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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 설의 품격 01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명문 종가의 품격있는 설맞이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1 종손 오문환 씨가 조상께 술을 올리는 모습. 2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가의 설 차례상.

해주오씨 추탄공파 오윤겸 종가

술 한 잔, 안주 세 가지 무축단헌 고졸한 설 차례

한창 개발붐을 타고 있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본동마을, 이곳은 해주오씨 추탄공파 후손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조선 인조 때 청백리에 녹선된 영의정 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1559~1636) 종가가 마을 깊숙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뒷동산엔 선조들의 묘소가 있고 해주오씨 시조단과 추탄공 아버지 오희문이 쓴 임진왜란 때 일기 ‘쇄미록’도 보물로 지정돼 있다. 조선시대 정승, 우의정, 대제학을 지낸 조상이 수두룩하고 오세훈 서울시장도 이 집안이다.

서울과 인접한 곳이긴 하나 마을 들머리의 해묵은 은행나무에 앉은 까치가 목청을 돋우며 손님을 맞이하는 고요한 산골마을에서 560여 년간 해맞이를 해온 해주오씨 추탄 종가의 차례상과 오래된 설 이야기를 들었다.

560년 전부터 오씨들이 살아 오산리



“오산리는 해주오씨가 이곳에 살면서 생긴 지명입니다. 옛 종가는 보수가 어려울 만큼 허물어져 해체해버렸습니다. 대신 조상들의 묘역 가까운 이곳에 1991년도에 재실 유덕재(維德齋)를 짓고, 추탄 할아버지 신주를 모신 사당과 종가 건물 등을 앉혔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터를 잡은 건 대략 560년 전이라는 기록이 ‘경기도지’에 남아 있어요.”

종가에서 만난 12대손 오문환(吳文煥·47) 씨는 젊은 종손이다. 7세 때 큰할아버지 댁에 양자로 들어와 종손 수업을 철저히 받아서인지 보학(譜學)과 제례에도 조예가 깊다. 친화력 있는 인상으로 집안 어른들을 아우르며 문중 일을 도맡아 중심 구실을 하는 그의 명함에는 ‘추탄공 종손’이라 적혀 있어 종손 자리가 직업처럼 보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종가 일이라는 게 녹록하지 않아요. 경조사를 챙기고, 고문서를 정리해 문집을 발간하고 1년에 17여 회에 이르는 제례 모시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여기다 종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뿌리회’ 등의 모임에도 참석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종중 임야를 팔아 서울 청담동에 건물을 사뒀는데 다행히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문중 운영과 종가의 생활비를 충당해 살림살이는 유지하고 있다.

설을 3주 앞두고 “차례상을 미리 보여줄 수 없겠느냐”는 어려운 부탁을 했음에도 흔쾌히 들어준 종손은 이날 재실에 모신 오윤겸 선생 신주 앞에 설 차례상을 실제와 똑같이 준비해줬다. 노모 정인영(鄭寅永·83) 씨와 종부 임영민(林榮敏·43) 씨가 미리 준비한 설음식으로 차례상을 차려주었다.

“기제사와 설 차례상은 차별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날 새벽 자시(子時)에 모시는 기제사에는 과일을 일곱 가지 올립니다. 하지만 명절 차례에는 다섯 가지만 올리지요. 밥 대신 떡국을 올리고 술은 한 잔만 올립니다. 안주는 세 가지를 올리지요. 축문도 없습니다. 그래서 설 차례는 무축단헌(無祝單獻)이라 합니다. 저희 선조가 남긴 임진왜란 때의 일기 ‘쇄미록’에 ‘피난살이 중에 설을 만나 만두를 넣은 떡국 한 그릇과 탕 한 그릇에 술잔으로 다례(茶禮)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차례상은 형편에 따라 준비하면 될 것입니다.”

학덕이 매우 높거나 국가에 큰 공을 세워 시호(諡號)를 받았을 때 나라에서 영원히 제사를 모시도록 허락해준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의 주인공 추탄 선생 부부의 신주 앞에 제사상을 차리고 떡국 세 그릇과 술잔 세 개를 놓았다. 신주 오른쪽 시접에는 수저 세 벌을 놓는데 초취 부인 경주이씨와 재취 부인 덕수이씨도 함께 식사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줄엔 세 가지 탕을 놓고, 세 번째 줄에는 세 가지 전과 그 옆으로 육적, 계적, 어적을 올렸다. 넷째 줄에는 머리와 꼬리를 잘라낸 명태와 육포를 한 그릇에 담고, 나박김치와 식혜도 올렸다. 다섯째 줄엔 제주 왼쪽으로 밤, 배, 사과, 대추 약과를 올려 조율이시(棗栗梨)가 아니라 홍동백서(紅東白西)의 규범으로 제사상이 차렸다. 수저 그릇을 신주로부터 오른쪽에 놓은 건 율곡 이이의 ‘제의초’에 나타난 제례법이다. 설 차례는 아침 8시쯤 모시는데 지손댁보다 큰댁 어른이 먼저 드신다는 뜻이다.

넉넉한 덕담 문중화합 축제의 날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3 1991년에 지은 해주오씨 추탄공파 재실 유덕재.

