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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교수의 5분 세계사

아이티 눈물과 ‘자유의 아이러니’

흑인 노예들이 독립 쟁취, 위대한 역사의 땅 … 독재와 빈곤의 질곡 이어져 탄식

  •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아이티 눈물과 ‘자유의 아이러니’

수도 포르토프랭스 지진 참사로 아이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진이나 쓰나미 등 자연의 대참화(大慘禍)를 겪은 나라가 한둘 아니지만 아이티는 유독 더 큰 안타까움과 연민을 자아낸다. 수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한 강진의 피해 규모도 그렇지만 지진 이후 사실상 국가 기능이 마비된 혼란 양상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연재해는 불가항력이지만 외국 군대와 국제사회의 도움 없이는 재난의 수습조차 어려운 상황이 참으로 딱하다. 시련과 고난이 끊이지 않는 아이티의 역사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이티는 1492년 인도항로를 찾아 대항해에 나선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에서 ‘발견’한 신대륙 가운데 하나다. 콜럼버스 일행이 에스파냐의 영토란 의미로 ‘히스파니올라’로 명명한 이 섬에는 원주민 타이노 족이 살고 있었다. 얼마 후 유럽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이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됐으며, 구대륙에서 유래한 새로운 질병에 희생됨으로써 멸종의 운명을 맞았다. 사라지는 원주민을 대신한 것은 16세기 초부터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와 금은(金銀) 등 귀금속 채굴에 동원된 흑인들이었다.

히스파니올라는 한동안 에스파냐의 독무대였으나 17세기부터는 프랑스인들의 정착지가 생겨나 점차 확대됐다. 17세기 말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협정을 통해 섬을 동서로 분할해 전체 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서부지역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프랑스인들이 ‘생 도맹그(Saint-Domingue)’라 불렀던 식민지가 오늘날 아이티의 영토다.

17세기 말 프랑스인 세운 ‘생 도맹그’가 오늘날 아이티

18세기 생 도맹그는 프랑스 제국의 가장 부유한 식민지가 됐다. 그 번영의 배경에는 번창하는 노예무역이 있었다. 1760~90년대까지 생 도맹그에는 콩고, 앙골라 등 서부 아프리카 지역 출신 흑인 노예가 매년 수만 명씩 지속적으로 공급됐다. 이들의 노동력은 사탕수수, 커피, 인디고 등을 재배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에 투입됐다. 생 도맹그의 플랜테이션 작물은 대서양 무역을 통해 유럽에 수출됐는데, 설탕과 커피의 경우 유럽 전체 소비량의 각각 40%와 60%를 차지했다. 그리하여 1780년대 생 도맹그의 경제적 비중은 프랑스 식민지 생산량의 3분의 2, 대외교역의 3분의 1에 이르렀다. 주요 항구마다 하역물품으로 가득 찬 생 도맹그는 카리브 열도(列島) ‘엔틸리스의 진주’로서 프랑스에는 자부심을 주었고 영국 등 경쟁국에는 시샘의 대상이 됐다.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거둬들이는 막대한 부를 통해 식민지 생 도맹그는 유럽 문명사회의 외양을 갖출 수 있었다. 신문, 대극장, 박물관, 식물원, 농업아카데미, 프리메이슨 살롱 등이 등장했고, 프랑스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세련된 예절과 문화가 전파됐다. 그럼에도 식민지로서 생 도맹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흑과 백, 혼혈의 피부색에 따라 주민들의 법적, 사회적 지위가 엄격히 구분된 신분제도가 식민지 사회 생 도맹그의 특징이었다.

식민지 상류층을 차지한 것은 백인이었다. 생 도맹그의 백인은 대농장주, 무역업자 등 부유한 상층과 농장 관리인, 중소 상인 등 중하층으로 계층이 분화됐지만, 모두 식민사회의 지배층으로서 흑인뿐 아니라 혼혈인에 대해서도 인종적 편견을 공유했다. 중간층은 유색인이었는데 물라토라고 불리는 흑백 혼혈인과 자유 신분의 흑인이 여기에 포함됐다. 혼혈 유색인은 신분적으로 자유인이었고, 농장이나 노예 등 재산도 소유할 수 있었다. 반면 백인과의 결혼은 허용되지 않았다. 또 공직과 일부 직업 활동이 제한됐으며 극장이나 식당 등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분리됐다. 따라서 이들은 백인에 대해 불만을 가졌지만 동시에 흑인을 경멸했다.

