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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천국|노암 모로 감독의‘스마트 피플’

헛똑똑이 父女 사랑에 눈뜨다

  •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헛똑똑이 父女 사랑에 눈뜨다

헛똑똑이 父女 사랑에 눈뜨다

덥수룩한 수염에 늘어진 뱃살, 자신과 학문밖에 모르는 인문학 교수 로렌스는 병원에서 우연히 옛 제자 자넷을 만나 데이트를 시작한다.

예전 학부시절의 교수님은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분이었다. 연구실에서 책만 보신 것이 문제였을까? 하루는 연구실에 둘 플라스틱 휴지통을 사라며 주신 돈이 1990년대 당시 돈으로 3만원! 플라스틱 휴지통 10개는 사고도 남을 돈이었는데, 그것도 부족하냐는 표정이었다.

영화 ‘스마트 피플’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 이야기다. 머리에 든 건 많은데 사람을 어떻게 사귀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 ‘사이드웨이’의 제작자 마이클 런던은 참으로 ‘스마트’하지만 사랑과 연애 같은 소소한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언스마트’한 다섯 명의 캐릭터를 통해 산다는 것의 묘미를 함께 생각해보자고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내민다.

로렌스(데니스 퀘이드 분)는 배가 나오고 등은 구부정한 전형적인 인문학 교수. 문학비평에야 일가견이 있지만, 세상일에는 영 서툰 홀아비 교수다. 한편 로렌스의 딸 바네사는 청년 공화당원에 멘사 회원이지만, 아버지가 머리를 다쳤는데도 다가올 SAT 시험에만 관심을 두는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 로렌스는 시를 쓰는 아들도, 외로운 딸 바네사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속수무책이다. 마침 그는 학교 주차장에서 견인된 차에 든 가방을 꺼내려다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10년 전 자신이 C학점을 주었던 제자 자넷(사라 제시카 파커 분)을 만나 데이트를 시작한다.

주인공은 학창시절 공부는 잘했을지 모르지만, 학생들이 상담을 하러 오자 일부러 시계를 퇴근시간 이후로 돌려놓을 만큼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학장이 되고 싶어하지만 학생들의 평판은 형편없고, 17년 전 사별한 아내의 옷을 아직도 옷장에 간직하고 있을 만큼 과거에 묻혀 살아간다. 사실 그의 마음은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사고의 두려움으로 꽉 차 있다. 아내에 대한 추억인지, 사고에 대한 두려움인지 로렌스는 늘 차의 뒷좌석에만 앉는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수년간 쓴 책이 출판되느냐 마느냐에만 쏠려 있다. 그러니 첫 데이트에서 제자였던 애인에게 케케묵은 빅토리아 문학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밖에.

로렌스 역의 데니스 퀘이드는 몸무게를 12kg 늘리며 능청스럽게 지식인 교수상을 연기한다. 남편이 교수인 필자로서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꼽을 뺄 일이다. 늘어난 뱃살을 허리띠로 졸라매고, 덥수룩하고 지저분한 머리에 구부정한 걸음걸이, 늘 트레이드마크처럼 옆에 끼고 다니는 가죽가방까지(감독은 로렌스의 대리 자아로 이 가죽가방을 선정했는지, 그가 나오기만 하면 가죽가방을 클로즈업한다). 이 사람이 정말로 ‘파 프롬 헤븐’에 나온 게이 성향의 남편이고, ‘밴티지 포인트’의 베테랑 경호원일까.



잔잔한 심리묘사와 소소한 일상 덧입힌 로맨틱 코미디

여기에 시나리오 작가 마크 포이리어가 진정 말하고 싶은 사람, 로렌스의 입양한 남동생 척이 등장한다.‘사이드웨이’에서 바람둥이 뻔뻔남을 연기했던 토머스 헤이든 처치는 잠들 때마다 내복을 입고, 대학 기숙사에서 깡통이나 주워 모으는 낙오자를 멋지게 소화한다. 그러나 척이야말로 이 경직되고 세상살이에 서툰 집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바네사를 끌고 가 술도 먹이고, 애인에게 달려가는 형 뒤에 대고 “사랑해, 미안해”라고 말하라고 외치는 사람도 척이다. 각본가 마크 포이리어에 따르면 늘 현실에 불평불만 많은 자신의 모습이 로렌스에게 투영됐다면, 척은 자신이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백수 캐릭터란다.

이렇게 ‘스마트 피플’은 철저히 배우의 영화고, 시나리오 작가의 영화며, 캐릭터의 영화다. 영화는 극적인 스토리나 첨예한 욕망, 거대한 반전 같은 고전적 시나리오 작법보다는 세밀하고 잔잔한 심리묘사의 뼈대 위에 소소한 일상이란 진흙덩어리를 덧붙여 만든 소품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연기 앙상블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연극을 보는 것 같고, 그중에서도 ‘주노’에서 당당하고 깜찍한 10대 미혼모 역할로 전 미국을 뒤흔들었던 엘렌 페이지가 발군이다. 자신의 외로움을 지적인 방어 속에 가둬놓는 이중적인 천재소녀를 완벽히 소화한 이 스물한 살의 여배우는 데니스 퀘이드나 토머스 헤이든 처치, 심지어 사라 제시카 파커 같은 할리우드의 대배우들에게 뒤지지 않는 배우라는 사실을 이 작품으로 입증해냈다.

그러니 이 스마트한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할까. 결국 사랑은 IQ 대신 EQ를 높여야 하는 서툰 사람들의 마음을 서서히 녹여나간다. 입양된 삼촌에게 술에 취해 키스를 퍼붓던 소녀는 자신의 혼란된 감정을 정리하고, 학장을 하려던 아버지는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기로 마음먹는다.

공화당원, 아이비리그 등 은근한 보수성 풍겨

헛똑똑이 父女 사랑에 눈뜨다

로렌스의 딸 바네사 역시 수재지만 아버지처럼 감정의 교류에 서툴다.

영화의 마지막, 처음으로 학생들에게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보는 로렌스의 변화는 그래서 살갑고 다감하다. 사실 자넷과의 첫 데이트에서, 자넷은 계속해서 문학비평만 주절거리는 로렌스에게 자신이 어디 출신인지 물어보지 않는다며 그의 무례함을 꼬집었으니까.

자, 그런데 한 가지 조심할 점. 영화를 보다 보면 많이 배운 사람들도 세상살이에 대해서는 배워야 할 게 많다는 사실에 넌지시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그 이면의 보수성에 배알이 꼴릴 수도 있겠다. 사실 이 영화는 은근히 보수적이고 스스로가 스마트하다는 자의식을 버리기 어려운, 전형적인 아이비리그 출신 냄새가 풀풀 풍긴다. 똑똑한 바네사가 청년 공화당원이라는 것도 그렇고, 나이와 계급 차이가 나는 척과의 로맨스는 진전 없이 싱겁게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이나 하니프 쿠레이시의 각본에서 즐겨 다뤄지는 계급적 문제나 이주노동자, 성적 소수자 같은 ‘언스마트’한 사람들의 삶과는 영영 거리가 멀다. 그리고 영화 자체가 그러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결국 배운 것 많고 가진 것 많은 사람들도 고민이 있다는 천하태평한 주제가 마음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스마트 피플’은 충분히 즐길 만한 로맨틱 코미디다. ‘섹스 앤 더 시티’의 히로인 사라 제시카 파커가 뉴욕 대신 전형적인 대학도시인 피츠버그에 나타나 더는 구두 쇼핑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어리둥절해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주간동아 2008.09.09 652호 (p70~72)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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