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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 고통 피눈물 ‘보팔의 비극’

살충제 공장 가스 누출 수천명 희생 24년째 … 살아남은 피해자들 잇따라 기형아 출산

  • 델리=이지은 통신원 jieunlee333@hotmail.com

대물림 고통 피눈물 ‘보팔의 비극’

대물림 고통 피눈물 ‘보팔의 비극’

델리에서 시위 중인 보팔 사고 생존자. 유니언카바이드사의 소유주인 다우케미컬이 인도 정부에 뇌물을 주어 사고를 무마하려 한다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혹서기에 접어든 5월 어느 날, 델리 시내 한복판 코넛 플레이스 부근에 나갔다가 엄청난 교통체증에 꼼짝 못하게 된 적이 있었다. 델리는 몇 년 사이 갑작스럽게 차량이 늘어나 시내 중심부의 교통체증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날은 좀 유별났다. 신호를 수십 번 받으며 교차로를 통과하려는데, 편도 3차선 도로 중 2개 차선을 차지한 채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위대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짜증이 채 가시지 않은 마음으로 피켓을 눈여겨 읽어보았다.‘보팔에 정의를!(Justice in Bhopal now!)’ 보팔? 어린 시절, 이름도 낯선 이국 도시에서 ‘독가스’가 누출돼 수천명이 희생됐다던 뉴스 보도가 떠올랐다.

1984년 인도 보팔에 있는 유니언카바이드사(社)의 살충제 제조 공장에서 유해 가스가 누출돼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았던 사건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사고가 일어난 지 이미 24년, 유니언카바이드사는 인도 정부와 합의해 피해보상을 마친 지 오래고, 문제의 인도 공장은 이제 다우케미컬이 인수해 주인마저 바뀌었다. 그런데 피켓을 쥐고 아이들을 들쳐 업은 피해자들은 아직도 거리에서 정의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상 최악 산업재해 현재진행형 피해

이처럼 보팔의 유니언카바이드 가스 누출은 해묵은 사건인 동시에 그 희생자들에게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사상 최악의 산업재해다. 1984년 12월3일 메틸이소시안이라는 치명적 유독 가스가 한밤중에 대량 유출돼 사고 발생 하루 만에 8000여 명이 사망했으며(민간단체 통계), 이후 가스 중독과 관련된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합치면 실제 사망자는 2만명이 넘는다. 다량의 메틸이소시안에 노출된 사람들은 초기에는 호흡 곤란, 기관지 장애, 눈 주위 경련과 각막결절 등의 증상을 보였으며, 사체 부검 결과 뇌 신장 간 등에서 부종과 조직 괴사가 발견됐다.



가스 누출은 밤 10시30분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작 공장의 경보기가 작동한 것은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으며 이마저도 아무 조치 없이 꺼졌다. 10시30분 전후 공장 인근 주민들이 호흡 곤란, 기침, 눈의 통증과 구토 등의 증상을 겪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의 경보는 새벽 1시에야 발동했다. 새벽 2시경 병원에 실려오기 시작한 환자들 중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이미 실명 상태인 사람들도 있었다. 유독 가스는 구름을 형성하며 낮게 떠 있었고, 사태를 알아차린 사람들은 공장으로부터 가능하면 멀리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사고 다음 날 보팔 시내에는 동물의 사체가 즐비했고 희생자들의 시신조차 모두 화장하기 어려워 강물에 내던지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가스의 악몽이 지나간 뒤에도 지역 주민들의 고통은 계속됐다. 공기, 물 등 주변 환경이 오염돼 마실 물도 찾기가 어려웠고, 무엇보다 유독한 ‘구름’을 두려워한 상인들이 접근조차 하지 않는 바람에 식량을 구하지 못해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보팔 참사 희생자 전체의 대표 자격으로 유니언카바이드사와 협상했던 인도 정부는 유니언카바이드사로부터 4억7000만 달러를 받고 향후 모든 민사책임을 면제해줬다. 보팔 주민들이 가스 누출로 인해 받은 피해와 환경 대재앙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라는 민간단체들의 성토가 잇따랐다. 또한 사고 7년 뒤인 1991년에야 이뤄진 사망자 인정에서도 정부가 인정한 사망자는 3828명에 그쳤다.

마침내 2004년 인도 대법원의 판결로 57만명 이상의 피해자가 보상금과 구호 프로그램을 받게 됐다. 여기엔 피해자들에 대한 직접 보상 외에도 폐기물 처리, 오염된 수질 관리와 식수 공급 계획, 가스에 노출된 사람들과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에 대한 집단 의료보험 등이 포함됐다. 1984년 발생한 사고의 처리계획이 20년 후에나 확정됐다는 것도 어이없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시행이 안 되거나 계속 늦춰지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델리까지 와서 정의를 호소하고 있는 보팔 사고 희생자 모임이 특히 강조한 것은 사고 이후 세대에 대한 대책이다. 사고 당시 가스에 노출된 여성 중 사산하거나 유산한 경우가 많았고, 임신 중이 아니더라도 생식기관 관련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또한 1984년 사고 당시 어린이들이 성장해 출산한 아이들 중 선천적 기형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가 잇따라 보고되면서 ‘보팔 2세대’에 대한 대책이 절실해진 것이다. 누출된 가스의 영향을 받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심장질환, 언청이, 정신지체 등의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갖는 경우가 빈번하다. 지금까지 겨우 27명의 아이들만이 수술비, 치료비 보조 등의 도움을 받았으나 이마저도 재원 부족으로 1997년 중단됐다.

아직도 쌓여 있는 유독성 물질 지하수 오염

선천적 장애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부모 세대가 가스에 노출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스 사고 당시 오염된 식수원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많은 환경학자와 역학조사 팀들은 지적한다. 또한 아직도 쌓여 있는 엄청난 분량의 유독성 환경 폐기물은 여전히 지하수와 지표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보팔의 식수는 수은, 납, 클로로포름 등의 유해물질을 기준치 이상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중금속은 수유 중인 여성들의 모유에서도 발견된다. 최근 인도 정부는 폐기물 386t을 안전하게 폐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보팔 피해자 단체들에 따르면 이 양은 전체 유해물질 가운데 5%에 불과해 해결할 문제는 산 넘어 산이다.

당시 가스 누출의 원인에 대해 피해자와 인도 정부 측은 유니언카바이드사가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규제를 느슨하게 하고 직원들의 관리교육을 소홀히 함으로써 빚어졌다는 견해다. 반면 유니언카바이드 측은 누군가의 사보타주에 의한 사고라며 맞서고 있다. 아직도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므로 결론짓기는 어렵지만 어느 쪽이든 한 가지는 자명하다. 생명의 소중함을 경시하는 인간이 스스로 몰고 온 인재(人災)라는 점이다.

보팔에서 델리까지 740km를 행진해 와서 석 달째 시위, 농성을 벌이고 있는 피해자 가족들은 정부청사 앞에 진을 치기도 했고, 총리 관저로 진입을 시도하다 만모한 싱 총리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담은 혈서를 전달했다. 결국 5월 말 이들은 피해자 구제와 사고지역 복구라는 ‘원칙적 합의’에 도달했으나 얼마나 빠른 속도로, 얼마나 효율적인 구제가 시행될지는 미지수다. 구체적인 구제 조건이 합의될 때까지 보팔 피해자들은 델리에서 피해사진전을 비롯한 각종 문화행사를 벌이며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주간동아 2008.07.01 642호 (p24~25)

델리=이지은 통신원 jieunlee33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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