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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개 같은 내 인생 58년 개띠②

“현실 팍팍 그래도 낭만 세대…후배들아, 세상 두려워 마라!”

58년 개띠와 82년 개띠의 ‘취중진담’

  • 정리=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현실 팍팍 그래도 낭만 세대…후배들아, 세상 두려워 마라!”

“현실 팍팍 그래도 낭만 세대…후배들아, 세상 두려워 마라!”

‘58년 개띠’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에 ‘82년 개띠’들은 흥분했다.

나(박훈상 기자)는 개띠다. 82년 3월 개띠로 태어났다. 그러나 개띠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지는 않는다. 누군가 몇 년생이냐고 물으면 ‘82년생’이라고 할 뿐 ‘개띠’를 강조한 적은 없다. 그러나 58년생은 다르다. 늘 개띠가 따라붙는다. 궁금했다. ‘58년 개띠’라는 고유명사는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58년 개띠들에게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1978년 MBC 대학가요제로 데뷔한 국민MC 임백천 씨, ‘58년 개띠’라는 안무를 직접 만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전미숙 교수, ‘글숨의 광합성’ ‘들어라 청년들아’ 등의 책을 낸 연대 국문과 정과리 교수,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출판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이 그들이다. 82년 개띠 ‘주간동아’ 이혜민 기자도 동참했다.

미군 구호물품 옥수수빵과 가루우유

이혜민 기자_58년 개띠들의 유년시절부터 들어볼까요.

임백천_아버지가 야반도주를 했는지 여섯 살 때 서울로 왔어요.(웃음) 교육 때문에 왔겠죠. 60년대 초에는 서울에도 잘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전미숙_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를 하면 꼭 전화 있는 집, 텔레비전 있는 집을 묻곤 했죠.

임백천_기 안 죽으려고 일부러 있다고 쓰는 아이도 있었어요. 전화가 처음 들어온 날을 아직 기억해요. 74-3190번. 빙빙 돌려서 쓰는 전화기였어요.

정과리_ 소득 100달러 시대였으니, 살림살이가 넉넉했겠어요? 텔레비전 있는 집에 놀러가 같이 보던 재미가 있었죠.

한기호_초등학교 때에는 옥수수빵이랑 우유도 있었어요. 가루에 물을 부으면 우유가 됐는데 미군 구호물품이었죠. 선생님 채점 도와드리면 빵을 주셨는데, 안 먹고 동생들 가져다주면 굉장히 좋아했어요. 학교에서 받은 우유를 할머니가 가마솥에 끓여 가족이 먹었다가 배탈 난 기억도 나네요.

임백천_잘사는 아이들은 도시락을 갖고 와서, 도시락을 못 싸와 옥수수빵을 먹는 아이들과 바꿔 먹기도 했어요. 당시는 연탄을 땔 때라 연탄 중독도 많았죠. 우리 삼형제를 아버지가 여러 번 업고 뛰셨어요. 추운 날 소변보러 나갔다 연탄 가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곤 했는데, 코를 팍 쏘는 연탄가스에 아찔하더라고요. 이런 걸 어머니는 매일 하시는데…. 어느 날 기말고사 앞두고 친구 5명이 모여 공부하다 잠이 들었는데, 연탄가스를 마신 탓에 모두 시험을 치르지 못했어요.

박훈상 기자_58년 개띠들은 바글바글한 콩나물시루 교실에서 공부했다고 들었는데, 놀 때는 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82년생들도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세대이긴 하지만, 집에서 게임기로 노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임백천_정말 격세지감이네요. 우리 때 남자아이들은 축구를 했어요. 비만 오면 엉망인 운동장에서 수십 개의 축구팀이 모여 공을 찼으니 생각해봐요, 얼마나 복잡했을지.(웃음) 골대는 각자 만든다 해도 그 많은 애가 한꺼번에 뛰는데…. 추운 겨울이 되면 너덜너덜한 공이 물먹고 꽁꽁 어는데, 그때 헤딩했다가 기절할 뻔했어요.(웃음) 한 반에 70명씩 오전반, 오후반으로 수업했어요. 담임선생님도 1년 내내 아이들 이름을 다 못 외웠을걸요.