이날 종중 회장 오영환(吳榮煥·80) 씨 등 10여 명의 문중 어른과 종손 누이들이 모인 종가의 세밑 풍경은 훈훈했다. 사당에 차린 떡국을 나눠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어린 시절 설날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 어렸을 적 설날은 축제였어요. 때때옷 갈아입고 차례를 모신 다음 세찬으로 떡국을 먹었지요.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친지들은 종가에 모여 장유유서로 세배를 나누었고, 집안의 화목과 한 해 소망을 연에 매달아 띄우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이 고을을 떠나지 못한 문중 어른이 60여 년 전 설 풍경을 꺼내놓자 종손 오문환 씨는 세배 때문에 민망했던 일을 떠올렸다.

“어릴 때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께 세배를 드리면 종손이라고 맞절을 하셔서 당황한 적도 있습니다. 어른들께서 오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말고는 절대로 세배하면 안 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오씨만 사는 마을에서 성이 다른 사람은 모두 아랫사람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소망 담은 연날리기, 제기차기, 자치기로 즐거웠던 어린 시절을 되새기자 종손의 누이들은 설빔을 입고 기운찬 널뛰기로 행복했던 추억에 얼굴이 상기된다. 각 집에서 쌀 한 되씩 가져와 한쪽에 쌓아두고 남자 대 여자, 혹은 종가를 중심으로 동가(東家) 대 서가(西家) 등으로 편을 갈라 윷판을 벌이면서 떠들썩하게 놀았던 기억도 즐겁다. 설에 발동이 걸리면 정월 한 달 내내 윷가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흥겨운 윷판은 소나무로 ‘달집’을 만들어 불을 붙인 뒤 춤추고 노는 ‘달불놀이’로 이어졌다. 이러한 놀이는 가족공동체의 따뜻한 정을 확인하고 어려운 세월을 헤쳐나가는 힘이 됐다. 그래서 그 시절의 설은 설다웠다. 이 산골마을도 개발 붐이 일어 오씨의 집성촌은 해체되고 겨우 여섯 집 정도 남았다.

“올해는 이곳에 유물관을 지어 흩어진 유물을 한곳에 모으고 종가 주변을 성역화해 누구라도 전통 생활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종중 회장의 새해 계획이다. 종중은 건물 임대수입으로 묘역 성역화 사업을 하고, 문중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매년 5월 어버이날에는 어른들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고 용돈을 드린다. 앞을 내다봤던 조상님 덕에 아무 쓸모없을 것 같았던 땅이 개발되면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겨 문중화합이 잘 이뤄지고 종가의 살림살이도 편안한 해주오씨 종가의 설 풍경은 넉넉한 덕담으로 상기돼 있었다.

손은 공손하게 맞잡아야 하며 손끝이 상대를 향하게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어른에게는 절대 절하지 않는다고 했다. 흔히 어른에게 “앉으세요” “절 받으세요”라고 입인사를 하나 이는 명령조이기 때문에 좋지 않고 대신 “인사드리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세배를 하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등의 말을 건네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고, 세배를 받은 이가 먼저 덕담을 들려주면 이에 화답하는 자세로 “건강하십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했다. 또 덕담은 희망적인 이야기가 좋으며 나쁜 일이나 부담스러워할 말은 굳이 꺼내지 않는 게 미덕이라 덧붙였다.

이날 명문 종가의 종손과 종부가 어렵게 시연해주는 절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두 분께 대단히 죄송한 생각이 들어 몸 둘 바를 몰랐다.

소소 이연자 씨는 한배달우리차문화원 원장으로 ‘이연자의 우리 차 우리 꽃’ ‘자연을 마시는 우리 차’ 등을 펴내 차 문화 보급에 앞장섰고, 한국의 명문 종가 120곳을 직접 취재해 쓴 ‘명문 종가 사람들’ 등이 있다.

조선 중기 사상가 사계 김장생의 ‘가례집람’

꿇어앉아 절하는 400년 전 여자절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사계 김장생이 지은 ‘가례집람’은 가례에 관한 설을 모은 책으로 1685년 조선조 숙종 11년에 간행했다. ‘가례집람도설’은 통과의례 때 입는 옷, 상차림, 규범 등을 그림으로 그려 알아보기 쉽게 정리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여자들의 절하는 방법이다. 400년 전에 이미 여자들도 무릎을 꿇고 절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꿇어앉아 절하는 건 일본 절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 배례 그림을 보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보듯 꿇어앉아 절하면 현대의 양장 차림에도 불편함이 없다. 한복을 입어야 절할 수 있고 온돌방이어야 절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도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변해가는 세월을 예측하고 그려놓은 듯 사계 선생의 배례도는 여자들의 절하는 자세에 대한 논란을 평정할 수 있는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절은 동작별로 나눠 절하기 전에 두 손을 맞잡아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차수도, 서서 간략하게 인사하는 읍례도, 절하는 동작을 그린 배례도로 설명했다. 여기서 큰절과 평절의 쓰임새도 자세하게 설명해뒀다.

절하기 전에 손을 맞잡는 차수도(叉修圖)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 깍지를 끼고, 여자는 오른손이 왼손 위로 올려 맞잡는다. 맞잡은 두 손은 남녀 모두 배꼽 부위에 올린다. 간단하게 공경을 표하는 방법을 알려준 지읍도(祗揖圖)에 따르면 인사할 상대의 나이에 따라 부모 연배가 되면 맞잡은 손을 눈높이로 올렸다 내리고 형님 정도면 공수한 손을 입 높이로 올렸다 내린다. 답례는 가슴 높이로 손을 올렸다 내리면 된다. 이것을 상·중·하례라 했다.

