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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천추태후 大고려 꿈꾼 여걸인가, 희대의 요부인가

  •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천추태후 大고려 꿈꾼 여걸인가, 희대의 요부인가

천추태후 大고려 꿈꾼 여걸인가, 희대의 요부인가

KBS2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모자간으로 출연 중인 채시라(황보수·큰사진)와 박지빈(왕송·작은사진).

기축년 새해 벽두부터 방영된 대하 역사 드라마 ‘천추태후’가 영화를 보는 듯한 웅장한 스펙터클로 안방극장의 화제가 되고 있다. 거란에 대항해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 구국영웅 천추태후(千秋太后·964∼1029)의 액션 신은 아마존 여전사의 부활을 보는 듯 카타르시스를 준다. 1000년 전에 죽은 천추태후가 강한 여성의 심벌로 화려하게 환생한 것이다. 천추태후가 누구인가.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손녀, 경종의 왕후(헌애왕후), 성종의 누이동생, 목종의 모후(천추태후), 현종의 이모로 일세를 풍미한 여걸이다.

그동안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해 주몽,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대조영 등 강한 남성 영웅을 주인공으로 만든 ‘마초 드라마’와는 완연히 대비되는 ‘아마조네스 페미드라마’의 탄생이라 하겠다. 저간의 TV 드라마는 꽃미남의 덫에 걸린 유약한 남성보다는 강한 여성을 부각하며 가부장 사회의 쇠락을 보여주는 내용이 많은데, 천추태후도 여기에 가세했다.

신숙주 편찬 ‘고려사’에 ‘사통·불륜·남색’ 기록

물론 천추태후 이전에도 우리 역사에는 강한 여성들이 있었다. 고구려 창업주인 주몽의 조력자이자 백제 건국의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 고구려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선왕의 아우 연우(延優)를 산상왕(山上王)으로 옹립하고 시동생과 재혼한 우씨(于氏), 신라 진흥왕·진지왕·진평왕대에 걸쳐 색공(色供)으로 신라를 주무른 미실(美室) 등이 있었다. 특히 미실은 치명적인 방중술(房中術)로 진흥왕을 유혹하고, 화랑 사다함의 목숨을 끊게 했으며,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13세 소년 진평왕의 동정을 빼앗은 팜므파탈로 ‘화랑세기’는 기록했다.

그러면 드라마가 아닌 역사 속에 전하는 천추태후를 만나보자. ‘고려사’ 후비(后妃) 열전을 펼치면 천추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헌애(獻哀)왕태후 황보(皇甫)씨는 대종(戴宗)의 딸로 목종(穆宗)을 낳았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응천계성정덕(應天啓聖靜德) 왕태후라는 존호를 올렸다. 목종이 18세가 됐으나 태후가 섭정하고 천추전에 거처했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천추태후라고 불렀다. 그가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정하려고 했다. 당시 현종(顯宗)은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었는데 태후가 그를 꺼려 억지로 승려로 만든 뒤 삼각산 신혈사에 내보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신혈소군(神穴小君)이라 불렀는데, 태후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다. (중략) 목종 12년 정월에 천추전에 불이 나자 태후는 장생전으로 옮겨 거처했으며, 후에 강조(康兆)가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태후의 친척을 해도에 귀양 보냈으며 사람을 시켜 목종을 죽였다. 그래서 태후는 황주에 가서 21년간 있다가 현종 20년(1029) 정월에 숭덕궁에서 죽었는데 향년 66세였고 유릉(幽陵)에 매장했다.”