한기호_저는 시골 출신이라 개구리 잡아서 뒷다리를 먹기도 하고, 몸통은 삶아서 돼지나 닭에게 줬어요.

정과리_우리는 고교평준화 1세대로 ‘뺑뺑이 세대’라고 불렀는데, 얽힌 사연도 많죠.

임백천_시험을 친다 해도 어차피 명문고 갈 실력이 안 되는 친구들이 뺑뺑이 때문에 못 갔다고 ‘뻥’을 쳤죠. ‘뺑뺑이’로 경기, 서울, 경복 등 명문고에 간 친구들은 몇 년 동안 후배 취급도 못 받았대요.

깻잎파와 독서클럽 … 자장면 한 그릇 추억

정과리_제 아내가 뺑뺑이 경기여고 세대인데, 뺑뺑이 세대를 ‘푸른 경기’라고 부르며 차별했대요. 하루는 아내 친구가 동창회에 가서 선배들이 푸른 경기 타령을 하기에 우리는 선배들을 ‘누런 경기’라고 부른다며 받아넘겼다더군요.(웃음) 이래저래 차별이 많았을 거예요.

이혜민 기자_고등학교 시절로 넘어갈까요? 58년생들이 주인공인 소설 ‘마이너리그’를 읽다 보니 빵집이나 중국집에 참 많이들 가던데요.

전미숙_저는 진명여고를 나왔는데 빵집도, 극장도 심지어 분식센터도 못 가게 했어요. 생활주임 선생님이 단속하려고 광화문을 돌아다니기도 했죠. 빵집에서 남학생 만나면 아휴….

임백천_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깻잎파’도 있지 않았나요?

전미숙_단정하게 가르마를 타야 하는데, 머리를 바가지 모양으로 자르고 앞머리를 깻잎처럼 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저는 심하게 똑바로 잘랐고요.(웃음) 독서클럽도 기억이 많이 나네요. 고등학생 때 남학생을 합법적으로 만날 유일한 기회였거든요. 진명여고랑 양정고가 자매학교여서 YMCA나 구세군회관에서 만나 함께 책을 읽고 토론도 했어요. 정 급하면 서둘러 요약본을 읽고 갔죠. 그때 저에게 관심 보이던 남학생이 따로 만나자고도 했는데,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인간 말종이구나’ 싶어 다시는 상대 안 했어요.(웃음)

한기호_초등학생 때 집에 있는 ‘이조 500년 야사’ ‘삼국지’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중학생 때는 사서 누나가 예뻐서 도서관에 자주 갔고요. 고등학생 때는 사서가 없어서 직접 도서반 반장 구실을 했어요. 도서관에 있던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를 봤죠. 베스트셀러를 분석하는 싹이 그때 텄나 봐요. 문화원에서 시화전을 열던 기억도 나네요.

임백천_저는 그때 음성으로 독서클럽을 했어요. 서울대에 다니던 선배를 바람막이로 두고 여학생과 교제했죠. 그때는 놀거리가 없으니 책을 참 많이 읽었어요. 뺑뺑이로 고등학교를 가게 돼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에 할 일이 없었거든요. 한 달 꼬박 단편문학전집을 읽었어요. 엄동설한에 이불 속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려 누워가며 책을 읽었죠. 남학생들끼리는 중국집에도 많이 갔어요.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에 배갈 마시고 담배 한 대씩 피우는 게 여흥이었죠. 자장면 누가 빨리 먹나 하는 무식한 내기도 했고요.