사계는 출입이 잦지 않았던 그 시대 여자들의 행동예절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현대 예절에서는 여자의 경우 두 손을 맞잡은 자세에서 허리를 약간 굽혔다 바로 하는 동작을 굴신례라 한다.

절하는 기본 동작 전배도(展拜圖)

남자의 큰절은 허리를 굽혀 맞잡은 손을 바닥에 놓는다. 왼발을 먼저 꿇고, 오른발을 꿇어 왼쪽과 나란히 하고 머리를 천천히 구부려 이마가 손등에 닿게 한다. 일어날 때는 오른발을 먼저 일으키고 맞잡은 손을 바닥에서 떼어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서 오른발을 세우고 일어난다. 일어나는 동작에서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일어서는 것은 사계 선생의 독창적인 방법이다. 절의 동작을 설명한 배례도(拜禮圖)에서는 계수, 돈수, 고두, 숙배, 흉례, 공수 등 여섯 가지 절을 소개하고 절의 쓰임새를 자세히 설명했다.

계수배(稽首拜)

남자의 큰절로 허리를 굽히고 이마가 손등에 닿게 하여 엎드려 한참 있다가 서서히 일어나는 절이다.

돈수배(頓首拜)

남자들의 평절로 허리를 굽혀 이마가 바닥에 놓인 손등에 닿자마자 일어나는 절이다.

고두배(叩頭拜)

손을 나눠 땅을 짚고 머리로 네 번 땅을 치듯 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절이다.

숙배(肅拜)

맞잡은 손을 이마에 대고 양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굽히며 머리가 땅에 닿지 않게 한다. 배례 중 가장 가벼운 것으로 군대에서 이런 숙배를 했다. 부인의 절에서도 이 숙배를 바른 절이라고 설명했다.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1 ‘회정대’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 2 새해 첫날 차 한 잔으로 조상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김해김씨 삼현파 진암공 김낙구 종가.

김해김씨 삼현파 진암공 김낙구 종가

200년 ‘3불차 집안’ 차 올리고 머리 조아린다

경남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343번지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 진암공(晉菴公) 김낙구(金洛龜·?~1874) 종가에서는 설과 추석은 물론 기제사와 가을 시제에도 차를 올려 제례를 모신다. 이 지역 기후조건이 차나무가 잘 자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비의 삶을 지향했던 선조들의 정신을 사철 푸른 차나무에 비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손 김평수(金平洙·78) 씨는 종가 서당 앞마당에 차나무를 심어놓고 이른 봄에 이 나무에서 찻잎을 따 정갈하게 차를 만들어 조상의 차례상에 올린다. 차가 오른 차례상에는 술안주인 적이나 전을 올리지 않아 핵가족 시대에 차례 모시기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종가 어귀에는 솟을대문 대신 회정대(晦亭臺)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이 우뚝하다. 회정은 종손의 조부 김희곤의 호다. 선대가 남긴 시를 후손의 명필로 바위에 새긴 시비도 정원 한쪽에 서 있어 종가를 에워싼 청정한 대나무, 소나무와 함께 정취를 자아낸다.

뒷산 문필봉(文筆峰)의 정기를 받아 대대로 학문을 숭상한 이 집안은 입향조(入鄕祖)로부터 양자를 들이지 않아 인불차(人不借)가 됐다. 남의 글을 빌리지 않아 문불차(文不借)였으며, 재물을 빌리지 않아 재불차(財不借)였던 이 집안은 7대 200여 년간 ‘3불차(三不借)’ 로 소문난 가문이다.

낡은 집을 허물고 다시 지은 산뜻한 한옥, 안채와 무이산정(武夷山亭)이란 당호가 걸린 세 칸짜리 고졸한 서당 한 채가 종가 건물의 전부다. 행랑채, 고방채, 안사랑채 등은 집을 다시 앉히면서 없앴다. 딸 셋, 아들 셋 모두 출가하고 맏아들 부부와 노종손 부부가 살고 있어 건물이 더 필요치 않기 때문이라 했다. 집은 조촐하나 서당 기둥마다 걸어둔 주련(柱聯)의 글씨가 종가 사람들의 비옥한 내면세계를 엿보게 한다.

키가 크고 눈빛이 선한 학자풍의 종손이 안내를 해주어 집 구경을 꼼꼼히 할 수 있었다. 서당 건물은 방이 두 개, 마루가 하나인데 방마다 선반을 매달아 선대가 남긴 문집을 간수하고 있었다. 종손은 새해에 조상의 문집을 후손이 읽기 쉽게 한글로 번역할 계획이라고 했다.

부모 이름 석 자도 한자로 제대로 쓰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서삼경에 통달한 종손 같은 분이 옛글을 번역해두지 않으면 책의 가치는 생명을 잃는다. 종손은 종가의 역사 보고인 족보를 가져와 선대의 벼슬과 문집 내용 등을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1년에 30번 제례 모시는 변하지 않는 전통

서당에서 가문의 내력을 듣는 동안 안채에서는 설 차례상을 준비했다. 종가에서는 헛제사상을 차리는 법이 아니라지만 때마침 비닐하우스에서 햇토마토를 수확했기 때문에 조상에게 천신(薦新)하는 형식으로 제상을 차렸다고 했다. 노(老)종부와 키가 무척 큰 차종손 상백(58) 씨, 며느리 진양강(55) 씨가 거실을 분주히 오가며 병풍 앞 낮은 상에 음식을 진설했다.

