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2

2008.07.01

훔친 2억원 물 쓰듯 도둑 생애 최고의 순간

강남 현금수송차량 탈취범의 3주일 … 외제차 사고 특급호텔 묵으며 럭셔리 도피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8-06-23 1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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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훔친 2억원 물 쓰듯 도둑 생애 최고의 순간
    5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각 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했던 사건 중 하나는 서울 강남 현금수송차량 탈취 사건이었다. 그동안 현금수송차량을 노리는 사건은 가끔씩 발생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사기 등 전과 16범의 범인이 다름 아닌 현금수송차량의 경비를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특히 범인이 부산 톨게이트에서 택시 트렁크에 타고 유유히 검문 경찰을 따돌리는 화면이 TV 뉴스 등에 방영되면서 범인의 신상과 독특한 행보에 국민적 관심이 모아졌다. 무려 3주 동안 경찰 수사망을 피해 다니며 현금수송차량에서 빼낸 2억6000여 만원을 은닉하지 않고 탕진한 행보에 입이 벌어지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범인이 검거되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 현재 이 사건은 검찰에 송치돼 추가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과연 6월6일 검거되기까지 범인 허모(38) 씨는 무엇을 했을까? 범상치 않은 3주간의 행적, 범인 나름대로는 ‘생애 유일했던 호화로운 순간’을 담당 수사진의 말을 통해 재구성했다.

    허씨는 5월1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편의점에서 동료 직원들이 돈을 채워넣는 사이 현금수송차량을 그대로 몰고 도주했다. 당연히 수송 경비업체에 신고가 들어올 것을 알아챈 허씨는 범행 직후 수송차량을 버린 채 현금만 갖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생 용돈으로 1200만원, 애인 부모에게 8000만원 빚 갚아



    택시를 잡아탄 그가 찾은 곳은 중고차 매매단지.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자면 새로 차를 구입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보통 매매시장이 아닌 양재동 오토갤러리 전시장을 찾았다. 중고 수입차 매장이 모여 있는 곳이다. 한시가 급한 처지였건만 허씨는 화려한 전과 경력답게 평소 타보고 싶은 차까지 둘러보는 여유를 보인 것.

    허씨는 한 매장에 들러 그토록 타고 싶어했던 BMW 335i 차량을 구입했다. 이 차는 영화나 뮤직비디오에 자주 등장하고, 실제로 연예인들도 다수 소장한 인기 스포츠 세단.

    차값이 새 차 가격과 거의 비슷한 7000만원 수준이었지만 허씨는 등록비 500만원과 보증금 300만원을 포함한 7700만원을 거리낌 없이 현금으로 지불하고 차를 샀다. 고급 외제차를 선택한 것은 본인이 타보고 싶던 차이기도 했지만 ‘설마 급박한 도주 와중에 외제차를 샀을까’라는 상식을 역이용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꿈에 그리던 차를 자신 명의로 구입한 허씨는 부모에게서 예전에 빌린 80만원을 갚고, 그야말로 ‘근사하게’ 서울 외곽으로 도주 행각을 벌였다. 고가 브랜드 옷도 구입했고, 고급 뿔테안경까지 맞췄다. 친동생에겐 1200만원을 선뜻 내줬고, 술집에 밀린 외상값 300만원도 말끔하게 처리하는 등 인심을 썼다.

    그러던 중 5월19일 방송과 신문에 자신의 범죄행각과 함께 외제차 구입 사실이 보도되자 허씨는 곧바로 서울 정릉에 차를 버린 뒤 구로역으로 향했다. 구로역은 지방 손님을 태우려는 서울 영업용 택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대표적인 역이다. 허씨는 100만원을 주고 한 택시 운전기사를 매수해 부산으로 향했다.

