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4

2008.09.30

불안의 시대, 새 세상 여는 코드 TREND

  •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입력2008-09-22 13:1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불안의 시대, 새 세상 여는 코드 TREND

    트렌드 정보업체 PFIN의 트렌드북과 참고 자료들. PFIN이 전망하는 2009년 트렌드는 ‘리셋(reset)’이다. 제품 개발자는 예술적, 영적 가치가 가득한 상품으로 환상을 만들어내고, 마케터는 콘텐츠를 감성적으로 스토리텔링하며, 판매자는 충성도 넘치는 고객들을 디테일한 서비스를 통해 관리함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불안하다. 믿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근의 미국발(發) 금융 쇼크는 세계 굴지의 대형 금융기관도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스러질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수세기 동안 인간은 불안할 때마다 미래를 점치기 위해 점쟁이, 마법사 등에 기대왔다. 적중률이 100%가 아니면 어떠랴. 흐릿한 등불이라도 들고 동굴 같은 미래로 걸어가는 것이 더 안심이 된다면야.

    불안할수록 점술에 의존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처럼, 국내외의 각종 악재에 노출되곤 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기업들은 ‘트렌드’를 미래를 읽는 길잡이로 삼기 시작했다. 점쟁이나 마법사보다 더 과학적일 뿐 아니라, 아슬아슬한 미래에 적지 않은 안도감까지 선사하는 수단으로 트렌드가 쓰이게 된 것이다.

    기업들의 이 같은 변화된 마인드를 반영하듯, 올 들어 국내에서도 트렌드가 비즈니스계의 화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트렌드’ 타이틀을 단 경영서적들이 봇물을 이루고 트렌드 관련 강좌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내년 1월14, 15일에는 서울 코엑스에서 국내 최초의 트렌드 관련 국제 콘퍼런스도 열릴 예정이다. 프랑스의 ‘스타일 비전’과 한국의 ‘PFIN’, 한국트렌드연구소 등 국내외 트렌드 연구 업체들이 공동 개최하는 국제 콘퍼런스 ‘인사이트코리아 2009’는 트렌드를 비즈니스와 접목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불안의 시대, 새로운 경영 키워드는 바로 ‘트렌드’가 아닐까.

    # 트렌드 산업 내년에 정점 도달

    제일기획의 박재항 브랜드마케팅연구소장은 ‘트렌드’가 하나의 유행어처럼 자리잡은 2008년 한국 사회의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 연구소가 소비자 트렌드 분석자료를 키워드로 정리해 발표하기 시작한 1986년만 해도 일반인들이 트렌드란 단어 자체를 생소해했다는 것이다.

    한편 경영컨설팅사 리드앤리더의 김민주 대표는 올해 들어 유독 트렌드 관련 강연 요청이 줄을 잇고 참가 인원도 늘어 의아한 마음에 그 원인을 찾아봤다고 한다.

    “뉴밀레니엄을 앞둔 1990년대 말 미래학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처럼, 21세기의 첫 10년을 넘기는 현시점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점치려는 수요가 늘어나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 트렌드 전문가들은 ‘트렌드’라는 키워드를 둘러싼 관련 산업의 성장이 올해 성숙기를 거쳐 내년쯤 정점에 달할 것으로 내다본다.

    지난해 말 출간된 ‘마이크로트렌드 : 세상의 룰을 바꾸는 특별한 1%의 법칙’(해냄)은 이젠 다수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메가트렌드’ 대신 전체 인구 1% 미만의 작은 집단이 만들어내는 ‘마이크로트렌드’가 우리 사회의 변화 방향을 결정한다는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연간 소득 10만 달러 이상의 고학력 유권자들이 선거 후보자의 공약보다는 성격이나 외모에 더 관심을 둔다는 ‘감수성이 예민한 엘리트 집단’, 정보화 시대를 역행해 온라인 생활을 거부하는 ‘신종 러다이트족’ 등 미국 사회 75개의 작은 집단을 분석한 뒤 이 각각의 사례들로 ‘큰 그림’을 보려고 시도했다. ‘마이크로트렌드’라는 신조어 자체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키워드로 회자되는 동안, 올 들어 트렌드 관련 서적들이 봇물을 이뤘다.

    ‘핫트렌드 40 : 눈으로 보는 글로벌 트렌드’(한국트렌드연구소), ‘2008 트렌드 키워드’(미래의창), ‘트렌드 인 비즈니스’(쌤앤파커스), ‘퓨처 코드 : 대한민국 미래 트렌드’(한경비피), ‘쿨헌팅, 트렌드를 읽는 기술’(비즈니스맵), ‘미래를 읽는 기술’(한국경제신문), ‘트렌드를 읽는 기술’(비즈니스북스), ‘브랜딩 트렌드 30’(김앤김북스), ‘파괴적 트렌드 : 비즈니스의 미래를 바꾸는 10가지 통찰’(크리에디트) 등이 모두 올해 1월부터 8월 사이에 출간된 소비자 트렌드 관련 서적이다. 독일 지멘스그룹이 펴낸 ‘트렌드와 시나리오 예측기법’ 등 내년 번역 출간을 앞둔 책들도 있다.

    출판계에 트렌드 바람이 거센 이유는 뭘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현재 불황인 출판계 사정을 감안한다면 ‘마이크로트렌드’가 10만권 이상 판매됐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라며 “이처럼 트렌드를 다룬 몇몇 책이 화제가 되면서 비슷한 소재의 책들이 대거 기획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마이크로트렌드’가 제시한 ‘작은 집단’의 화두는 올 5월 출간된 ‘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 세상의 변화를 읽는 디테일 코드’(웅진윙스)로 이어졌다.