종가의 진설법은 홍동백서(紅東白西)였다. 동쪽에 붉은색 대추, 서쪽에 흰색의 밤과 배를 올렸다. 과일 축에 들지 않는 토마토가 오른 것이 이색적이었다. 조상이 내린 터에 토마토를 재배하기 때문에 첫 수확은 반드시 조상님께 올려서 고한다고 했다. 또 술잔 대신 찻잔을 올리는데 신주 앞 첫째 줄이 아니라 과줄 가운데에 올린 점이 눈길을 끌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잡수실 시루떡 두 그릇도 올렸다. 과줄에는 밤과 배, 감, 밀감, 산자, 곶감, 은행 등의 그릇이 놓였다. 제사상 차림은 의외로 단출했다. 과일과 떡, 한과와 포 정도였다. 제사 순서는 ‘주자가례’에 준한다고 했다.

종가 안채 거실은 북쪽에 미닫이문을 달아 한쪽 벽에는 조상의 신주와 사진을 모셔놓았다. 사당이 없을 경우 벽감(壁龕)을 만들어서라도 신주를 모시는 작은 종가의 법도를 지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종가에서는 기제사 여덟 번에 설·추석과 가을 시제까지 합하면 1년에 서른 번 넘게 제사를 지낸다. 이름난 종가에서도 ‘조상의 날’을 정해 한날에 제례를 모시는 이런 세상에 오롯이 전통을 고집하는 변하지 않는 종가였다.

김해김씨 시조 수로왕 차례부터 차를 올리다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3 무이산정이란 당호가 걸린 세 칸짜리 서당. 서당 기둥마다 걸어둔 주련의 글씨가 진암공 종가 사람들의 비옥한 내면을 보여준다.

“우리 가문에서 차례에 차를 올리는 건 시조 수로왕 때부터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661년 삼국을 통일한 법민왕이 왕명을 내려 수로왕의 아들 거등왕에서부터 9대손인 구형왕까지 신위를 모시고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 5월 단오와 8월 추석 때 술과 밥, 식혜, 과일, 떡, 차 등 여섯 가지 제물을 올리고 제례를 이어가도록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도 설 차례상에는 당시 음식을 올리고 있으니 차례상 음식역사만 1500년이 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는 없을 겁니다.”

수로왕릉이 있는 김해는 차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다. 특히 수로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시집올 때 차씨를 가져와 김해의 백월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조선불교통사’에 남아 있어 김해김씨 후손은 제사에 반드시 차를 올려야 한다는 게 종손의 사촌이자 시·서·화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추전 김화수(秋田 金禾洙·62) 씨의 주장이다.

김화수 씨는 제사에 차를 올리면 좋은 점 다섯 가지를 들어주었다. “첫째, 차는 어린아이도 마실 수 있으므로 어릴 때부터 음복 예절을 익히고 조상에 대한 의미를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둘째, 음복으로 어릴 때부터 차맛에 자연스레 길들여지면 방부제가 든 탄산음료보다 차를 찾게 될 것이므로, 청소년의 건강과 도덕심을 일깨울 수 있다. 셋째, 커피나 각종 음료의 수입을 줄여 외화 낭비를 막을 수 있다. 넷째, 차는 공해가 없어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 다섯째, 우리의 유구한 전통문화 중 가장 기층문화인 차문화와 차례의식은 ‘문화전쟁’ 시대에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거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차와 관련된 시장을 석권해 국익을 도모할 것”이라 했다.

무엇보다 가짓수 많은 차례음식 준비가 버거워 조상의 차례를 피하거나 차례상에 올릴 제수를 돈 주고 구입하는 신세대 주부들에게, 차와 다식 한 그릇만으로 차례를 모실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자체가 미풍양속을 이어가는 방편이 아닐까 싶다.

경주최씨 백불암 최흥원 종가

둥글게 썬 태양떡국 부부 맞절로 새해맞이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1 경주최씨 최흥원 종가에서는 설날 아침에 부부가 맞절을 한다. 새해에도 종가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로가 도와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대구 시내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둔산동 옻골마을, 경주최씨 백불암 최흥원(百佛庵 崔興遠·1705~1786) 종가의 설 풍경은 이색적이다. 조상의 차례상에 올리는 떡국을 둥글게 썰어 태양떡국이라 하고, 설날 이른 아침에 부부가 맞절로써 설맞이를 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고옥으로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종가에는 14대 종손 최진돈(崔晉惇·63) 씨와 종부 이동희(李東姬·61) 씨, 노모 김윤현(金尹鉉·86) 씨가 살고 있었다.

400여 년간 한 번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기적적으로 종손의 큰아들만으로 이어온 종가에는 ‘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가문만 생각하는 종부들의 삶이 있었다. 환갑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탄력 있는 피부를 가진 종부 이씨는 종가의 적통을 잇기 위해 마흔에 아들을 보았다. 딸만 내리 다섯을 낳은 뒤였다. 이제 네 딸은 모두 시집갔고 아들 기척(基拓·21) 씨는 군에 갔다.

