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2

2010.04.20

“재미있게 같이 놀기, 길거리 공연도 좋죠”

가수 강산에 “내 음악이 위로가 된다면 더 바랄 것 없어”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10-04-14 16: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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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게 같이 놀기, 길거리 공연도 좋죠”
    8년 만이었다. 기자는 2002년 강산에(47·본명 강영걸)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에 인터뷰한 장소가 홍대 인근 연습실로 같았고, 인터뷰 섭외를 위해 연락한 소속사 대표도 같은 사람이었으며, 과거 인터뷰 때 강씨 옆에서 ‘추임새’를 넣던 당시 신인 인디밴드 ‘뜨거운 감자’의 김C도 이날 마침 같은 공간에서 공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인터뷰 전날 강씨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다듬은 것마저 같았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이 강씨만은 비켜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더 젊어진 모습이었다.

    국내 최초 트위터 게릴라 콘서트

    강씨는 2월 5일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서 국내 최초로 트위터(twitter)를 통한 게릴라 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공연 전날 ‘한 줄 블로그’라고 일컬어지는 트위터에 콘서트 시간과 장소를 공지했는데, 10분 만에 팔로어가 400명 가까이 늘었다. 그는 단 1원의 홍보비도 들이지 않고 자신의 공연에 관객을 끌어모았다. 젊은 신인 가수들도 생각하기 힘든 트위터 게릴라 콘서트를 어떻게 기획했는지를 묻자 강씨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았다”며 허허 웃었다.

    “사실 저는 완전히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에요. 그래도 ‘트위터가 뜬다’는 건 기사 등을 통해 알고 있었죠. 그런데 제 공연을 기획하는 분이 ‘트위터를 통해 홍보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저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에게 다가간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트위터를 통해 200여 명의 사람이 제 공연을 보러왔다는 게 정말 신기했어요.(웃음)”

    1992년 1집 ‘…라구요’로 데뷔한 강씨는 2집 ‘넌 할 수 있어’까지 빅히트하며 지금까지 정상의 록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데뷔 때부터 그는 ‘사회비판적 성향이 강한 가수’이자 ‘독특한 싱어송라이터’로 각광받았다.



    “데뷔 첫 무대에서 관객에게 ‘반말’을 한 덕에 알려지게 됐어요. 그때는 조용히 앉아 음악을 감상하는 게 관객 문화였거든요. 그런데 공연 중에 제가 관객에게 ‘일어나! 같이 놀자!’라고 외쳤고 그게 이슈가 됐어요. 노래 제목도 비슷한 경우죠. 당시 음반사에서는 ‘…라구요’를 ‘갈 수 없는 고향’, ‘훔쳐본 여자’를 ‘해바라기 같은 여자’ , ‘예럴랄라’를 ‘시골 여행’ 같은 식의 정직하면서도 재미없는 제목으로 바꾸길 원했어요. 하지만 당시로서는 독특했던 이 제목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죠. 지금은 저를 대표하는 노래들이 됐으니, 제목을 바꾸지 않길 정말 잘했어요.”

    이후 그는 2년마다 새 앨범을 발표하며 꾸준히 음악활동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방황도 많이 했다. 특히 1998년과 2000년에는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세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순박한 시골 촌부(村婦)였지만 누구보다 강했던 어머니, 자신의 모든 방황을 사랑으로 감싸준 일본인 아내 나비(본명은 다카시 미에코), 그리고 강산에 자신을 돌아봤다. 이후 7집 ‘강영걸’과 8집 ‘물수건’에는 서정적이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많이 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사회비판적이고 정치 성향이 강한 가수로 기억한다.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김해 봉하마을에 조문을 다녀왔고, 노 대통령 추모공연에 기꺼이 출연했으며, ‘인권콘서트’ 등 돈 안 되고 힘 안 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행사에도 꾸준히 참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씨는 자신은 전혀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재미있게 같이 놀기, 길거리 공연도 좋죠”

    사람을 위로하는 음악을 10년, 20년 후에도 만들고 싶다는 강산에 씨.

