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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北 미사일? 계속 쏩니다 美·日에 ‘까불지 말라’는 거죠”

‘로버트 김 사건’ 주역 백동일 씨 … 사건 후 비행기도 못 타는 신세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北 미사일? 계속 쏩니다 美·日에 ‘까불지 말라’는 거죠”

“北 미사일? 계속 쏩니다 美·日에 ‘까불지 말라’는 거죠”

8월11~15일 해군첩보부대 출신 대북공작부대원들과 울진~독도 간 220km 수영횡단 계획(해룡계획)을 설명하는 백동일 예비역 대령. 그는 요즘 이 행사 추진위원장을 맡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두툼했다. 사관학교 시절까지 포함해 32년간 군생활, 그리고 대북 특수공작원 양성 등을 주도한 국군정보사 여단장까지 지낸 그의 손은 ‘맨주먹’으로 살아왔다는 삶을 조용히 알려줬다.

백동일(60·사진) 예비역 해군 대령. 13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로버트 김 사건’으로 ‘해군 중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두툼한 그의 손은 요즘 첩보 보고서 대신 투자계획서를 만지고 있다.

“3년 전 지인의 소개로 외국계 투자회사 감사로 일하고 있어요. 9월이면 임기가 끝나 이 일도 그만입니다.”

그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는 로버트 김 사건은 미국 해군정보국(ONI) 소속 컴퓨터 전문 문관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이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 백 대령에게 비밀 문건을 건네주다가 1996년 9월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돼 9년형과 보호관찰 3년을 언도받은 사건. 백 대령은 사실상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이 돼 귀국해야 했다. 그나마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뭐, 옛날이야기죠. 김 선생(그는 로버트 김을 이렇게 불렀다)에게 좋은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것, 그게 제 남은 인생 할 일입니다.”



옛날이야기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듯했다. 2시간여 동안 주먹을 쥐락펴락하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면서, 때론 손수건을 목 뒤로 가져가 흐르는 땀을 닦아내면서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사건이 있은 뒤 한국에 들어왔어요. 군 기무사 조사관이 ‘로버트 김에게 얼마를 줬느냐, 어떻게 회유했느냐’고 캐묻더군요. ‘만일 (나의 치부가) 필요하다면 다섯 번 만나 1만 달러를 줬다고 보고하라’고 말했어요. 그분(로버트 김)은 돈을 받고 정보를 건네는 분이 아닙니다. 딱 한 번 ‘대구 뽈때기탕’ 한 그릇 사드린 것밖에 없어요.”

1994년부터 2년간 대북 등 군 관련 첩보만 1300여 건을 입수한 그는 한국 최고의 무관이었다. 당시 FBI와 미군 보안사령부(NSC) 등 외사방첩기관은 사방팔방 쏘다니며 첩보를 수집하는 그를 ‘Inquisitive Officer(꼬치꼬치 캐묻는 장교)’라고 부를 정도였다.

스파이 사건 이후 美 비자 거절

그러나 실패한 스파이의 ‘사건 그 후’는 ‘묵음(Mute)’이다. 백 대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은 기무사 조사가 끝날 즈음 합동참모본부로 ‘레터’를 보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백 대령을 진급시키지 말 것, 그리고 주한미군과 만날 수 있는 보직을 맡기지 말 것.

이후 그는 ‘조용히’ 첩보부대장을 지내다 2001년 32년간의 군생활을 접었다. 그리고 13년째 미국행 꿈도 접은 상태다.

“아들 둘이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고, 큰아들은 현지에서 결혼했어요. 올해 둘째가 학교를 졸업하는데 갈 수가 있어야죠. 미국 비자 발급이 안 되니….”

얼마 전까지는 미국 교통안전국(TSA)이 그를 ‘주요 경계대상 인물’로 등재해놓아 국내외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공항관리(경찰, 국가정보원 파견자)의 허락을 받아야 탑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사관 등에 이유를 물어봐도 ‘답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탄원서도 많이 냈죠. 올해는 비자가 나와야 할 텐데. 김 선생도 한 번 만나고….”

이야기는 또 ‘김 선생’으로 향했다.

