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2

2010.04.20

사형제 폐지 호주 “주변국 동참하라”

222년 만에 고문과 사형 영구 폐지법 통과 … 한국 사형제 합헌 결정에 우려 섞인 시선

  • 시드니=윤필립 통신원 phillipsyd@hanmail.net

    입력2010-04-14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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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제 폐지 호주 “주변국 동참하라”

    호주 시드니 해변의 묘지. 이제 사형집행으로 이곳에 묻힐 사람은 없다.

    최근 호주 언론은 국제인권단체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가 3월 29일 발표한 ‘2009년 세계 각국의 사형 관련 보고서’를 크게 보도했다. 이 보고서는 2009년 한 해 동안 18개국에서 적어도 714명의 사형집행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56개국에서 2001명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보고서에는 중국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중국의 사형집행은 한 해 수천 건에 이른다고 알려져 중국 외의 국가들을 합친 수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앞선 3월 11일 호주 연방의회는 역사적인 법안 하나를 통과시켰다. 바로 2009년 발의된 ‘사형제도에 관한 형사법 개정안’이다. 이로써 1788년 호주 대륙에 백인이 정착한 지 222년 만에 호주 형법에서 사형제가 영구히 사라졌다. 법안 통과까지 상하 양원에서 거의 6개월 동안 토론을 진행했다. 특히 상원에서는 의원 전원이 발언하는 진기록도 남겼다.

    ‘죄수의 후예들’ 정신적 상처 해소

    호주가 6개의 식민지 국가였다가 110년 전 하나의 연방국가(Federation of States)로 거듭 출범했다는 사실을 아는 외국인은 거의 없다. 호주가 대륙 하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 또한 하나였을 것으로 지레짐작하기 때문. 하지만 호주의 정식 국가명칭인 ‘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 wealth of Australia)’에서 알 수 있듯, 호주는 독립성이 강한 6개 주가 수평적으로 연합해 하나의 국가 형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호주 국기엔 6개의 별(남십자성·The Southern Cross)이 그려졌다.

    이렇듯 6개 주가 서로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되다 보니, 사형제도를 채택하는 주와 그렇지 않은 주가 있었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사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있는 범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주 경계를 넘어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주는 1973년 사형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국제의정서에 서명했다. 아시아 국가 중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는 캄보디아(1989), 동티모르(1999), 필리핀(2006) 세 나라밖에 없다. 이 사실을 근거로 호주 인권단체들은 동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사형제도 폐지 캠페인을 벌여왔다. 한국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이번에 호주 연방의회에서 통과된 개정법안의 골자는 무엇이고, 1973년에 사형제를 폐지한 법안과는 어떻게 다른가. 결론부터 밝히면 두 법안의 차이는 사형제의 영구 폐지 여부다. 그동안엔 연방의회가 사형제를 공식 폐지했음에도 주 의회가 사형제도 폐지 발효 시점을 독자적으로 정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주 의회 권한을 없앤 것이다. 아울러 사형제를 영구히 채택할 수 없게 연방법으로 묶었다.

    법안 통과에 대한 호주 국민의 정서는 조금 다르다. 법안 통과 이튿날인 3월 12일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에서 사형제도 유지에 찬성한다는 답변이 70.95%로 나왔다. 이 수치는 사형제 폐지 찬성과 반대가 6대 4 정도로 갈리던 평소 여론조사 결과와 크게 다른 것으로, 법안 통과에 따른 반발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사형제 폐지 호주 “주변국 동참하라”

    1 호주 베리마 감옥 전경. 2 역사의 유물로 사라진 멜버른 감옥의 사형집행장. 3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재판을 받는 호주 청년 9명의 나날을 보도한 ‘데일리 텔레그래프’. 이 중 사형선고가 확실시되는 3명의 불안 심리는 극에 달했다고 전했다.

    호주법률가협회 글렌 퍼거슨 회장은 “연방의회가 고문과 사형제를 영구적으로 폐지시킨 쾌거를 축하한다”면서 “여기에 머물지 말고, 아직도 사형제를 존속하는 국가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또 “사형제가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혹시 해당 국가에서 범죄를 저지른 호주인이 사형당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자는 차원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퍼거슨 회장은 좀 더 구제적인 의견도 개진했는데, 바로 “호주인이 사형당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의 수사 협조를 거부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호주 경찰은 인도네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같은 국가에서 범죄를 저지른 호주인의 전과 기록을 요청하면 국제적인 수사 공조 차원에서 제한 없이 제공했다. 그 정보가 재판에 영향을 줘 사형선고를 받거나 집행된 사례도 왕왕 있다.

    해외에서 호주인 사형을 막아라!