58년 개띠는 77학번 세대다. 1977년에 MBC 대학가요제가 시작됐다. 대학가요제가 화제에 오르자 일순간 활기가 돈다.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차에서 통기타를 꺼내온 임씨가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 “어두운 밤 구름 위에 저 달이 뜨면~”(김정호의 ‘저 별과 달을’)을 연거푸 부르자, 어느새 합창을 하면서 서먹하던 분위기는 싹 사라졌다. 58년 개띠의 낭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현실 팍팍 그래도 낭만 세대…후배들아, 세상 두려워 마라!”
임백천_ 정동 MBC 시절 대학가요제를 처음 할 때는 지나가던 대학생들을 끌어다 방청객을 채울 정도로 인지도가 없었어요. ‘나 어떡해’를 부른 ‘젊은 연인들’이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더니 가요제의 인기가 그야말로 오대양 육대주로 번졌죠. 그런데 대학가요제에 대학생다운 창작곡이 계속 나온 건 아니에요. 10회까지나 그랬을까. 그 뒤엔 가수가 되려고 나왔어요. 70년대 말 대학생들은 치열했지만 그만큼 로맨틱했죠. 대학생다웠어요.

정과리_하숙집에 일찍 들어가 대학가요제를 보던 기억이 나네요. 70년대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세례도 많이 받았어요. 제3공화국 독재정치 속에 자유가 억압됐지만 청년문화를 즐기기도 했죠. 80년대 문화가 민중가요, 국악, 걸개그림으로 대표된다면 70년대는 밥 딜런, 조앤 바에즈 등으로 대표되는 청년 히피문화가 있었어요. 일괄적인 평등보다 영혼의 자유를 더 추구한 셈이죠.

전미숙_저도 제자들에게 대학가요제로 데뷔한 심수봉 씨 이야기를 아직도 해요. 현대무용을 전공하니 늘 새로운 것이 필요한데, 국제적 감각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한국적인 것을 바탕에 깔죠. 트로트를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심씨가 부르면 기이할 정도로 독특하고 매력이 있었어요.

그때 심수봉과 영혼의 자유 추구

한기호_대학시절 심씨는 대단한 코드였어요. 80년 5월에도 심수봉 씨 노래를 개사해 불렀죠.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XX~ 학생과 민주인사 구속하면서~ 민주주의 매도하던 그때 그 XX~.” 거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박정희한테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린 거죠. 오늘이 5·18인데 그때 5월에 비가 많이 왔어요. 5·18 시위를 주도했다고 감옥에도 갔다 나왔어요.

임백천_ 박지만 씨와는 사회에서 만난 친구 사이예요. 제가 광화문에 살았으니 육영수 여사 상여 나가는 것도 보고, 박 전 대통령 장례도 봤죠. 저도 막연히 독재자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냥 알던 정치인 박정희와 친구 입으로 들은 아버지 박정희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지방에 다녀오면 사람들이 밥을 굶는다는 생각에 박 전 대통령이 수저를 못 들었대요. 박지만과 상관없이, 부정축재를 하지 않았단 점에서 평가를 후하게 주고 싶어요. 지만이한테는 농담처럼 스위스비밀은행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10%만 떼어달라고 말하는데, 자기도 그 번호 좀 알았으면 좋겠다고 해요.

한기호_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박정희는 컬러 TV를 먹을거리도 없는데 왜 하냐며 반대했어요.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건 국민에 대한 자기 생각이지, 전체 인간을 고려한 것은 아니에요. 박정희는 억눌렀죠. “유신헌법이 최상의 법이라 할지라도 발전적 비판이 허용된다”는 말을 해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는데, 그런 상황이 이해되나요?

정과리_제3공화국이 정신적으로 억압했으니 이른바 ‘박통’이 죽었을 때 통쾌하기도 했어요. 경제 일변도 드라이브 정책을 펴면서 그 밖의 것은 억압하다 보니, 지금껏 한국 사회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지나고 보니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었죠. 우리는 그때 양극화된다, 매판정권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성장을 위한 차관이 매판은 아니었고, 중산층을 키웠기에 한국이 남미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된 측면은 있어요.

전미숙_학교에는 늘 화염병, 최루탄이 있었지만 저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 억압된 분위기가 절로 몸에 배었던 것 같아요. ‘58년 개띠’라는 솔로 안무를 만들었는데 백스테이지에서 줄넘기를 계속 하고, 또 입을 벌리고 소리를 치려 하는데 소리는 안 나오고, 토하고 싶은데 참아야 하는 것들을 안무에 담은 이유도 우리 세대가 느끼는 억압 때문일 거예요. ‘개꿈 그리고 국화’라는 안무를 만든 뒤 소개 글에 ‘개 같은 인생 꿈만 꾸다 죽는다’고 쓴 적이 있는데, 평론가들이 그 무용에서 사회에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이 느껴졌다고 하더군요.