    각 회사 내 트렌드 연구팀의 기능도 확대되고 있다. 제일기획 박재항 소장은 “기존 트렌드 연구팀의 기능이 소비자 태도와 신제품의 흐름을 정리하는 데 그쳤다면, 이제는 가까운 미래의 트렌드를 예측하고 심지어 창조하는 데까지 기능이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 메가트렌드에서 마이크로트렌드, 나노트렌드로

    트렌드 학자들은 “트렌드 연구에도 트렌드가 있다”고 말한다. 얼마 전까지 1960~70년대 앨빈 토플러를 필두로 한 미래학자들과 1982년 ‘메가트렌드’를 주창한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 등이 펼친 거시적 담론이 득세했다면, 최근에는 소수 집단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한 ‘마이크로트렌드’, 이보다 더 미시적인 ‘나노트렌드’를 찾아내는 게 대세라는 것이다. 각 기업들도 소비자 밀착형의 라이프스타일 관련 트렌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광고대행사 웰콤의 이영실 마케팅연구소 커뮤니케이션 컨설팅팀장은 “21세기에는 고객과 사회 변화의 흐름을 누가 더 빨리 읽어내고 그에 맞는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는지가 수익 창출에 결정적 구실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대일 마케팅이 늘어나면서 각 소비자들의 다양한 니즈에 관심이 집중되고, 그에 따라 마이크로트렌드들이 중시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좀더 미시적인 트렌드가 득세하는 이유를 각 기업의 리스크매니지먼트와 연결짓기도 한다. 미국발 금융 쇼크처럼 예기치 못한 타격과 그 여파를 수년 주기의 메가트렌드로 예측하고 대응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물론 거시경제와 미시경제가 맞물려 돌아가는 비즈니스업계의 특성상 ‘메가트렌드’가 무용지물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좀더 가깝고 현실적인 미래 대책을 세우고, 다양한 기회를 모색하는 데 마이크로트렌드의 역할이 더 부각되리라는 지적이다. 삼성패션연구소 김정희 수석연구원은 “사회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수많은 비즈니스 기회가 다양한 변수에 의해 생기고 소멸함에 따라 변화무쌍한 마이크로트렌드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트렌드 연구가들은 ‘트렌드’가 지나치게 많이 회자돼 더 이상 매력적인 단어로 비춰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술이 적중률과 상관없이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왔듯, 트렌드 역시 미래의 예측 툴로 그 구실을 이어나가리라는 의견이 아직은 더 우세한 듯하다.

    트렌드 책들이 설명하는 트렌드 확산 과정

    트렌드세터들이 주도 … 다이아몬드 모델로 설명


    트렌드의 확산 과정은 피라미드 또는 다이아몬드 모델로 설명된다.

    피라미드나 다이아몬드의 위 꼭짓점을 극소수의 트렌드 창조자가 차지하는 가운데 그 아래로 트렌드세터(전체의 5% 미만), 트렌드 추종자(얼리어답터라고도 하며 전체의 10%), 초기 주류 소비자(20%), 주류 소비자(40%), 후기 주류 소비자(15%), 보수적 소비자(10%), 반혁신적 소비자(변화에 저항하는 소수)가 차례로 놓이는 것이다. 각 단계별 집단의 이름과 비율을 이와 같이 설정한 트렌드 사회학자 헨릭 베일가드는 신간 ‘트렌드를 읽는 기술’(비즈니스북스)에서 “트렌드 창조자와 트렌드세터는 ‘시각적으로 민감한 집단’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럭셔리 브랜드 ‘디오르 옴므’의 디자이너였던 에디 슬리먼은 2000년대 초 패션쇼 무대의 모델들을 통해 머리의 중간 부분을 한 줄만 남긴 채 나머지는 짧게 깎는 ‘모호크’ 헤어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2002년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과 팝가수 로비 윌리엄스를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 예에서 에디 슬리먼은 트렌드 창조자, 데이비드 베컴은 트렌드세터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트렌드 창조자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소수 혁신가들이 선보인 트렌드의 싹은 대중에게 많이 노출되는 트렌드세터들을 통해 전달됨으로써 비로소 트렌드가 된다. 베일가드는 “트렌드세터가 되기 쉬운 집단으로 부자들, 창조적 일을 하는 남성 동성애자, 연예인, 젊은이” 등을 꼽았다.

    한편 트렌드연구가 김경훈 소장은 저서 ‘트렌드 워칭’(한국트렌드연구소)에서 100년 전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이 주장한 모방의 과정 모델을 통해 트렌드 확산 이론을 설명했다. “사회적 위치, 경제적 능력에 따라 ‘계급’이 형성된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상징물들을 흉내냄으로써 신분상승 욕구를 채운다”는 설명이다. 특정 트렌드의 진행 속도와 방향은 사안에 따라 달라진다.

    미래학자 에릭 갈랜드는 신간 ‘미래를 읽는 기술’(한국경제신문)을 통해 트렌드의 진행 속도와 방향을 직선형, 포물선형, 역포물선형 그래프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직선형은 의료보건 비용의 지속적인 증가 추이처럼 일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진행되는 작은 움직임, 포물선형은 인터넷 사용자 수가 1995년 월드와이드웹의 등장과 함께 급성장한 것처럼 변동이 큰 움직임을 가리킨다.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