하층에는 흑인 노예가 있었다. 18세기 말 생 도맹그의 흑인 노예는 약 50만명에 달해 4만여 백인과 3만여 유색인을 압도했다. 식민지 노예로서 흑인의 삶은 매우 힘들고 고달팠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은 생 도맹그 도착 후 수년 내 3분의 1 정도가 질병으로 사망할 정도로 환경변화의 위험에 노출됐으며 농장에서 강도 높은 노동, 학대와 가혹행위까지 견뎌야 했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생 도맹그는 주민 대다수가 피부색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며 불만과 증오를 키우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1790년대 생 도맹그를 휩쓴 혁명의 소용돌이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혁명의 뇌관을 제공한 것은 식민지가 아닌 본국, 즉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건국 후 서른 번 넘는 쿠데타 … 지구상의 최빈국

본국 프랑스 대혁명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생 도맹그 주민 중 백인과 혼혈인이었다. 파리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백인은 자치와 자유무역 등 식민지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자 했고, 혼혈인은 인종차별의 철폐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1791년부터는 백인과 혼혈인의 움직임에 자극받은 흑인 노예들이 자유와 평등을 향한 투쟁에 나섰고, 이들의 투쟁은 1794년 본국으로부터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반동(1794년 7월27일 국민공회 내 온건파가 일으킨 쿠데타로 공포정치를 시행한 혁명정부를 무너뜨림으로써 프랑스혁명 과정이 보수화됐다)과 함께 프랑스 대혁명이 반전의 계기를 맞자 생 도맹그 혁명도 위기에 처했다. 생 도맹그의 백인과 유색인은 흑인해방을 무산시키려 했고, 영국과 스페인은 이런 혼란을 틈타 생 도맹그를 장악하고자 했다. 특히 쿠데타로 프랑스 대혁명에 종지부를 찍은 나폴레옹이 흑인 노예제를 부활하려 했고 식민지를 평정하기 위해 1801년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궁극적으로 독립만이 흑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던 생 도맹그의 ‘블랙 자코뱅’들은 저항의 길을 택했고, 황열병에 시달린 나폴레옹군을 물리치고 1804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이자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혁명을 통해 서반구 최초의 흑인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세계사적 업적을 성취한 생 도맹그 흑인들은 ‘산악의 땅’이란 의미로 오래전 원주민이 사용한 지명(地名) ‘아이티’를 신생국가의 국호로 정했다.

역사가들은 자유와 독립을 향해 1791년부터 1804년까지 지속됐던 생 도맹그 흑인 노예들의 투쟁을 ‘아이티 혁명’이라 부른다. 이 혁명이 역사가의 관심을 끄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선 혁명의 전개과정이 극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아이티 혁명에 주목하는 역사가 가운데는 이 혁명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영감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아이티 혁명은 흑인 노예들이 온갖 고난과 역경에도 불굴의 투지와 영웅적 투쟁으로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한 편의 거대한 로망스다.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는 이들은 흑인 노예의 해방에서 프랑스혁명 이념의 진정한 보편성이 구현됐다고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티 혁명사에는 로망스가 아니라 비극의 플롯을 적용할 수도 있다. 13년에 걸친 내전 및 외부와의 전쟁 기간 동안 피부색이 다른 주민 사이에 무자비한 살육과 린치, 테러가 횡행했으며, 혁명세력 간에는 분열과 암투, 변절과 배신이 잇달았다. 혁명의 어두운 그림자는 이후에도 짙게 드리웠다. 혁명을 통해 표출된 인종적 반감과 증오는 새 국가 건설 이후에도 백인과 혼혈인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으며,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한 독립의 영웅들은 독립 이후 등장한 독재자들의 우상이 됐다. 혁명의 이념을 좇아 시행한 대농장 해체와 분할은 호구지책에 급급한 빈농을 양산했다.

1804년 건국 이후 서른 번이 넘는 쿠데타를 통해 독재와 혼란을 오가며 오늘날 지구상 최빈국의 하나로 전락한 아이티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유 없이 빵만으로 인간답게 살 수 없지만 빵을 대가로 얻은 자유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노예제의 질곡을 타파한 아이티 혁명이 독재와 빈곤의 질곡으로 이어진 사실은 ‘자유의 아이러니’를 말해준다.



주간동아 2010.02.09 723호 (p70~71)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ahnbj@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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