야’라고 말해왔다면 이제 우마차에서 포르셰를 내려 100km, 200km 달리게 하는 것이 58년 개띠가 해야 할 일입니다.”

    58년 기업리더들은 달라진 시대에 좌절하기보다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나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표현명 사장은 삶의 모토인 ‘See Different Think Creative’를 들어 58년 개띠 기업리더의 나아갈 길을 설파했다.

    “오늘날도 젊은 시절 못지않게 치열한 경쟁과 극심한 변화가 되풀이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58년 기업리더들이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늘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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