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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AGE

“네 탓이오 하시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봐”

인권교육 위해 열린 새내기 검사들의 역할극 체험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네 탓이오 하시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봐”

  •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 보니 어떤 상황이든 내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많이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때로는 좀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 자신까지도 객체로 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생각해야겠다.”
“네 탓이오 하시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봐”

올해 초 새로 임명된 검사들이 4월 22일 범무연수원 강당에서 ‘역할극’ 을 하고 있다.

봄비가 오락가락하던 4월22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에 자리한 법무연수원에서 색다른 집단 ‘역할극’이 펼쳐졌다. 연극에 나선 이들은 올해 2월 말과 4월 초 임명된 ‘새내기 검사’ 53명. 법무부가 인권교육의 일환으로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법무부 인권옹호과 엄재상 사무관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중요성을 체험하게 해 향후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성숙된 인권 마인드를 갖출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임검사들이 맡은 역할은 ‘회유형’ ‘비난형’ ‘초(超)이성형’ ‘산만형’등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다. 검사 본인은 물론 사건을 조사하면서 만나게 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회유형은 모든 갈등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자기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갈등 상황을 빨리 종료하려는 유형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속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서 내면에 분노가 쌓이는 위험성이 있다.

비난형은 모든 갈등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유형이다. 이들은 자신이 먼저 비난하지 않으면 갈등 상황의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초이성형은 감정에 빠지지 않고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려는 유형이다. 전문용어를 섞어 길게 설명하는 것을 즐기는데, 이들은 감정에 휘말리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산만형은 갈등을 일으킨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해 상황을 모면하려는 유형이다. 이를 위해 대화 중에 화제를 바꾸고 이유 없이 웃는 등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역할극 시나리오상 설정된 무대는 무허가 2층 연립주택. 등장인물은 위층에 사는 남자 고시생과 아래층에 사는 여자, 건물 주인, 이웃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관 등 네 명이다. 갈등을 유발한 요인은 층간 생활소음이다.

연극은 전문 연극배우들의 시범연기로 시작됐다. 배우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나름의 상황을 부여했다.

위층 고시생은 매번 시험에서 낙방하자 아내가 애를 남겨두고 집을 나가버렸다. 장인은 그만 고시를 포기하고 차라리 요리사 자격증이나 취득하라고 성화다. 여기에 아래층 여자까지 스트레스를 준다. 애가 뛰어다닌다거나 너무 시끄럽다고 경찰에 신고하는가 하면, 여차하면 올라와 항의하고 협박을 일삼는다. 그러다 보니 이제 화장실 볼일을 보고서도 변기 물을 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예민해졌다.

아래층 여자는 10년째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도는 시간강사다. 수입이 변변치 않아 백화점에서 노래교실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내일모레면 마흔. 어떻게 전임강사 자리라도 얻으려면 내일 아침까지 포트폴리오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애 울음소리 등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네 탓이오 하시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봐”
객관적 시각으로 갈등의 본질과 배후 파악 필요성 느껴

어릴 때 가출한 건물 주인은 다방을 전전하면서 모은 돈과 은행 대출을 받아 어렵사리 이 건물을 장만했다. 주인은 대출 부담이 너무 크자 관할 행정기관 몰래 2층으로 증축해 전세입자를 받았다. 세입자끼리 마찰을 빚어 시끄러워지면 자칫 불법사실이 드러나 행정처분을 당할 수도 있기에 전전긍긍한다.

관할 지구대 순경은 경찰 경력 20년차다. 아직도 직급이 순경인 것은 뇌물수수 전력으로 강등됐기 때문.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요즘도 가끔씩 뇌물을 받는다. 신고가 들어온 연립주택 주인한테서도 돈을 좀 받았다. 불법사실을 눈감아달라는 청탁과 함께.

새벽 2시. 아래층 여자가 건물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위층 소음을 또다시 문제 삼으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건물 주인은 엉뚱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려 하지만 아래층 여자의 집요한 요구에 위층 고시생을 찾아간다. 건물 주인의 만류에도 고시생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여자에게 사과를 한다.

하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된다. “죄송하다”는 고시생의 사과를 아래층 여자가 “진짜 죄송한 게 맞냐”며 시비를 건 것. 싸움은 격화되고 이웃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기에 이른다. 경찰관은 갈등 해소에는 관심도 없이 “원칙과 규칙에 따라”를 강조하면서 주민등록번호와 나이, 직업 등을 캐묻는다. 전문 연극배우들의 시범연기는 여기까지다.

등장인물들의 유형은 확연히 구분된다. 위층 고시생은 회유형, 아래층 여자는 비난형, 건물 주인은 산만형, 경찰은 초이성형이다.

“네 탓이오 하시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봐”
검사마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달랐다. 고시생을 답답해하거나 아래층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검사가 있는 반면, 산만한 건물 주인이 가장 거슬렸다는 검사도 있었다. 검사들은 바로 이들의 역할을 직접 맡아보기도 하고, 유형을 바꿔가면서 역할에 변화를 줬다. 중간중간에 ‘아이가 아프다’거나 ‘애인에게 이별을 당했다’ 등 새로운 상황을 설정해 더욱 절실한 입장이 돼보기도 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는 역할극은 검사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했다.

김도연(30·군법무관 34기) 검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 보니 어떤 상황이든 내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많이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상문(29·사시 37기) 검사는 “때로는 좀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 자신까지도 객체로 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생각해야겠다”고 말했다.

김중(30·군법무관 34기) 검사는 “갈등의 본질이나 배후는 당사자와 상황을 모두 분석해야 답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검사(여)는 “남들이 하는 역할극을 보니 각자의 입장이 잘 이해되면서도, 왜 저게 해결되지 않을까 답답한 면이 많았다. 앞으로 현실에서도 그런 갈등이 생기면 더 적절히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초임검사들을 대상으로 올해 처음 실시된 역할극이 검찰 내부의 인권의식을 얼마나 향상시킬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주간동아 2008.05.06 634호 (p34~35)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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