    사실 경찰은 허씨의 외제차 구입 사실을 공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정보가 새나가 언론에 보도됐고, 허씨는 보도를 접하고 다른 방법으로 도주하면서 신속한 검거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록 구로역에서의 행보가 경찰에 노출되긴 했지만 허씨는 택시 트렁크에 숨어 운전기사의 휴대전화로 경찰의 검거 정보를 파악하는 기지를 발휘해 추격을 따돌리고 부산 진입에 성공했다.

    부산의 한 고급 호텔에서 1박을 한 허씨는 단골로 다니던 단란주점 직원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했다. 혼자 묵을 방을 알아봐달라고 한 것. 업소에서 매너 좋기로 소문났던 탓에 직원은 선뜻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방을 수소문해줬고, 허씨는 애인의 친구 이름으로 계약을 맺고 10일간의 잠행에 들어갔다.

    음식과 생필품을 수백만원어치 사놓고 열흘간 원룸에서 칩거하던 허씨는 부산지역에서 검문이 강화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단란주점 직원의 매그너스 승용차를 빌려 서울로 잠입한 허씨는 이때부터 애인과 밀애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교묘히 서울 동부지역에서 한강을 아래위로 끼고 있는 고급 호텔만 골라가며 은신을 시도했다.

    허씨는 6월1일부터 2박3일간 서울 송파구 석촌동 소재 레이크호텔 스위트룸에서 묵었다. 이곳은 석촌호수와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를 조망할 수 있는 곳. 40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3일간 풀서비스를 받으며 은신한 허씨는 공교롭게도 묵었던 호텔 앞 석촌호수 건너편의 잠실 롯데호텔에 그야말로 럭셔리하게 다음 ‘여장’을 풀었다. 하루 숙박비만 40만~50만원인 이곳에서 허씨는 무려 3박4일간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허씨의 행각은 결국 6월6일 막을 내렸다. 롯데호텔에서 나와 역시 1등급 호텔인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하고 애인과 근교에서 데이트를 즐긴 그는 룸으로 돌아오다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 검거됐다. 지갑에 100만원, 주머니에 300만원, 그리고 가방에는 2000만원의 현금만 남긴 채.

    훔친 2억원 물 쓰듯 도둑 생애 최고의 순간

    허씨는 탈취한 돈으로 고급호텔에서 생활하며 BMW 335i 차량도 구입했다(왼쪽).허씨는 부산으로 도주할 당시 택시 트렁크에 은신해 경찰을 따돌렸다.

    사건 담당인 강남경찰서에 혼인빙자간음으로 고소되기도

    경찰 조사 결과 허씨는 행방이 묘연했던 중 8000만원을 애인의 부모에게 준 것으로 확인됐다. 왜 그랬을까? 놀랍게도 애인의 부모는 허씨를 혼인빙자간음과 사기 혐의로 고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허씨는 주유소 직원이던 애인을 만나 사귀면서 애인 부모에게 주식 투자해 돈을 벌어주겠다며 8000만원을 받았는데 갚지 않았다”며 “애인 부모 쪽에서는 정식으로 인사까지 했음에도 허씨가 결혼 의사를 보이지 않고, 돈도 갚지 않자 경찰에 고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고소사건은 다른 경찰서에 접수됐다가 5월7일자로 강남경찰서로 이첩됐다. 결국 허씨는 강남경찰서에서 피고소인 조사를 받을 수 있는 처지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사건 직후 강남경찰서 형사들조차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허씨는 강남경찰서 관할 지역에서 현금을 탈취해 애인 부모에게 돈을 갚았고, 애인 부모는 곧바로 고소를 취하해 사건은 종료됐다. 결과적으로 한 경찰서에서 혼인빙자간음 및 사기 혐의자가 절도 혐의자로, 그것도 피의자 스스로 자신의 혐의를 선택한 웃지 못할 해프닝을 연출한 셈이다.

    빚을 갚고 꿈에 그리던 호화생활을 즐기기엔 3주라는 시간이 너무도 짧았을까. 가방에 남겨진 2000만원이 허씨가 계획한 또 다른 행보를 짐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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