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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죽음, 그 거룩한 졸업식이여!

존엄사 논란 계기로 본 한국인 죽음의 의미

  •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 kdyi0208@naver.com

죽음, 그 거룩한 졸업식이여!

죽음, 그 거룩한 졸업식이여!
서울서부지방법원(서부지법)이 2008년 11월28일 존엄사를 인정하는 첫 판결을 내리면서 그동안 사회적 논의가 지지부진하던 존엄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환자 김모(76) 씨는 2008년 2월 폐 조직검사를 받던 중 출혈로 인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됐고, 자녀들은 “어머니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며 연세의료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 판결 후 병원 측은 항소심을 뛰어넘어 곧바로 대법원에 상고하는 ‘비약적 상고’ 의사를 밝혔으나 원고 측이 이에 동의하지 않아 12월18일 항소장을 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뿌리

존엄사는 그동안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계를 중심으로 도입 요구가 계속됐다.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고 싶은 ‘웰다잉(well dying)’ 개념이 확산되면서 국민의 찬성 목소리도 높아졌다. 국립암센터가 2008년 10월 성인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87.5%가 존엄사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양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의 경우 1975년 4월 혼수상태에 빠진 딸(퀸란)의 생명유지장치 제거 권리를 아버지에게 달라는 소송에서 법원이 아버지의 주장을 인정함으로써 존엄사 논쟁에 불이 붙었다. 영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논쟁이 벌어졌고, 식물인간 환자에게서 영양공급장치를 떼어내도 좋다는 판결(1993년) 등이 나왔다. 독일은 형법으로 “어떤 이유에서도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한 개인의 판단을 기준으로 죽음 방식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방식이 되고 만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다수가 공감하는 방식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도 바람직한 방식을 찾긴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래도 ‘한국사람’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에 각각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지탱해주는 공통분모는 있게 마련이다. 이는 마치 하나의 나무에서 생겨난 수많은 가지와 잎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돼 있는 것과도 같다. 서로 다른 가지와 잎을 각각의 차원에서만 파악한다면 모든 가지와 잎이 공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낼 수 없다. 오직 뿌리의 차원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바람직한 방식이 찾아지는 것이다.

죽음의 해법을 찾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는 하나의 흐름은 바로 전통 속에 있다. 우리 전통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를 칼 융은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했다.

죽음, 그 거룩한 졸업식이여!

2008년 12월17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박창일 연세의료원장(맨 오른쪽)이 존엄사 판결과 관련해 병원 측 견해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 왔을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돼 있다고 봤다. 그중에서 몸은 ‘모음’을 의미한다. 물, 쇠고기, 시금치, 콩나물 등을 ‘소화’라는 방식을 통해 모아놓은 것이다. 물, 쇠고기, 시금치, 콩나물 또한 그 이전의 물질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원재료를 분석해 들어가 보면 결국 우주에 가득한 물질의 본질인 기(氣)에 도달한다. 형체를 가진 모든 몸은 기가 모여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닷물에 얼음이 떠 있는 것과도 같다. 사람들이 그것을 얼음덩어리로만 안다면 얼음덩어리가 녹아 없어진 뒤에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얼음의 본질을 모르는 탓이다. 얼음의 본질은 물이다. 물의 차원에서 보면 얼음이 녹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즉 물의 차원에서 보면 얼음이 얼어 있을 때나 녹았을 때나 변함없는 물이다.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차이는 오직 형태뿐이다. 얼음이 녹는 것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의 몸이 죽는 것도 이와 같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기가 잠시 모여 있다는 의미고, 죽는다는 것은 기가 흩어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죽음을 ‘돌아가신다’고 표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참된 삶을 확인하는 시간

사람의 마음은 몸을 부리는 명령자 구실을 한다. 그런데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변하지 않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변하는 마음이다. 변하지 않는 마음은 원래의 내 마음이고, 변하는 마음은 원래 나에게 없던 것이 도중에 들어와 내 마음인 것처럼 행세하는 욕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지고 본래의 마음이 적어지기 때문에 본래의 마음을 잊고 욕심을 본마음인 양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욕심은 자기 몸에만 들어 있는 것이기에 몸이 흩어지면 있을 곳이 없어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욕심을 자기 마음으로 알고 모든 것을 욕심으로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곧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에 ‘최악’이 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욕심이 본래의 내 마음이 아님을 알아 욕심을 제거하면 본래의 내 마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본래의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 마음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마음과도 일치한다. 우리 조상들은 먼 옛날부터 이러한 삶을 추구해왔다. ‘단군신화’에 나와 있는 내용도 그렇다. 곰과 범이 마늘과 쑥을 먹으며 햇빛조차 들지 않는 동굴에서 견디는 것은 곧 욕심을 제거하고 본심을 찾는 노력을 의미한다.