“1995년 11월28일 한미 해군정보교류회의에서 처음 만났어요. 당시 로버트 김은 통역 겸 안내장교로 참석했죠. ‘북한 상황(정보)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 북한 동향에 대해 비밀이 아닌 것은 셰어(share)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남한이 대치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악하냐. 적극 돕겠다’고 대답했어요. 속으로 만세를 불렀죠.”

그가 미국 워싱턴DC에 있었던 1994~96년은 한미 간 외교마찰이 심하던 때다. 1차 북핵 위기, 북미 제네바합의, 북한 경수로 공급을 위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설립,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등으로 한국이 여러모로 미국에 서운해하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미국에 관한 정보가 ‘급 필요’하던 시기였고, 그의 집에는 한밤중에도 국제전화가 수시로 걸려왔다.

“백 무관, 장관실에서 (정보를 확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빨리 현지에서 확인하고 보내줘. 알지? 백 대령이 물고 온 정보는 ‘국방장관, 합참의장의 출근 진상품’이라는 거.”

그는 미 국방성과 해군성, 합참, 의회 등을 매일 돌아다녔다. 밥을 사면서 그곳 관계자들과 친교를 맺었고, 그 결과는 ‘따끈따끈한’ 정보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로버트 김에게 전달받은 자료는 70여 건. ‘센서티브’한 내용도 있었지만 미국 측 주장처럼 국가 안위와 직결된 내용은 아니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가끔 ‘시크릿(SECRET·대외비)’ 표시가 없는 문건을 받았어요. 김 선생에게 물었더니 ‘시크릿 표시는 지워서 프린트했다’는 거예요. ‘독이 든 사과’를 먹은 거죠. (로버트 김의 문건에) 중독되니 내가 ‘화이트’(White·활동국의 정보기관에 신상이 알려진 스파이)라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 같아요.”

‘센서티브’에 대해 캐묻자 그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북한 내부의 소요 진압용 무기 구매 첩보도 있었어요. A4 2장짜리 문건이었는데 북한에서 소요 진압용 장비, 즉 권총과 수류탄 같은 것을 구매하려 한다는 내용이었죠. 미 공작원이 무기 중개상에게서 흘러나온 얘기를 정리한 거예요. 당시 한국은 북한 붕괴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는데, ‘내부 소요 진압’ 시나리오를 확인할 수 있었죠.”

북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말과 손짓이 빨라졌다. 임관 후 28년간의 군생활 중 26년을 대북 정보 파트에서 일한 그의 이력이 떠올랐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과거 위기 때보다 심각한 문제로 봐야 해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죠. 유사시 한국을 지원해줄 미국과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예요. 미국과 일본을 잠재우는 것, 함부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면 ‘너희들이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거예요.”

그는 “로켓, 미사일, 인공위성 등 종류에 대해 말이 많지만 단연코 미사일”이라고 확신했다.

“미국과 일본에 언제든 투하할 수 있는 미사일 체제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인정받을 때까지 북한은 계속 갑니다(쏩니다). 맹목적이죠.”

미국이 ‘요격’ 얘기를 꺼냈다가 거둬들인 것은 어떨까.

“각국의 수많은 첩보가 워싱턴DC로 향했을 거예요. 미국은 처음엔 (로켓을) 쏘아올리지 못하게 하려고 요격 얘기를 꺼냈지만 굉장한 리스크 부담 때문에 거둬들였을 거고요. 아니면 이미 북한의 한계(실패)를 파악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미국의 첩보 수집 능력은 차원이 다르니까요. 수중, 수상, 공중, 우주 4차원 입체예요.”

‘수중’얘기가 나오자 살짝 입고리가 올라갔다. 그는 8월11~15일 해군첩보부대 출신의 대북공작부대원(UDU)들과 경북 울진군 죽변항에서 독도까지 220여km를 횡단하는 ‘해룡 계획’의 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다시 뛰고 있다.

“53명의 요원이 2인 1조가 돼 교대로 헤엄쳐 횡단할 계획이에요.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에게 힘을 주고 나라사랑 마음을 갖게 하자는 취지죠. 행사 장비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여기저기 뛰고 있어요. 어렵더라고요. 무관 시절보다 더 뛰어야 할 것 같아요(웃음).”



주간동아 2009.04.28 683호 (p64~65)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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