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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천국|데이비드 매켄지 감독의 ‘할람 포’

상처받은 18세 청년 회색빛 성장드라마

  •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상처받은 18세 청년 회색빛 성장드라마

상처받은 18세 청년 회색빛 성장드라마
영국의 북동부 광산에서 발레리노를 꿈꾸던 앳된 소년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이제는 훌쩍 커버린 청년을 만나 청년은 무엇으로 사는지 물었더니, 역시 바람구두를 걸쳐 신고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야 마땅하다는 대답이 메아리로 돌아온다.

여기, 대학도 친구도 거부한 채 성인의 문턱에서 그 책임을 유예받은 18세 청년이 있다. 등 뒤에 망원경을 숨기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힐끗힐끗 훔쳐보는 할람 포. 어머니 자리를 대신한 새어머니가 질식할 듯 밉다가도 불현듯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싶다는 충동에 어찌할 바 모르는 젊은 사내. 청년은 어느 날 어머니와 꼭 닮은 여자를 만난다.

고전적 오이디푸스…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

데이비드 매켄지 감독의 ‘할람 포’는 고전적인 드라마다. 수줍은 청년의 관음증, 아버지 몰래 젊은 새어머니와 교감하는 성적 욕망, 스치는 여인의 손길에도 부르르 떠는 젊음의 관자놀이. 게다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까지. ‘할람 포’는 심리 드라마가 갖춰야 할 것은 죄다 갖췄다. ‘페드라’와 ‘싸이코’에서 이미 다뤘던 이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드라마가 어찌하여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탔단 말인가.

‘영 아담’으로 데뷔했고, ‘어사일럼’으로 베를린에 초청된 데이비드 매켄지는 특유의 시적 이미지와 탄탄한 캐릭터로, 그리고 정통적인 드라마투르기로 승부수를 던진다. 할람이 새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새어머니가 할람의 바로 그곳을 잡아채고 싸우다 갑자기 서로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는 장면이나, 결국 그토록 미워하던 새어머니를 물가로 끌고 가며 벌이는 애증의 양가성은 데이비드 매켄지가 영원한 프로이트의 팬이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을 만큼 관능적이다. 전작 ‘어사일럼’에서 다른 장면은 다 덮어두고라도, 남편과 아이가 있는 의사 부인이 정원에서 남편의 환자와 벌이는 정사만큼은 백만 볼트의 강력함으로 연출한 그였다.



그런 만큼 할람이 집을 나와 무작정 에든버러로 간 후 만난 케이트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케이트는 할람의 상징적인 어머니요, 할람이 케이트를 훔쳐본다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시각적 퇴행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에 케이트는 할람이 자신을 훔쳐본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유부남인 호텔 매니저보다는 할람의 순수한 구애에 마음이 더 움직인다. 그러고는 서로의 은밀한 그곳을 지칭하는 말을 내뱉으며 한발 한발 서로에게 다가간다.

가장 은밀한 부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성기를 지칭하는 단어를 발설한 두 사람은, 이제 세상의 모든 관습을 거스를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싸이코’의 살인마 노먼 베이츠와 달리, 할람은 자신을 분열시키는 파국을 넘어서 종국에는 성장의 길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화가 날 땐 커다란 동물가죽을 뒤집어쓰고 원시적 자아로 세상에 맞서 싸우지만, 또한 웨이터 일도 배우고 케이트와 지붕에서 함께 세상을 훔쳐보기도 한다. 노먼 베이츠와 동일한 호텔업에 종사하지만, 다행히 그는 어머니 옷을 떨쳐입고 손님에게 식칼을 휘두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사실 영화를 보다 보면 데이비드 매켄지의 영화가 늘 그렇듯 스릴러적 요소가 없지는 않다. 첫 장면부터 언급되는 할람 어머니의 죽음은 타살인지 자살인지 석연치가 않다. 할람은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사인을 조사하고 있었던바, 커피에 치사량의 약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나 배에서 발견한 망치 등으로 어머니의 타살을 굳게 믿는다. 그런 만큼 분노와 광기를 밑천 삼아 부모 살해라는 금기의 선을 훌쩍 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감독은 가부장제에 위협이 되는 할람 Foe(영어로 ‘원수’라는 뜻), 즉 가부장제의 원수가 될 수 있는 포를 히치콕식으로 위협하는 대신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특히 케이트와 행복한 첫 경험을 나눈 후 복도에 놓인 가방 위로 팔짝팔짝 뛰는 장면은 그 옛날 ‘에덴의 동쪽’의 제임스 딘이 뛰던 장면에 버금가게 사랑스럽다. 스릴러 공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할람 포’는 성장 드라마의 빛 속에 무게추를 더 얹는다.

상처받은 18세 청년 회색빛 성장드라마

‘할람 포’의 주인공 제이미 벨은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소년이었다. 탄광촌에서 발레리노를 꿈꾸던 소년은 강렬하고도 우울한 눈빛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영화 속 황량한 풍광 강렬한 인상

게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늘 스코틀랜드에서 영화를 찍는 데이비드 매켄지의 손이 빚어내는 황량한 풍광 또한 할람의 내면을 대변하는 듯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약간 음산하면서도 푸른 회색빛이 감도는 스코틀랜드의 하늘은 세상에서 유폐되고 상처받은 이의 진물을 모두 받아줄 것처럼 풍부한 시적 이미지를 선사한다. 특히 영국 최고의 인디 레이블 도미노 소속의 싱어들이 부르는 16곡의 주옥같은 노래는, 할람을 대신해 관객들에게 촉촉한 상실감과 부드러운 희망의 결을 그대로 전달해준다.

여기에 비로소 제이미 벨이 가세하는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에 이어 그는 다시 한 번 상처받은 청년의 내면을 강렬한 눈빛 연기로 펼쳐 보인다. 사랑에 굶주린 듯한 이 청년의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모성애를 끌어내는 구석이 있다. ‘그저 잠만 자고 남들에게 자랑하겠다’며 케이트 옆에 몸을 누이는 청년의 온기 어린 순수함. 제이미 벨이 있기에 관객은 왜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청년에게 연상의 여인 케이트가 이끌리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제이미 벨은 할리우드 영화 ‘점퍼’에 출연한 것보다 이런 영국 드라마에서 연기력을 담금질하는 것이 100배 나은 선택이라 여겨진다).

대니 보일의 강렬함이 조금은 부담스러워졌을 때, 켄 로치의 숭고한 이상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때 ‘할람 포’를 보자.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육체의 교집합을 바탕으로 강렬한 도발을 일삼는 조금은 진부한 데이비드 매켄지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스코틀랜드의 낮은 회색빛 하늘 아래 숨겨진 감각의 제국 어느 언저리에서.



주간동아 2008.05.06 634호 (p76~78)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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