    호주에서 마지막으로 교수형을 당한 죄수는 빅토리아 주의 로널드 라이언이다. 그는 1967년 2월 탈옥 과정에서 간수를 살해한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호주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사형당한 사람은 그가 아니다. 2005년 12월 싱가포르에서 마약 밀반입 혐의로 교수형을 당한 베트남계 호주 시민권자 뉴엔 투옹 반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25세로 초범이었던 그는 쌍둥이 동생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캄보디아에서 구입한 396g의 헤로인을 가지고 싱가포르 창이공항을 거쳐 멜버른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과정에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를 구명하고자 호주 총리까지 나섰지만 싱가포르 사법부는 엄벌주의 정책을 고수했다. 2005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존 하워드 당시 호주 총리가 싱가포르 총리에게 선처를 호소했지만 뉴엔의 사형은 집행됐다.

    3월 27일자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의 삶(Living in the shadow of death)’이라는 특집 기사를 통해 현재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재판을 받는 9명의 호주 청년(호주 언론은 ‘발리 나인’으로 부른다)의 피 말리는 나날을 보도했다. 특히 사형선고가 확실해 보이는 3명의 불안 심리가 극에 달했다고 덧붙였다. 이들 외에도 마이 콩 탄(46)이 베트남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를 포함한 3명의 베트남계 호주 시민권자가 언제 사형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호주 언론에 따르면 베트남에선 1년에 평균 200명 정도가 사형선고를 받고, 100건 이상이 집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법률가협회가 주변국가의 사형제도 폐지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형제 폐지 호주 “주변국 동참하라”

    호주판 ‘로빈 후드’ 네드 켈리의 교수형 집행 기록화.

    국제사면위원회 호주 지부는 “일본에서도 2008년 한 해에만 15건의 사형집행이 행해졌고, 현재 100명 이상이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라고 폭로하면서 “가족에게도 사형집행을 사전 통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은 하카마다 이와오의 경우 28년째 독방에서 수감 중”이라며 일본 사법제도의 잔혹성을 규탄했다. 호주 인권단체 ‘시민 자유를 위한 협의체(Council for Civil Liberate)’는 “한국은 사형제 폐지를 적극 검토하는 중이어서 국제 인권단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며 “한국이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하면 동아시아에서 네 번째 사형폐지 국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단체는 “만약 한국이 (사형제 폐지라는) 결단을 내리면, 현재 사형제 폐지를 검토하는 타이완 등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가를 떠나 생명권 침해 안 될 말”

    이렇듯 호주가 주변국에게 사형제 폐지를 권유하는 것은 자국민이 외국에 나가서 사형당하는 걸 막아보자는 뜻도 있지만, 본래 호주가 죄수 유형지였으며 자신들의 조상이 죄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정신적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형제 폐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캠페인을 벌여온 역사학자 돈 왓슨이 쓴 호주 역사책에는 다음과 같은 슬픈 이야기가 적혀 있다.

    “1788년 최초로 죄수들을 싣고 호주로 입국한 11척의 선박 중 하나였다. 그 배에는 101명의 여자 죄수가 타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인 사라 데이비스는 비단손수건 4장을 훔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7년으로 감형돼 호주로 유배됐다. 그녀의 동생 앤 데이비스도 비단스타킹 8개를 훔친 죄로 7년을 선고받아 같은 배를 타고 호주로 유배됐다. 그뿐 아니다. 가족을 위해 빵 한 덩어리 훔친 죄로 교수형이나 유배형을 받은 경우도 있다. 호주에서 최초로 사형을 당한 제임스 베렛도 그중 한 명이다. 호주 도착 이틀 후, 제임스 프리맨과 제임스 베렛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창고에서 음식을 훔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목에 밧줄을 걸 집행자가 없었다. 포상을 약속하면서 지원자를 모집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자 식민지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프리맨을 사면, 사형집행자로 임명했다. 프리맨이 제비뽑기에서 이겼던 것이다. 결국 베렛은 호주 도착 사흘 만에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로부터 222년. 프리맨과 베렛의 후예들이 사형제를 폐지했고, 국제사회를 향해 동참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8년 이후 사형집행이 없어 비공식 사형폐지국가로 집계된다. 하지만 아직도 법정 최고형으로 사형을 고수할 뿐 아니라 2월 25일에 헌법재판소가 사형제는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리자 호주 인권단체들은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최근 흉악범 근절을 위해 사형집행 재개를 검토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긴장하고 있다. 언뜻 내정간섭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호주 인권단체들의 의견은 다르다. 국가와 국경을 떠나, 존엄한 천부적 가치인 생명권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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