400년간 양자 들이지 않은 기적

1년에 15여 차례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100명 넘는 손님이 찾아오고, 하루에도 수없이 접빈상을 차려내며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과를 보내는 종부들의 삶은 ‘나’라는 존재를 잊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어떤 힘이 저토록 고운 모습을 지닐 수 있게 했을까? 종부는 생각만 바꾸면 된다고 했다. 피할 수 없는 삶이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자부심을 가지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설에는 문중 어른들이 도포와 갓을 쓰고 종부에게 세배를 드려 수고했음을 고마워하고 항렬이 높은 집안 어른도 종부에게는 함부로 말을 낮추지 않아 인격적으로 예우를 하고 있었다.

종가 사람들은 설날 아침 6시쯤에 일어난다. 종손은 몸을 청결히 하고 도포와 갓을 쓰고 사당 참배를 한다. 이 사당 참배는 설날뿐 아니라 매일 종손이 하는 일이다. 참배 후 가족이 모여 안채에서 준비한 떡국을 먹고 나면 노모에게 먼저 세배를 올린다. 그 다음 부부가 맞절을 한다. 새해에도 종가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달라는 의미가 담겼다. 다음은 자녀들의 절을 받는다. 차례상 차림은 불천지위 양위분 두 쌍과 4대조 제례를 합치면 모두 여섯 상으로 재취 부인까지 합해 떡국 13그릇을 준비하고 술안주로 세 가지 적과 마른안주인 포를 올린다. 밤, 대추, 곶감, 사과 네 가지 과일과 강정, 약과, 식혜를 올린다. 이렇게 음식을 차려두면 작은댁에서 먼저 차례를 모신 뒤 종가에 오기 때문에 낮 12시가 넘어야 차례를 모실 수 있다고 했다.

태양떡국 만들기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던 예전과 달리 요즘 종부들은 일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이 댁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슨 때가 되면 문중 부인들이 자기 일처럼 거들기 때문이다. 우애 있는 문중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큼 친척들은 종가의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생각한다. 설에는 참석 인원만 100명이 넘는다. 떡국 준비도 만만찮겠구나 싶지만 종부는 걱정하는 기색이 없다. 불천지위 제사 때 찾아오는 200여 명의 손님도 예사롭게 치러내기 때문이다.

이 댁에선 조상에게 올릴 떡국거리만은 시대가 바뀌어도 방앗간에서 썰어오지 않는다. 가래떡을 둥근 태양 모양으로 썰어야 하는 종가의 풍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부의 손끝으로 빚은 정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떡국을 먹으면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 해를 닮은 가래떡 모양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도 설득력이 있다. 종부는 특히 가래떡을 둥글게 썰 수밖에 없었던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몇십 년 전만 해도 설이 다가오면 집에서 가래떡을 만들었다. 그러려면 쌀을 불렸다가 디딜방아에서 가루를 빻아 체로 쳐야 했는데 강추위에 체가 얼어붙어 화롯불에 녹여야 했고, 바람에 떡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병풍을 둘러쳐야 했다. 또 가래떡은 떡을 잘 쪄야 하므로 떡을 찔 동안 안방 아랫목에는 여자들이 앉지도 못했다. 조왕신이 노하지 않아야 떡이 잘 쪄진다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성 들여 찐 떡을 떡판에 놓고 기운 센 장정들이 떡메로 치면, 아낙들은 바가지에 물을 떠놓고 떡메에 발라줘 떡밥이 튀거나 눌어붙지 않게 했다. 그리고 다 친 떡은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서 둥글고 길게 만든 다음 하룻밤 정도 굳기를 기다렸다가 썰었다. 이렇게 손끝으로 만들다 보니 가래떡을 가늘게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굵은 가래떡을 돈짝처럼 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떡국 떡은 이렇게 최소한 사흘이 걸리는 손작업 끝에 만들어진다. 종부는 후손들의 정성이 담긴 귀한 음식으로 설 차례상에는 반드시 떡국을 올린다고 했다. 떡국 맛은 육수가 맛있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이 종부의 손맛에 무색해졌다. 이날 떡국을 맹물에 끓였는데도 국물이 매우 고소하고 담백했다. 떡국 떡도 쫄깃쫄깃해서 그 비결을 물었다.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2 노종부 김윤헌 할머니와 종부, 문중 부인들이 칼로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가래떡을 썰고 있다. 3 최흥원 종가에서는 차례상에 올리는 떡이 둥근 해를 닮았다고 해서 ‘태양떡국’이라 부른다. 4 영남지방 양반가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경주최씨 최흥원 종가의 모습.

맹물에 끓여낸 떡국 고소하고 담백

“어려웠던 시절에 무슨 고깃국물을 만들겠어요. 맹물에 끓인 떡국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들 했지요. 수백 명의 떡국을 끓이는데 언제 사골이나 멸치국물을 따로 만들겠어요.”

무쇠솥에 장작불을 지펴 펄펄 끓는 물에 불렸던 떡을 넣은 다음 불을 높여 빨리 끓여내야 떡국 떡이 쫄깃쫄깃하다고 했다. 여기다 국간장으로 간을 하는 게 전부. 손님상에는 다진 고기를 볶아 올리고 골패 모양으로 썰어둔 달걀지단과 부순 김도 올린다. 차례상에 올린 떡국은 다시 먹으려면 퍼져서 맛이 없는데 종가에서는 이 떡국을 여러 사람이 먹을 떡국에 함께 넣어 끓인다. 조상이 흠향했던 것을 음복하는 의미도 있고 불은 떡국을 처리하기에도 좋다는 지혜를 일러주었다.

