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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의 It-Week | 서른 번째 쇼핑

예술 1ml의 가격

  • 김민경 holden@donga.com

예술 1ml의 가격

예술 1ml의 가격

론 아라드가 만든 겐조 향수병입니다. 론 아라드는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겸 디자이너 중 한 명이죠. 아래 사진은 천재 사진가 랜킨이 매캘란과 협업한 1000병의 싱글몰트 위스키 라벨 중 하나입니다. 모델은 랜킨의 ‘여친’이자 모델인 카일리입니다. 한국 남성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네요.

“예술가와 협업이요? 또요? 좋은 일이네요. 그런데 컬래버레이션이 너무 흔해서….”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는 홍보 담당자의 말에, 가끔 이렇게 무식(?)한 대답을 합니다. 아니, 이런 일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쇼핑 애호가들과 수다를 떨 땐 속마음이 드러나죠.

“제발 예술 좀 그만 했으면 좋겠어. 가격만 올라가잖아.”

예술과 기업의 컬래버레이션은, 기업이 예술가들을 후원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을 때가 아니라, 대량생산되는 물건의 품질이 비슷해져서 ‘메이드 인 차이나’도 그럭저럭 쓸 만해졌을 무렵에 시작됐습니다. 장인적 전통과 공장을 M·A해서 떼돈을 번 다국적 ‘명품’ 기업들은 모조품을 방지하고 높은 부가가치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사라지는 장인들 대신 예술가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예를 들어 루이비통 ‘모노그램’(L자와 V자를 겹쳐 쓴 패턴) 가방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모조품이 생산되는데요, 루이비통은 여기에 스티븐 스프라우스라는 뉴욕 작가의 ‘그래피티’(손으로 브랜드 이름을 쓴 것)와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더해 놀라운 매출 신장을 달성합니다. 가짜 그래피티와 일러스트는 조잡해서 짝퉁 티가 나므로, 루이비통은 모조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낸 셈이죠. 여기에 ‘개성’에 목마른 소비자들은 아낌없이 돈을 지불했습니다. 당시 저도 혼자 이런 말을 했죠.

“ ‘복제의 예술’ ‘경계 없는 예술’의 시대라잖아. 에디션을 수백 개씩 만드는 미술품과 1000개 리미티드 에디션 상품 사이의 차이가 뭐지? 미술작품은 비싸도 되고, 비싼 가방은 지탄받아 마땅한 이유를 누가 내게 좀 알려줬으면!”



루이비통의 대성공에 감흥을 받은 기업들은 세계 최고의 예술가를 확보하느라 고생깨나 했습니다. 이후 상품을 소재로 한 전시가 갤러리를 채웠고, 예술가의 작품을 제품에 인쇄한 컬래버레이션은 홍수를 이뤘습니다. 여러분도 ‘꽃가라’(꽃무늬보다 더 실감납니다) 전자제품 하나쯤 구입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술가의 컬래버레이션은 2007~2008년 절정을 이뤄, 모델이 옷을 입은 뒤 잭슨 폴록처럼 페인트통을 집어던져 물감을 뿌려댄 듯한 옷들이 런웨이에 선을 보였죠.

예술 1ml의 가격
주춤했던 컬래버레이션이 그 사이 진화를 거듭한 듯 ‘신상’ 중에 눈에 띄는(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것들이 있더군요. 20세기의 3대 디자이너이자 건축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론 아라드와 향수 겐조의 컬래버레이션도 그중 하나입니다. 여성을 위해 ‘정의되지 않는 향’을 만든 겐조에 맞춰 론 아라드가 ‘세워지지도 않고,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대담한 보틀’을 만들었는데,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론 아라드의 회고전 ‘No Discipline’에서 공개됐습니다. 향수병답지 않게 금속으로 제작된 오브제는 한눈에 론 아라드스럽습니다. 뉴욕과 파리 각 1000개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였는데 내용물만 따지면 1ml에 8200원꼴이네요.

또 다른 컬래버레이션은 사진작가 랜킨과 싱글몰트 위스키 매캘란의 리미티드 에디션입니다. 랜킨은 케이트 모스에서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다양한 인물을 촬영했고 영국 젊은이들의 영혼을 보여주는 잡지 ‘Dazed · Confused’를 창간한 천재입니다.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인 모델 카일리를 1000장의 누드로 촬영해, 1000개의 위스키병에 라벨로 썼습니다. 촬영 장소가 매캘란의 증류소였고요. 술과 벗은 여인네의 사진은 곧 ‘술집에 걸린 달력’으로서 한물간 유행인 줄 알았거늘, 이건 또 무슨 복고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출렁이는 호박색 위스키 앞에 놓인 모델 카일리의 깊숙한 눈빛을 어떤 남자가 거부할까 싶더군요. 소줏집에 효리 사진이 아직도 걸려 있는 건 효과가 검증됐다는 얘기겠지요. 랜킨의 위스키는 1ml에 2857원입니다. 아닌가요? 가방 값에 예술작품 값을 지불하듯, 룸살롱에서 뿌릴 팁 대신 카일리와 단 둘이서 마시는 비용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가요?



주간동아 2009.04.28 683호 (p75~75)

김민경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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