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7

2009.12.29

야구선수들이 산에 오르는 까닭

KIA 최희섭이 등산 열풍 주도 … ‘마음의 毒’ 제거, 새 출발 위한 몸부림

  • 윤승옥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 touch@sportsseoul.com

    입력2009-12-23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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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선수들이 산에 오르는 까닭

    산에 오르는 야구 스타들. 왼쪽부터 최희섭, 서재응, 이범호, 이승엽.

    올해 600만명에 육박하는 관중을 동원하며 가장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던 ‘2009 프로야구’가 스토브 리그(stove league)에 진입해서는 ‘산’으로 수렴되는 인상이다. 너도나도 산을 외치며, 산과 함께하기를 바란다.

    사실 산은 직업 운동선수에게 그다지 좋은 파트너는 아니다. 종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운동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근지구력보다 근순발력이다. 등산은 근지구력을 키우기 위한 측면이 크고, 특히 겨울 산행은 부상 위험도 있다. 트레이닝 관점에서는 꼭 좋은 운동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프로야구 스타플레이어들은 올겨울 ‘이상 현상’이라고 할 만큼 다들 등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연말 등산 열기는 KIA 최희섭이 주도하고 있다. 올 시즌 보란 듯 부활한 전직 메이저리거 최희섭은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산부터 찾았다. “산에 가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외치고 싶다”는 말을 남긴 후,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리고 비시즌 내내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비가 오던 12월 초 어느 날에는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된 후배 나지완을 끌고 도봉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가 비시즌에 올랐다는 산은 무등산, 도봉산, 아차산, 설악산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젠 중독이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

    지난 12월11일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그는 “모두들 가족, 코칭스태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만, 나는 전국의 모든 산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해 행사장을 뒤집어놓았다. 그러고는 “바닥까지 떨어진 뒤 이런 상을 받게 돼 감격스럽다. 산에 가서 술 한잔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그의 입술은 부르르 떨렸다. 웃던 이들도 그의 진지함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반전 노리는 이승엽, 서재응도 동참



    최희섭에게 산은 ‘부활의 코드’였다. 산에서 스트레스를 다스리고 몸을 만들고, 산에게 부활을 기원하며 매달렸다. 산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내친김에 내년 시즌을 마친 뒤에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오르겠다고 선언했다. 12월14일 구단과의 연봉협상에서 구단이 제시한 액수에 실망한 그가 곧바로 지리산을 찾은 건,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산은 그를 현실과 격리시키는 공간이자, 그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공간이다. 그는 산에서 답을 찾을 것이다.

    최희섭과 산은 하나의 성공 콘셉트가 돼 뻗어나갔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의 이승엽도 그의 ‘전도’를 받아 산에 주목하고 있다. 올해 그는 무척 부진했다. 일본 무대 전성기인 2006년으로의 복귀를 간절히 외쳤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마치 지난해의 최희섭처럼 무너졌다. 지난 11월 일본 나가사키에서 열린 한일클럽챔피언십을 마친 뒤 최희섭과 저녁식사를 한 이승엽은 최희섭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여 동반 산행을 약속했다. “최희섭이 얼마나 산에 빠졌는지, 2시간쯤 계속된 식사시간 중 1시간30분 동안 산 얘기만 했다. 올해 성적 부진으로 스트레스가 엄청났던 나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같이 산에 오르기로 했다”고 했다. 최희섭처럼 산을 부활의 코드로 설정했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KIA 서재응도 이승엽처럼 ‘최희섭 따라하기’에 동참하려는 분위기다. 얼마 전 최희섭에게 “산에 갈 일 있으면 같이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도 올해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역시 산을 통한 반전을 노리고 있다. 더 이상 추락할 데가 없는 그다.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에 진출한 이범호도 소속팀 훈련 참가에 앞서 산에 오르고 있다. 고향 대구의 팔공산에 올라 마인드 컨트롤과 근력 훈련을 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앞둔 그는 산에 의지하며 힘을 얻는다.

    이범호의 전 소속팀인 한화는 올 시즌 단체로 등산에 나섰다. 마무리 훈련지인 나가사키로 떠나기 직전까지 한대화 감독의 주도로 매일 대전 보문산에 올랐다. 선수들은 전에 없던 등산에 “입에서 단내가 난다”며 혀를 내둘렀다. 한화는 올해 꼴찌. 단내로 그 후유증을 털어내려는 듯 다들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FA 장성호도 원 소속팀 KIA 등과의 협상이 꼬이자 산을 자주 찾았다. “오래전 점을 봤는데 산과 친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인지 프로에 데뷔한 뒤 잘해야 1년에 한 번 산을 탔다. 그런데 FA 협상 한 달간 무등산을 열 번도 넘게 탔다. 10년치를 한 달 만에 해치웠다”고 말했다. 그는 산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했다. 직장을 찾지 못해 애달파하던 그는 산행 뒤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물론 유일한 생존 밑천인 몸도 많이 튼튼해졌다.

    스타 선수들 심리적 고통치료의 특효약

    트레이닝 전문가들은 등산의 장단점을 뚜렷이 나눠 설명한다. 등산의 장점은 근지구력 강화, 신체 밸런스 확보, 심폐기능 강화, 체중조절 등이다. 지구력은 확보되는데 순발력을 기르는 데는 그다지 기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체 근력 강화와 관련해서도 기회비용 측면까지 포함하면 웨이트 트레이닝이 낫다고 말한다. 자칫 산행 중 부상을 입으면 1년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거친 코스를 자주 오르면 연골 등에 무리를 준다. 직업 운동선수는 한 시즌을 치르면서 각종 관절에 무리가 간 상태라, 조그마한 충격도 큰 병이 될 수 있다. 산행에 대해서 트레이너들은 ‘야구선수는 하면 좋다’는 정도지만, ‘축구선수는 해서는 안 될 운동’으로 본다. 축구선수가 산행으로 하체가 굵어지면 당장 순발력이 떨어진다는 논리.

    스타급 야구선수들이 산을 찾는 건, 위의 사례를 통해 짐작되듯 대부분 심리적인 치료를 위해서다. 살아남는 데 사활을 거는 무명 선수들도 괴롭지만, 정상에 외로이 서서 부침을 겪는 스타 선수들의 심리적 고통도 여간 큰 게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지독한 삶의 현장을 잠시 떠나, 마음에 쌓인 독을 빼기 위해 산을 찾는 것. 야구는 멘털 스포츠다. 마음이 공을 던지고, 마음이 공을 치는 종목이다. 올겨울 산행, 그래서 그것은 2010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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