천추태후 大고려 꿈꾼 여걸인가, 희대의 요부인가
이처럼 조선 문종 원년(1451)에 정인지 신숙주가 편찬한 ‘고려사’에 전하는 천추태후의 캐릭터는 그리 정숙한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고, 외척이자 천추태후의 연인인 김치양(?∼1009)도 ‘고려사’ 열전 반역조에 ‘성정이 간교(姦巧)하고 성욕이 매우 강한’ 인물로 질정(叱正)의 대상이 됐다. 사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사통(私通), 헌정왕후(?∼992)와 안종 왕욱(王郁·?∼996·현종의 아버지)의 불륜, 목종의 남색(男色) 등 고려 왕실의 황음무도(荒淫無道)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하지만 이는 계층내혼과 근친혼을 통해 권력을 세습하려는 왕실의 의지와 맞물려 있었고, 고려사회의 성개방 풍조와 여성 위주의 성가치관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천추태후의 활약기는 대내적으로는 고려 문벌귀족사회가 발전하고, 대외적으로는 고려·송(宋)·요(遼) 동북아 삼국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거란의 세 차례 고려 침략이 있던 격동의 시대였다.

거란 1차 침입(993년) 때 거란 장수 소손녕과 안융진 외교 담판에서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고려라 이름하고…”를 주장하며 강동 6주를 획득한 외교의 달인 서희(徐熙·942∼998), 거란 2차 침입(1010년) 때 신무기 검차(劍車)를 개발해 거란을 대파하고 포로가 되어 거란 성종(聖宗) 앞에서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며 단호히 거절한 강조(康兆·?~1010), 거란 3차 침입(1018년) 때 칠십 노구를 이끌고 거란 소배압의 10만 대군을 격파, 귀주대첩의 개가를 올리면서 거란의 야욕을 꺾고 천리장성을 축조한 국방의 중추 강감찬(姜邯贊·948∼1031) 등이 당시 역사 속 고려의 자긍심을 드높인 ‘팔관회적 질서’의 주인공들이다.

역사 드라마는 팩트와 픽션 제대로 합성해야

당시 30대 전반의 천추태후는 섭정을 하면서 성종 때 자신과의 추문으로 장배(杖配·곤장을 치고 유배 보냄)된 김치양을 불러 우복야 겸 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로 삼았다. 그러자 김치양은 그의 친당을 요직에 배치하고 300여 칸의 화려한 저택에서 궁사극치(窮奢極侈·사치가 아주 심함)의 생활을 하며 밤낮으로 천추태후와 음탕하게 놀았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이렇듯 한순간에 권력의 실세가 된 김치양 세력과 목종의 측근 세력이 대립각을 세우는 10여 년의 권력 암투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목종이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의 소생이자 태조의 유일한 후손인 대량원군(후일 현종)을 후사로 정하자 김치양은 천추궁에 불을 지르고 목종을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천추태후와 김치양 세력의 이러한 야욕을 눈치챈 폐신(嬖臣·임금에게 아첨해 총애받는 신하)이자 목종의 남색 상대인 유충정(劉忠正)의 밀고로 목종은 이들을 선제 제압하기 위해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에게 서울 시위(侍衛)의 명을 내린다. 당시 강조는 정세를 살펴 목종을 폐립하고 대량원군을 옹립하기 위해 일대(一隊)를 따로 삼각산에 보내는 한편,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개경에 들어가 천추태후와 김치양 세력을 제거하고 목종까지 폐했는데, 역사에선 이를 ‘강조의 정변’이라 부른다. 그러나 국왕을 시해한 연유로 강조는 ‘고려사’ 열전 반역조의 김치양 뒤에 실리게 된다.

역사는 드라마에서처럼 천추태후가 태조 왕건의 북진이념을 계승하고 황제국가 대고려를 꿈꾼 여걸로 거란과의 항전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최근 승핍(承乏·인재가 부족해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 벼슬을 맡음)으로 몸살을 앓는 이 나라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고 절규한 시인의 육성이 그리워지지만,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하고 문학적 상상력만으로 영웅을 창조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방짜가 퉁짜가 되지 않으려면 구리와 주석의 합금 비율을 78대 22로 유지해야 하듯, ‘천추태후’ 같은 역사 드라마가 성공하려면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효율적인 합성기술이 필요하다. 역사 드라마가 지난 역사를 지나치게 임의로 복원해 대중문화의 견인차 구실을 하려는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간동아 2009.03.10 676호 (p78~79)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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