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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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설움 ‘훌훌’ “우리는 대기만성 스타”

프로야구 안치용·조성환·이재주 등 잊혀진 중고선수들의 그라운드 반란

  • 윤승옥 스포츠서울 야구부 기자 touch@sportsseoul.com

    입력2008-06-30 1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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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 설움 ‘훌훌’ “우리는 대기만성 스타”

    LG 안치용, 롯데 조성환, 두산 김현수(왼쪽부터).

    올해 프로야구는 구름 관중에 들떠 있다. 야구장에 팬들이 몰려들면서 총 관중수 500만명을 기록하며, 문전성시를 이뤘던 1995년의 기세를 넘보고 있는 것.

    올 시즌 프로야구가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서재응 등 거물 해외파를 앞세운 스타 마케팅, 롯데(부산)-기아(광주) 팬들의 선의의 경쟁, 팽팽한 순위싸움, 이승엽 같은 해외파의 부진 등으로 정리된다.

    매년 방출·은퇴 위기 딛고 오뚝이 같은 인생역전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간 주목을 끌지 못했던 선수들이 대거 프로야구판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야구를 포기해야 하는 막다른 길에 몰렸던 중고(中古) 선수들이 올 시즌 맹활약하면서 팬들은 이들에게서 또 다른 인생의 묘미를 만끽하고 있다.

    시쳇말로 ‘뜨는’ 중고선수 가운데 LG 안치용(29)이 가장 돋보인다. 프로 데뷔 후 7년간 무명으로 보낸 안치용이 최근 살벌한 타격감을 선보이면서 그에 대한 관심은 여느 슈퍼스타 못지않다. 20대가 주름잡는 이 판에서 황혼기인 서른 즈음에 자리를 잡은 그에겐 아무래도 과분한 인기지만, 팬들은 그의 반전 스토리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안치용은 신일고와 연세대를 거쳐 2002년 LG에서 프로무대에 데뷔했지만, 지난해까지 한 해 평균 20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신일고 시절엔 초고교급 강타자로서 1년 후배인 투수 봉중근(LG)과 함께 화려한 조명을 받았고, 중학생 시절엔 140km 가까운 공을 던져 투수로서의 가능성도 인정받은 야구 도사였다. 하지만 프로무대에서 얻은 건 초라한 성적표뿐이었다.

    안치용은 사실상 올해 은퇴를 고려할 시점이었다. 냉정한 프로 세계에서 서른 살짜리 2군 선수를 놔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손가락 부상을 당한 박용택을 대신해 4월 말 투입된 이후 현재까지 3할대 중반의 타율, 5개 홈런, 30개 이상의 타점을 기록하며 무명 설움을 말끔히 씻어냈다. 이제야 그에게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셈이다. 중학생 때부터 그를 지켜봤던 한화 김인식 감독은 “크게 될 선수였는데 고생고생하면서 먼 길 돌아왔다”며 안타까움과 대견스러운 마음을 함께 드러냈다.

    안치용은 “올해 안 되면 그만두겠다고 생각했다. 매년 위기였고, 언제 방출될지 몰랐다. 최근 2년간은 마음이 약해져 ‘그만둘까’ 했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독하게 훈련했다”면서 “이제는 후보 선수로 돌아갈 수 없다. 경기에 출장할수록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 생긴다”고 말했다.

    롯데 조성환(32)의 스토리도 극적이다. 입지가 불안했던 선수가 병역비리로 3년을 허송세월한 뒤 복귀해 보란 듯 재기한 것. 현재 타격 랭킹 상위권을 계속 고수하고 있으니 사실 ‘재기’라는 말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곤란하다.

    1999년 2차 8순위로 롯데에 입단한 조성환은 기량이 두드러지지 않아 주목받진 못했지만, 성실함만큼은 높이 평가됐다. 2003년 풀타임 출장하고, 2004년 3할을 기록하며 자리잡는 듯했지만 그해 여름 병역비리에 휘말렸다.

    당시 공소시효가 18일밖에 남지 않았던 그는 도피를 선택했다. 6개월을 숨어 지내다 한계를 느껴 검찰에 자수했고 재판도 받았다. 법원은 초범인 데다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점을 참작해 그에게 징역 6월을 선고했다. 마지막 재판을 받기 전날 아내와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던 기억은 여전히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선고 이후 다시 3년간 공익근무를 해야 했던 그는 그렇게 야구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제대 후 야구를 시작한 그는 “야구 자체가 행복”이라며 약해질 대로 약해진 자신을 추슬렀고, 그 결과 과거보다 더 당당하게 그라운드에 설 수 있었다.

    병역비리 사건 즈음에 태어난 첫아들 영준(5)과 올 12월 태어날 둘째, 그리고 항상 옆에서 응원하는 아내에게 그는 이제 자랑스러운 가장이 됐다. 조성환은 “지난 3년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한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두려움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프로 입단과정에서 소외됐던 두산 김현수(20)도 감동을 주긴 마찬가지다. 2006년 손시헌, 2007년 이종욱에 이어 2008년 김현수가 두산 연습생 출신 스타 계보를 잇고 있다.

    신일고 재학 시절 고교야구 무대에서 정상급 타자였던 그는 3학년이던 2005년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다. 발이 느리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그는 다리를 다쳐 조심스럽게 움직였을 뿐인데, 프로 스카우터들은 그를 외면했던 것이다.

    타격 선두 김현수 연습생 신화를 쓰다

    아마추어 선수가 지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게다가 그는 드래프트 직후 열린 아시아청소년대회 때 같은 방을 썼던 동갑내기 한기주(기아)가 계약금으로 10억원을 받고 들떠 있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2006년 뒤늦게 신고 선수, 일명 연습생으로 두산에 입단한 김현수는 지난해 가능성을 인정받은 뒤 올해 타격 랭킹 선두를 달리는 등 만점 활약을 펼치고 있다. 두산도 그의 기량 상승효과를 톡톡히 봤다. 투수들조차 김현수에 대해 “도저히 약점을 찾을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 정도다. 두산이 거둬들이지 않았다면 천재가 사장될 수 있었던 셈이다.

    김현수는 “지명을 받지 못했을 때는 절망 그 자체였다. 아시아청소년대회 때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미지명 선수였다. 대회기간 내내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고, 어린 마음에 감당이 되지 않아 야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다”면서 “그래도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자존심 접고 연습생으로 입단해 야구만 바라보며 살았다. 어릴 때 쓴맛을 본 것이 좋은 약이 된 듯하다”고 말했다.

    이 밖에 기아 17년차 내야수 이재주(35)와 LG 15년차 내야수 최동수(37)도 눈여겨볼 ‘늦깎이’ 선수다. 둘은 여러모로 인생 역정이 비슷하다. 기대주였다가 슬그머니 잠수를 탔다. 그리고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해 이리저리 밀려나는 과정에서 포수 → 1루수 → 지명타자로 떠돌다 뒤늦게 대박을 터뜨린 이력도 비슷하다. 이들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방출 뒤 다시 일어선 한화 추승우(29), 삼성 최형우(25)도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다.

    8할의 시련을 꿋꿋이 이겨낸 ‘늦깎이 스타’들. 가슴 답답한 일이 많은 요즘, 야구장에 찾아가 이들의 오뚝이 같은 감동 인생 스토리에 가슴을 적셔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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