곰과 범은 진짜 곰과 범이 아니다. 욕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욕심을 갖고 사는 사람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 본래의 내 마음을 되찾아 본마음으로 살 때만 참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본래의 내 마음을 회복해 사람답게 살려고 했다. 그러한 사람이 군자(君子)다. 군자의 삶은 영생의 삶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후한서’에서 우리나라를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 즉 ‘군자들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나라’라고 기록했다.

이상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사람의 몸과 마음, 어느 하나 죽어 없어지는 것은 없다. 죽어서 없어진다는 생각은 본심을 망각한 채 욕심에 빠져 몸의 형체만 보고 판단을 내리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의 내 마음에서 보면 죽어 없어지는 것은 없다. 다만, 몸의 차원에서 볼 때 형태가 바뀔 뿐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던 기가 흩어져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래 있었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그리운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타향에 왔을 때는 할 일이 있어서다. 가고 싶어도 할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참아야 한다. 죽음도 이와 같다. 할 일을 다 마친 뒤에 맞이해야 하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을 ‘마친다’는 의미에서 ‘졸(卒)’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죽음은 졸업식인 것이다.

고향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 고향이 좋은 줄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졸업식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졸업식 뒤에 갈 곳이나 할 일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의 경우가 그렇다. 중학교에 가지 않는 사람에게 초등학교 졸업식은 마지막이어서 싫고, 취업이 결정돼 있지 않은 사람에게 대학교 졸업식은 갈 길이 없어서 싫다. 그러나 갈 길이 정해져 있고, 그것이 더 즐거운 길일 때는 졸업식은 행복한 일인 동시에 과정을 잘 마쳤음을 기념하는 ‘거룩한 기념식’이 된다.

죽어서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싫은 대상이다. 그러나 죽음을 즐거운 고향으로 가는 설레는 길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거룩한 축복이다. 그런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때 거룩한 졸업식을 한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놓고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정답게 나눈다. 그리고 떠난 뒤의 일들을 맡아줄 사람들에게 각각 부탁의 말을 한다. 오늘날이라면 기념촬영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마지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지막에 ‘거룩한 졸업’을 하는 이는 삶이 진실했던 사람이고, 슬퍼서 어쩔 줄 모르는 이는 삶이 진실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지인이나 제자들이 임종을 지키면서 마지막으로 “선생님, 기분이 어떠하십니까?”라고 확인했다. 이때 “생사의 이치를 내 일찍 알았으니 편안할 따름이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사람은 삶이 참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서산에 걸린 해를 보고 악기를 두드리며 노래하지 않는다면 눈물 콧물 흘리는 슬픈 노인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의 거룩한 졸업식은 어떤 절차와 방식으로 치러졌을까.

죽음, 그 거룩한 졸업식이여!

2007년 8월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선생의 장례 행렬.

죽음을 맞이하는 절차와 방식

조선시대 의례교본이던 ‘사례편람’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절차와 방식이 다음과 같이 설명돼 있다.

-주인공의 병이 위독해지면 가장 편안한 장소, 평생 삶의 터전이던 자기 집 안방으로 모신다. 방을 깨끗이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힌 뒤 북쪽 창 밑 아래쪽에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눕게 한다. 그리고 몸을 붙잡아 편안하게 숨이 끊어지길 기다린다.

-숨이 끊어진 것이 확인되면 참석자가 곡을 한다.

-그런 다음 초혼을 한다. 초혼은 주인공이 평소 입던 윗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왼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아랫부분을 잡은 채 위로 들고 북쪽을 향해 주인공을 부르며 돌아오시라고 세 번 외치는 것이다.

-초혼을 마친 뒤에 옷을 들고 내려와 시신 위에 덮어놓는다. 이는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보내는 처지에서 더 보고 싶은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장막을 치고 시신을 옮긴 뒤 장례 절차를 시작한다.

거룩한 졸업식은 주인공의 의식이 완연할 때 주인공을 둘러싸고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최근 우리의 ‘졸업식’은 어떠한가. 많은 사람이 맞이하고 있는 졸업식은 거룩하지 못하다. 중환자실에서 온갖 기계를 몸에 단 채 의식이 몽롱한 상태로 맞이하기도 한다. 주위에 친지나 지인은커녕 가족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쓸쓸하게 졸업식을 맞이해도 되는 것일까. 오늘날 삶의 방식이 옛날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그 의미마저 버려지는 것은 안타깝다.



주간동아 2009.01.06 668호 (p42~44)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 kdyi02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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