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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창|‘물랭 루주’

전기 먹는 조명 파리를 밝히다

  • 이명재 자유기고가

전기 먹는 조명 파리를 밝히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에 들어선 카바레 ‘물랭 루주’. ‘붉은 풍차’라는 뜻 그대로 붉은색의 커다란 풍차가 내걸린 이 업소는 개관하자마자 명물이 됐다. 이 가게가 문을 연 1889년은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맞는 해였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때까지 이어지게 될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Epoque·좋은 시절)’였다. 그 전에는 본 적 없었던 밝고 현란한 조명으로 물랭 루주는 파리의 밤을 밝혔다. 물랭 루주는 이를테면 벨 에포크의 네온사인이었다.

영화 ‘물랭 루주’에서 여주인공 사틴은 고혹적인 미모와 목소리로 순진한 작가 크리스티앙과 청중의 마음을 빼앗았다. 그러나 당시 관객들은 무용수보다 수백 개의 백열전구가 밝히는 조명에 더 열광했다고 한다. 물랭 루주의 현란한 조명은 미국의 에디슨이 40시간 이상 빛을 내는 전구 발명에 성공한 지 딱 10년 만의 일이었다. 빛처럼 빠른 전파 속도였다.

물랭 루주가 개관하기 몇 달 전 파리에 에펠탑이 건립됐다. 에펠탑에는 전기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가 가동돼 300m 꼭대기까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물랭 루주와 에펠탑은 전기와 조명 기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정복한 것이었다. ‘좋은 시절’을 만끽하기 위해 사람들은 낮만으로는 부족했고 밤도 대낮처럼 밝혀야 했다. 밤이면 귀가해야 했던 사람들은 이제 밤늦게까지 즐길 수 있게 됐다. 또 지상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하늘로 올라가려 했다.

파리 만국박람회는 벨 에포크의 전시장이었고 자축 파티였다. 파리는 1867년부터 4차례나 만국박람회를 열었다. 박람회장에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첨단 기술의 전리품들이 어우러졌다. 지하철이 개통되고, 움직이는 보도(步道)까지 선보였다. 1900년 박람회에는 냉장고가 등장했다. 한여름에도 얼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인간은 이제 자연의 순환을 다스리게 됐다는 정복감에 취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데는 전기의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기 문명의 풍요를 지탱하느라 석탄 등의 에너지 소비는 갑절로 늘었다. 석유 가격이 100달러를 훌쩍 넘긴 지금, 전기 문명의 벨 에포크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투기자본의 소행이냐 아니냐는 데 대해서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에너지 문명이 전례 없는 사태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물랭 루주’에서 뚱뚱한 지배인은 “쇼는 계속돼야 한다(Show must go on)”고 말한다. 인류가 ‘문명의 쇼’를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건 더 많은 전구가 아니다. 물랭 루주에 내걸렸던 풍차처럼 자연과 인공이 조화로이 어우러진 절제와 검소함이다.



주간동아 2008.08.12 648호 (p70~70)

이명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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