파평윤씨 노종파 윤증 종가

제사에 떡 올리지 않고 양력으로 차례 지내다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1 윤증 종가의 단출한 설 차례상. 밤 대신 감자를 깎아 올린 것이 이색적이다.

파평윤씨 윤증 종가에서는 제사상에 떡을 올리지 않는다. 기제사와 설 차례도 양력으로 지낸다. 이곳은 조선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파평윤씨 노종파(魯宗派) 명재 윤증(明齋 尹拯·1629~1714)의 옛집이다.

윤증은 조선 숙종 때 학자로 소론의 영수(領袖)였다. 노론과의 치열한 당쟁으로 권력에 혐오를 느낀 그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만 힘쓴 선비였다. 이 댁의 제상이 이처럼 단출한 것은 후손에 대한 사랑과 선생의 가르침을 올바로 지켜나가는 후손들이 만들어낸 가풍 덕이다. 생활이 어려워 조상의 제상을 제대로 차리지 못할 후손을 위해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거리가 많은 화려한 유밀과며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또 제물을 장만할 때는 종이로 입을 봉하고 침이 튀지 않게 정성을 다하라는 유언도 남겼다. 천문학에 밝았던 그의 9대 후손은 제삿날을 양력으로 정했다. 그래서 설 차례도 양력으로 지낸다. 제사 모시는 시간도 한밤중이 아니라 저녁에 지낸다. 유서 깊은 대종가에서 이런 혁신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밤 대신 감자 올린 설 차례 상차림

종가에는 75년간 종가를 지킨 11대 종부 양창호(梁昌鎬·92) 씨를 모시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종손 대신 둘째아들 윤완식(尹完植·55) 씨가 산다. 노종부는 추운 날씨임에도 설 차례상 차림을 보여주었다. 대청에 놓인 가로 99cm, 세로 68cm의 제사상치고는 작아 보이는 상에 오른 차례 음식은 놀랍도록 단출했다. 부부를 함께 모시는 합설이다.

신주 앞 가운데에 수저를 담은 시접 그릇을 놓았고 떡국 두 그릇을 놓았다. 그 앞으로 술잔 두 개를 놓았다. 식혜도 건더기만 담고 그 위에 북어를 잘게 썰어 고명으로 올렸다. 그 옆으로 간장 한 종지, 간장 옆으로 나박김치 한 보시기를 놓았다. 마지막 줄에는 오른편에 머리와 꼬리를 자른 북어 두 마리를 엇갈리게 놓았고 그 위에 오징어 두 마리도 거두절미(去頭截尾)해 엇갈리게 올려 담았다. 그리고 과일은 대추, 밤, 곶감이 전부였다. 이날 밤이 준비되지 않아 대신 감자를 올렸는데 이 댁의 가풍에서는 꼭 무엇을 올려야 한다는 기준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감자도 종자이고 밤도 종자이므로 종가에서 직접 농사지은 것이면 된다고 했다. 얼마나 편리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제물 때문에 제사를 기피하는 지금 시대에 참으로 따르고 싶은 상차림이다. 이 정도 음식으로 차례상을 차린다면 누가 제사를 피할까 싶다.

노종부는 이렇게 간단한 제상 차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조상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우리 조상님들은 참으로 훌륭하셨어요.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으셨지요. 차례상뿐 아니라 조상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사도 상차림이 정말 간단해요. 제사 당일 준비해도 늦지 않아요.”

밥에 고기와 무를 넣어 끓인 국과 어적(魚炙), 계적(鷄炙), 육적(肉炙)을 올리는데 세 가지 적이 없으면 두 가지라도 형편껏 차리면 된다. 그리고 뿌리나물 도라지, 줄기나물 고사리, 잎나물 미나리의 세 가지 나물을 한 그릇에 담아 올리는데 모두 가문의 뿌리를 상징하는 뜻이 담겨 있다.

어탕, 육탕, 소탕도 의미가 있다. 바닷고기로 만든 어탕(魚湯), 네발짐승 고기로 끓인 육탕(肉湯), 무와 두부를 넣은 소탕(蔬湯)을 올리는 것은 자연이 내린 음식을 조상이 골고루 맛보시라는 뜻이다. 어포, 육포, 문어포를 한 그릇에 담고 나박김치, 간장, 새우젓, 식혜를 올리는데 식혜는 건더기만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육포를 잘라 고명으로 올린다. 과일은 밤, 대추, 감, 배, 사과 다섯 가지를 홀수로 올린다.

과일은 대추, 밤, 배, 곶감 순서로 놓는데 소론 집의 상징으로 조율이시(棗栗梨)라 했다. 그러나 음식 준비에는 한 치의 소홀함도 용납되지 않았다. 제삿날 사흘 전부터 고기를 먹지 않고 나쁜 말도 삼가고, 크게 떠들고 웃지도 않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조상을 모셔야 하기 때문.

조상의 위패는 절대로 제상에 올리면 안 되고 제사상 뒤쪽 교의(交椅)에 모셔야 한다. 종가에는 신주를 모시는 교의가 있다. 젓가락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똑똑 소리를 내는 것도 안 되고, 술잔을 향 위에서 빙빙 돌리는 것도 경망스러운 행동이라 안 된다.