“현실 팍팍 그래도 낭만 세대…후배들아, 세상 두려워 마라!”
정과리_58년 개띠는 긍정적으로 사고하기 힘들어요. 4·19세대는 경무대까지 갔고 다음날 대통령 하야로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뭔지 모를 당당함이 있죠. 386세대도 대통령 직선제라는 변화를 이끌어냈고요. 그런데 우리는 데모하다 감옥에 갔다 와서 또 군대에 끌려가고 굉장히 고생했지만 정작 얻어낸 게 없어요. 제3공화국은 하면 된다를 내세웠지만 우리는 안 된다 생각하고, 해도 될까 망설였죠.

임백천_그래서 저는 ‘되면 한다’예요.(웃음)

한기호_저도 좌절감을 느꼈어요. 한 친구는 데모하다 감옥에 갔다 왔더니 믿었던 대들보가 감옥에 갔다며 큰형은 목을 맸고, 다른 친구는 감옥에 다녀온 뒤 정신병에 걸렸는데도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어요.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복학할 때 쓰라며 돈을 만들어 놓고 돌아가셨대요. 그런 거 보면 친구 중에 내가 가장 행복한 축에 속해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 보면 답 나올 것

58년 개띠들은 인생을 복기하며 좌절감을 토로했다.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대접받지 못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어른을 모시며 살았지만 자식들이 대접해주리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은 세대란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에 넥타이 부대로 활약했지만 공은 386이 가져갔고, 마흔 살이 돼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았을 때 외환위기가 닥쳤지만 뚝심 하나로 버티며 사회의 중추 노릇을 해온 그들이다. 그래서 이번엔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58년 개띠 선배들에게 취직하느라 진을 뺀 82년 개띠들을 위한 충고를 부탁했다.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한기호_딸 친구 5명이 모여 10년 뒤에 연봉 30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아무도 손을 못 들더래요. 한 친구가 ‘나 3000 가능하다’ 해서 알고 보니 ‘시급 3000원은 자신 있다’고 했다죠. 세상을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만 해도 책을 읽으며 자랐어요. 같이 학습하던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좌절하며 인간관계를 맺었죠. 서로 같이 읽고 경계를 넘나들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면 답이 나올 거예요.

전미숙_우리 세대 예술가는 테크닉이 좋지는 않았어요. 외국과 교류도 없었죠. 하지만 족적을 남긴 독창적인 몇몇 사람이 나왔어요. 요즘 아이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활발히 교류하지만 튀는 사람이 없어요. 많은 것을 빨리 받아들인 뒤에 뭔가를 또 빨리 만들어내니까 고민하질 않는 거예요. 반면에 우리는 좌절감 속에서 많은 고민을 했죠. 직업에 대해 고민해야겠지만, 자기 존재감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정과리_82년 개띠는 프로야구와 함께 태어나 비약적인 경제 성장 혜택을 누리다 보니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는 신념 하나는 뚜렷하지만, 뭔가를 해내겠다는 삶에 대한 전망은 없어요. 인생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람 있게 살았으면 해요. 제 딸도 82년 개띠예요. 집에서 빨리 독립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안 나가요. 스스로 살아보도록 노력했으면 해요.

임백천_ 나는 용천에서 개났어요.(웃음) 우리나라 사람들 김씨, 이씨 다 왕족이죠. 왕족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렇지만 두 세대만 올라가면 농부 자식 아닌 사람 없어요. 요즘에는 사람을 만나면서 조건 운운한다는데, 그렇게 재는 게 더 웃긴 거예요. 다 같은 농부의 자식이니까요. 그렇다고 너무 위축될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 패잔병 의식은 버리고 세계랑 당당히 겨뤄봐요.



주간동아 2010.05.24 738호 (p42~45)

정리=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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