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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오동진의 ‘영화로 사는 법’

피도 눈물도 없는 부조리한 폭력의 세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이스턴 프로미스’

  •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피도 눈물도 없는 부조리한 폭력의 세계

피도 눈물도 없는 부조리한 폭력의 세계

영화의 주인공들은 일단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되면 자신이 그동안 지키려 애썼던 현재적 삶의 가치가 무엇이었든, 잊고 싶은 과거가 어떠했든 그 구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의 데이비드 린치 감독과 함께 부조리(不條理) 철학을 보여주는 시네아스트로 불리는 캐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요즘 몰두해 있는 화두는 ‘폭력’이다. 그는 전작인 ‘폭력의 역사’에 이어 신작 ‘이스턴 프로미스’를 통해 부조리한 폭력이 얼마나 일상화돼 있는지를 고찰한다.

‘이스턴 프로미스’는 열네 살 미혼모가 남긴 일기장과 그의 아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잔혹한 음모와 살인극의 이야기다. 배경은 영국 런던 외곽의 남루한 지역. 바로 러시아 최대 마피아 조직 가운데 하나인 ‘보리 V. 자콘’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곳이다.

영화 도입부, 느닷없이 벌어지는 살인극으로 뒤통수를 친 크로넨버그는 곧이어 사람들을 병원의 한 응급실로 안내한다. 거기서는 심한 하혈 끝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온 한 여자아이의 배 속에서 새 생명체를 꺼내는 수술이 진행되고 있다. 여자아이는 아기를 낳자마자 죽고 그 아기를 받은 안나 키트로바(나오미 와츠 분)는 고민에 빠진다. 타티아나라는 열네 살짜리 이 여자아이의 가방에서 일기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안나는 타티아나의 고향집을 찾아가 아기와 일기장을 돌려줄 심산이다. 문제는 그가 러시아계 영국인이긴 해도 러시아 글을 전혀 읽을 줄 모른다는 데 있다.

안나는 일기장 속에서 찾은 명함의 주소지를 찾는다. 곧 ‘트랜스 러시아’라는 레스토랑에서 인자한 표정의 늙은 주인 세미온(아민 뮐러 스탈 분)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타티아나의 일기장을 맡긴다. 그러나 곧 그 늙은 주인이 마피아의 보스이자 타티아나를 수없이 강간하고 학대한 장본인임을 알게 된다. 세미온은 아들 키릴(뱅상 카셀 분)과 그의 수족인 니콜라이(비고 모텐슨 분)를 이용해 타티아나의 일기를 없애고 아기와 안나도 해치려 한다.

전형적인 갱스터 영화의 스토리 구조를 따라가는 ‘이스턴 프로미스’는 누아르 영화의 칙칙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병치한다. 외관상으로는 언뜻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처럼 보이지만 크로넨버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부조리의 철학적 모토를 영화 곳곳에 박아 넣는다. 영화는 굉장히 폭력적이다. 하지만 그건 폭력적인 장면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가공할 내용 때문이다.



14세 미혼모의 일기와 아기 둘러싼 음모와 살인극

크로넨버그는 우리 시대의 폭력은 주체가 모호해지고 일상화된 데다 순환고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끔찍해졌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폭력이 이제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서 스스로 자기 생명력을 갖고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또 있겠는가. 영화의 주인공들은-마피아 두목이든 단원이든, 아니면 그들에 의해 살해되는 사람이든 위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든-일단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되면 자신이 그동안 지키려 애썼던 현재적 삶의 가치가 무엇이었든, 잊고 싶은 과거가 어떠했든 그 구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이며, 궁극적으로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작 ‘폭력의 역사’에서 이번 신작 ‘이스턴 프로미스’까지 이 가공할 폭력의 세계를 그린 연작 두 편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열혈 영화광들이 보자면 다소 낯설고 뜬금없는 변화처럼 느껴진다.

피도 눈물도 없는 부조리한 폭력의 세계

‘이스턴 프로미스’는 14세 미혼모가 남긴 일기장과 그의 아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잔혹한 음모와 살인극의 이야기다. 배경은 영국 런던 외곽의 남루한 지역. 바로 러시아 최대 마피아 조직 가운데 하나인 ‘보리 V. 자콘’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곳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마치 자발적으로 분열증에 걸린 것처럼) 줄곧 인간의 육체가 기계 또는 다른 어떤 것과 결합해 아주 다른 존재로 변해버리는 상상을 펼쳐왔다. 그의 영화는 일종의 하이브리드(hybrid), 곧 이종이었다. 그는 A가 B와 섞여 AB가 되는 것이 아니라 C가 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신봉하되 그것을 극단적인 상상력으로 입증하려 한다. 그의 영화가 늘 공포와 공상과학을 오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크로넨버그는 초기작들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극단적일 수 있는지를 실험하려 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그는 점점 인간이 얼마나 혐오스러울 수 있는지를 파헤치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에겐 더 이상 인간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로넨버그는 한편으로는 철저한 아나키스트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세상, 특히 인간을 완전히 파괴(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같은 크로넨버그의 생각은 ‘공각기동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공각기동대’를 만든 오시이 마모루의 머리에 이제 할리우드에서 혜안과 통찰력의 대명사로 통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몸을 합한 것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라면 그거야말로 크로넨버그식의 하이브리드한 상상력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

어떻게 하면 인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꿀 수 있을까. 크로넨버그는 그것이 절대 도덕이나 관습 따위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괴팍한 실험들을 해댄다. 어떤 때 그는 사람의 배 속에 텔레비전을 넣어 보기도 했고(‘비디오드롬’, 1983) 또 어떤 때는 파리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를 맞바꿔 보기도 했으며(‘플라이’, 1986) 그것도 안 되면 사람과 자동차가 섹스를 나누게 하기도 했다(‘크래쉬’, 1996).

크로넨버그의 이 해괴망측한 이야기들은 노골적으로 반(反)인간주의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티 휴머니즘이란 역설적으로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탐구 곧 진짜 휴머니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야말로 그의 기이한 상상력이 닿으려고 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크로넨버그는 이제, 지금과는 또 다른 실험을 해보려는 것 같다. 이미지보다는 스토리가 강해졌다. 훨씬 구체적이 됐다. 곧 구체성의 변증법을 통해 자신이 영화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궁극적인 해답-어떻게 인간과 세상은 구원될 수 있을 것인가-에 좀더 가깝게 다가서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로미스’가 지금까지 크로넨버그가 만들어왔던 영화와 아주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들은 과연 폭력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다행스러운 것은 크로넨버그가 이번 영화 속에 일정한 답을 마련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힌트는 타티아나의 아기다.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해보시기를.



주간동아 2008.12.16 665호 (p80~81)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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