명절 차례는 물색 옷을 입어도 되나 기제사에는 반드시 담담한 옥색을 입어야 한다. 남자는 옥색 도포를, 여자들은 옥색 치마저고리에 검은 족두리를 쓴다. 차례에는 여자들도 참석하는데 술은 올리지 않고 절만 네 번 한다. 남자가 두 번이니 음수인 여자는 네 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살아생전 볼 수 있었던 어른의 제사는 반드시 곡(哭)을 해야 사람의 도리를 하는 것이다. 평생 제사를 준비해온 노종부는 가히 제례 박사라는 칭호를 붙일 만했다.

설날 손님 상차림에 어울릴 ‘떡선’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2 아름다운 고가로 선정된 윤증 종가. 사랑채 앞에 있는 네모난 연못과 그 안에 작은 동산은 만들었다. 3 장독대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배부른 항아리들. 4 파평윤씨 윤증 종가의 노종부 양창호 씨가 설 차례상을 올리고 있다. 5 설 차례상에 반드시 오르는 윤증 종가의 장김치. 6 윤증 종가에서 새해 손님상에 자주 내는 요리 떡선.

전국 종가 음식 맛자랑에 출전해 1등을 한 떡선은 종가의 자랑이다. 1등의 비결은 간장 맛에 있단다. 만드는 법은 설날 가래떡을 뽑아 굳기를 기다렸다가 5cm 정도의 길이로 썬 다음 반으로 잘라 어슷하게 칼집을 넣어둔다. 그리고 곱게 간 쇠고기를 간을 해 볶고 석이버섯도 볶는다. 달걀 황백지단은 곱게 채 썰고 양념장을 준비한다. 이제 가래떡 칼집 사이사이에 쇠고기와 석이버섯, 달걀지단으로 소를 넣은 뒤 찜통에 살짝 쪄서 식기 전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되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설날 손님상을 화려하게 할 만한 요리다.

설 차례상에 반드시 오르는 장김치도 종가의 꿀간장 때문에 칼칼하고 시원하다. 이를 만들려면 무는 나박 썰기를 하고 배추 속대는 무 크기로 썬다. 배도 무 크기로 썰고 갓, 미나리는 씻어 다른 재료 크기로 썬다. 석이버섯은 불려서 가늘게 채 썰고 실고추, 마늘, 생강, 간장을 준비한다. 이렇게 재료 준비가 끝나면 미나리와 실파만 빼고 모든 재료는 항아리에 담고 간을 맞춰놓은 장국을 붓는다. 30분쯤 지나 미나리와 파를 넣고 하루 정도 익혀 먹는다.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종가

400년 전 세배 예절, 양반가 기품과 극진한 정성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설날 아침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와 새해 아침에 어른들께 드리는 세배는 구별해야 한다. 절하는 대상에 따라 평절을 올릴지 큰절을 올릴지 혼란스럽다. 여자의 경우 절할 때 무릎을 세워야 하는지, 옆으로 놓아야 하는지, 두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망설이게 된다.

400년 전에 이미 절하는 예법을 그림으로 정리해둔 예학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1548~1631) 종가를 찾아 세배 예절을 배웠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우리나라 18현 중 유일하게 예학자로 배향된 사계 선생의 종가는 충남 논산시 고정리에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은 열녀와 충신이 배출된 집안임을 상징했고 산 아래 사계의 묘소와 닿을 듯 지어진 종가는 재실 염수재와 사당, 살림집으로 구성돼 있다. 언뜻 보아서는 명성이 자자했던 예학자의 종택이라 하기에 의외로 소박하다 싶었지만, 솟을대문에 붙은 붉은 편액의 효자문이 예학을 지켜가는 가문임을 한눈에 보여줬다.

종가에는 13대 종부인 홍용기(洪容基·86) 씨가 막내아들과 함께 큰 집안을 덩그러니 지키고 있었다. 14대 종손인 김선원(金善元·64) 씨는 직장 때문에 논산에 살지만 일주일이 멀다 하고 찾아와 노모와 종가를 돌본다고 했다.

“아이구, 먼 길 오셨구먼” 하며 덥석 손을 잡고 방으로 들이는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어머니 마음 같아 가슴이 찡했다. 절로써 인사를 드리니 손을 바닥에 놓고 고개를 숙여 답배를 하셨다. 오랜 세월 힘든 종가 일을 도맡아 꾸리느라 골 깊은 주름이 잡혔지만 은비녀로 단아하게 쪽을 진 모습에 양반가 마님다운 기품이 서려 있었다. 무엇보다 연세가 높음에도 수백 년 집안 내력을 어제 일인 듯 거침없이 떠올리는 총기가 놀라웠다.

설 차례 준비는 언제부터 시작하는지를 묻자 그렇지 않아도 설 준비 때문에 걱정이 많다고 했다. 해마다 며느리와 함께 13그릇의 떡국을 올리는 다섯 상의 차례상을 차려냈는데 올해는 며느리가 몸이 아파 입원을 해 차례 준비가 막막하다고 했다. 돈을 주고서라도 사람을 구하려 했지만 명절이라 오는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설은 예전이 훨씬 좋았어요. 한 달 전부터 술을 담그고 조청과 엿을 고아 강정을 만들어 함지에 담아 서늘한 장방에 보관했지요. 감주와 수정과는 달여서 장독에 갈무리하고. 떡국 쌀은 한 가마를 담근다오. 명절날 떡국을 끓이지 못하는 이웃이 많았는데 우리 집에 일을 도와주고 가족 모두가 와서 떡국을 먹고 갔거든요. 80~90명분 떡국을 끓였지요. 설을 앞두고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 사골을 푹 고아 구수한 냄새가 마당 가득 했지요.”