    기존 곡과 다른 싱글앨범 작업 중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개인적으로 아는 정치인도 없어요. 요즘엔 TV 뉴스를 종종 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뉴스조차 보지 않았죠. 예전에 모 대통령 후보의 측근이 ‘지지’ 선언을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단호하게 ‘못한다’고 했죠. 봉하마을에 다녀온 이유는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예의 때문이에요. 또 인권콘서트에 참석하는 게 정치적이라고 볼 순 없잖아요. 그저 삶에서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거죠. 저라는 개인이 추구하는 자유, 평화, 정의를 노래에 담고자 했을 뿐이에요. 물론 제 이야기가 가족, 사회, 국가로 연결되긴 하지만요.”

    4월 말이면 오랜 인연을 맺어온 현 소속사 ‘다음기획’과 이별한다. 오랫동안 입은 옷처럼 편한 데다 윤도현, 김C, 김제동 등 소속사 가족 모두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지는 사람들이지만, 강씨는 이젠 떠나야 할 때라고 느꼈다. 소속사에 안주해 더 발전하지 못했다는 자책도 있었고, 공연하고 싶을 때 언제든 무대에 올라 관객과 교류하고 싶은 작은 소망도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소속사 대표님이 ‘산에 씨는 히트곡이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하더군요. 저를 위한다고 한 말이었지만, 저는 지금도 곡을 만들고 있어요. 예전 것에 안주하고 싶진 않거든요. 또 소속사는 지금처럼 (윤)도현이나 김C, (김)제동이의 멘토 구실을 해주길 원하지만, 제가 소속사를 떠난다고 동생들과 멀어지는 건 아니에요. 그냥 독립해서 자유롭게 곡을 쓰고, 더 자유롭게 공연하고, 더더욱 자유롭게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강씨의 공연을 보고 싶다면 홍대 인근의 클럽을 찾으면 된다. 그는 방송이 아닌 클럽의 라이브 무대를 고집한다. 짜인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방송과 맞지 않기도 하지만, 클럽에서 활동하는 젊은 뮤지션들과 교류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크리에이티브, 즉 창조적인 홍대 문화가 오롯이 담긴 인디음악의 힘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한때 잘나갔던 가수라고 거들먹거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기타 하나 달랑 메고 작은 클럽, 또는 길거리에서라도 관객만 있으면 언제든 공연할 수 있어요. 꼭 주인공일 필요도 없죠. 젊은 뮤지션들이 주인공인 무대에서 게스트로 노래할 수도 있고요. 홍대 클럽에서 미친 듯 소리치고 열광하는 친구들은 사실 그들의 부모가 제 팬들의 연령대와 비슷해요.(웃음) 그래도 함께 놀고 즐길 수 있잖아요. 제가 그들에게서 얼마나 큰 에너지를 받는지 몰라요. 함께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할 뿐이에요.”

    그는 올해 중순 소속사 독립 후 첫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다. 과거처럼 정규앨범 형태가 아닌 4곡 정도 수록하는 싱글앨범이다. 현재 3곡은 완성했고, 1곡은 작업 중이다. 강씨는 “기존 곡들과 분위기가 다르다. 기대해달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2011년이면 데뷔한 지 20년이 된다. 나이도 어느덧 불혹을 넘어 ‘하늘의 이치를 안다’는 ‘지천명’의 50세를 바라본다. 강씨에게 음악이란 과연 무엇일까.

    “예전에 의사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그들이 저에겐 포기한 꿈이 있어서인지 무척 대단해 보였고 꽤나 부러웠죠(그는 1982년 경희대 한의예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돈이 없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분이 ‘산에 씨는 노래로 사람을 치유하잖아요’라고 말하더군요. 아, 그렇구나! 치유까지는 아니어도 저와 모든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 저에게 음악은 그런 의미예요.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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