노종부의 시름이 아니더라도 종가는 이제 서서히 석양으로 저물고 있다. 조상 모시는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여겼던 노종부들이 세상을 떠나면 제례는 ‘조상의 날’을 정해 하루에 몰아서 모시거나 도시의 아들집으로 옮겨가고, 고택은 대부분 빈집인 채 문을 닫으니 종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도 사라져가고 있다.

백지 병풍, 좌면지 간직한 ‘염수재’

예학자 가문의 상징인 재실 염수재(念修齋)를 들여다봤다. 제상 뒤를 가리는 백지 병풍과 제상에 깔아둔 좌면지(座面紙)가 눈길을 끈다. “제병(祭屛)은 백병(白屛)을 사용한다”는 옛글 그대로의 병풍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는 훗날 글을 모르는 후손을 위해 백병을 사용하게끔 한 선조들의 배려였다. 좋은 붓글씨를 구할 수 없어 병풍을 만들 수 없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병은 백지 병풍이 가장 좋다고 말해줄 자료로서도 훌륭했다.

제상 위에는 유기 제기들이 구릿빛을 발하고 있었다. 들기조차 무거운 사계 선생의 수저와 조금 가벼운 부인의 수저가 있고, 메 그릇도 사계 선생의 것은 키가 낮고 넓이가 넓은 대신 부인의 것은 봉분처럼 높으면서 둘레가 작아 남녀의 다른 모습을 상징했다. 술을 데워 올리도록 손잡이가 옆으로 달린 냄비 같은 주전자도 특별했다.

재실 한편에 세워둔 사람 키를 가릴 만한 종이 문짝은, 남녀의 구별이 엄격했던 예전에 여인들이 제실을 드나들면서 외간남자와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게 가리는 데 썼던 ‘내외문’이라는 노종부의 설명이 재미있었다. 염수재 앞마당은 돌을 열십자로 놓아 가운데 길은 제사를 지낼 때 제관이 다니도록 표시해뒀다. 제관이 아닌 사람이 지날 때는 머리와 허리를 약간 숙여 예를 표해야 한다. 제실 앞마당에는 마루 높이의 불돌이 있는데 전기가 없던 시절 제례 때 불돌 위에 화톳불을 피워 집 안을 밝혔다.

명문 종가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1 백지 병풍과 제상. 2 ‘사계전서’에 그려진 절하는 모습과 종부의 절하는 모습. ①공수법 ②큰절 ③평절 ④답배.

큰절과 평절 그리고 답배

노종부는 예학자의 종부답게 범절에 대해서는 소신이 뚜렷했다. 특히 현대의 인사법에 불만이 많았다.

“요즘 사람들은 친인척과 스쳐 지나는 남남의 구별이 없어요. 지나는 걸음으로 ‘안녕하세요’ 하며 꾸벅거리는 인사법은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인지 민망할 때가 많아요.”

친지를 만날 때는 절로 인사를 드려야 위아래의 분별이 있고 사람의 도리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수천 년을 지켜온 우리의 정중하고 아름다운 인사법은 어디로 가고 꾸벅 인사가 등장했는지 모르겠다며 대감님(할머니는 사계 선생을 꼭 대감님이라 불렀다)이 쓰신 예법 책에도 절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이를 설명해놓은 것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 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사계의 예서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종부의 절하는 모습이 무척 궁금했다. 어렵게 청을 드렸더니 흔쾌히 시연해주었다.

종부는 극진한 정성과 예를 다한 큰절과 부드럽고 단아한 평절, 자애로운 자태의 답배 등을 보여주었다. 노인의 절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고왔다. 마치 무용수가 춤을 추는 듯했다. ‘절도 많이 하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1년에 13번이나 제례를 지내면서 다져진 절이다.

“예전에는 시집와서 시어른께 아침저녁 문안도 절로 드렸지 입인사는 하지 않았어요. 어른이 외출해 들어오시면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라는 뜻을 담은 절을 하고, 남편의 생일이나 부인의 생일, 새해를 맞았을 때 또는 먼 길을 떠날 때도 부부가 맞절로 무사히 다녀오기를 빌었지요. 동기간에도 오랜만에 만나면 절로써 반가움을 표했고.”

사돈 간에는 부인들이 하녀를 잘 차려 입혀 보내 서로 새해 문안을 드렸는데 이를 ‘문안비(門安婢)’라고 했다. 세배는 보름 안에 드리면 되는데 절은 하는 법만 있는 게 아니라 받는 법도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슬플 때나 기쁠 때 먼저 절을 하고 말을 건네는 예의로운 나라라고 했다. 인품의 척도는 첫인사에서 느낄 수 있는 법이라며 노종부는 절하지 않는 지금의 세태에 일침을 놓았다.

덧붙여 세배를 할 때 남자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하며, 여자는 겉옷을 벗고 목도리도 벗어야 한다고 했다. 또 예전에는 부모님께 문외배라 하여 문 밖에서 절을 하기 때문에 평절을 했지만 지금은 거실이나 안방에서 부모님 앞에서 절하기 때문에 큰절을 해야 하며, 평교 간에는 평절을 해야 옳다고 했다. 자식 외의 사람에게 절을 받으면 반드시 허리를 굽혀 답배를 한다는 것도 일러주었다.



주간동아 2010.02.16 724호 (p92~102)

  • 이연자 teaco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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