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2

2008.04.22

공고 따로 채용 따로 ‘엇박자 고용’

법 지키느라 성별·나이 제한 없이 접수 … 사실상 커트라인 정해놔 헛수고 지원자 양산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8-04-14 1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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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고 따로 채용 따로 ‘엇박자 고용’

    서울여대의 한 학생이 2월15일 졸업식을 마친 뒤 취업정보 게시판을 보며 채용공고를 확인하고 있다.

    “우리도 미안하죠. 한 가닥 희망을 기대하고 이력서를 내는데 검토조차 않으니…. 법률로 정해놨으니 따를 수밖에요.”

    중소기업 인사부장 김모(45) 씨는 최근 ‘찜찜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넋두리했다. 사연은 이랬다. 컴퓨터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이 회사는 마케팅 사원 채용공고를 내면서 성별 ‘무관’, 연령 ‘무관’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회사가 필요한 인력은 남성이었고, 나이도 32세 이하 직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매일 인터넷과 우편으로 수십 통의 이력서가 날아드는데 죽겠더라고요. 여성 지원자 이력서는 보지도 않고 ‘딜리트(delete·삭제)’했습니다. 그것도 일이었습니다.”

    한 건축 설계·설비 회사도 최근 채용공고를 냈다. 필요한 인력은 1977년생 이하 대리급 여성. 팀장이 여성이고 74년생이라 그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 사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채용공고에는 ‘더블 무관’(성별·연령 무관)이라고 했다. 이 회사 오모(55) 사장은 “‘건축 관련 전공자 우대’라고 했더니 남성 지원자가 훨씬 많이 지원했어요. 전체 지원자 중 90%나 됐는데 아예 채용대상이 아니었죠. 건축 분야는 남성 종사자가 많아 당연히 남성을 많이 뽑을 거라 생각한 것 같아요. 정작 필요한 여성 지원자는 적어서 뽑지도 못했어요. 답답한 노릇이죠”라고 허탈해했다.

    구직자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 올해 4년제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김지훈(30) 씨는 4월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우수기업 채용박람회를 찾았다고 했다. “상담 부스에서 채용 담당관과 직접 얼굴을 보면서 상담할 수 있고 현장에서 당락 분위기도 알 수 있어 마냥 (이력서를 보내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속이 편했죠.”

    3월 한 달간 그가 제출한 이력서는 30여 통. 이중 10여 곳을 확인한 결과 5곳은 그를 구직자로 맞을 준비가 안 된 회사였다. 채용공고에는 ‘성별과 연령은 관계없음’이라고 했지만, 5곳의 회사에선 자체적으로 ‘여성’이나 ‘만 28세 이하’ 구직자를 원했다. 채용 대상이 아니어서 심사 대상도 될 수 없었다. 김씨는 “그럴 줄 알았으면 그(이력서 작성하고 제출하는) 시간에 (입사) 가능성이 있는 회사에 더 공(功)을 들이는 건데…”라며 아쉬워했다.



    왜 이처럼 ‘엇박자 고용’이 생기는 걸까. 기업 인사담당자와 채용업체 등은 채용 시 성별과 나이 제한을 둔 ‘법(法)의 함정’을 1순위로 지적한다.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를 보장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과 연령차별 철폐를 기치로 내건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일률적으로 성별과 연령 차이를 인정하지 않아 오히려 ‘고용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는 근로자의 모집 및 채용에 있어서 남녀를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제7조 모집과 채용)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은 지난해 12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로 개정돼 6월22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9회 개정을 거치면서 처벌 규정을 강화해 대다수 기업들은 성별 ‘무관’으로 채용공고를 하고 있다.

    물론 △직무 성격에 비추어 특정 성(性)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경우 △근로여성의 임신 출산 수유 등 모성보호를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경우 △적극적 고용개선 조치를 취하는 경우(제2조)라는 예외 규정도 뒀다. 하지만 이 조항은 기업 처지에선 말 그대로 ‘예외’라고 한다.

    공고 따로 채용 따로 ‘엇박자 고용’

    기업들의 내부 인사 카드. 성별과 나이에 이미 ‘커트라인’을 정해놓았다. ‘더블 무관’으로 공고한 기업은 “필요 인력이 전문기술 인력이라 채용이 쉽지 않다. 커트라인이 필요 없는 직종”이라고 밝혔다.

    일률적 법 적용이 고용 효율성 떨어뜨려

    “2월에 비서직 2명을 뽑았는데 채용공고 성별란에 ‘무관’이라고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계기관에 문의하니 ‘직무 성격에 비춰 여성을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아니라는 거예요. 남성도 비서직을 할 수 있지만 회사가 원하는 인재는 여성이라 결국 여성을 뽑았습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인 셈이죠.”(중소기업 인사부장 D씨)

    이 회사에 지원한 70여 명 중 40여 명의 남성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 꼴’이 됐다.

    나이 제한 금지를 명시한 ‘고령자고용촉진법’은 3월21일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개정 공포돼 내년 3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개정 법률에는 채용부터 해고까지 고용 전 과정에서 연령차별 금지를 규정하고 시정명령 규정과 벌칙 등을 신설했다. 노동부 서호원 사무관은 “기존 법률이 나이 차별을 금지하라는 ‘선언적 의미’를 지녔다면, 개정 법률에서는 벌칙 규정을 신설해 ‘실행적 의미’로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법이 시행되면 나이 제한을 한 기업은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당연히 기업들은 바빠졌다. 한 보험회사 간부는 “지난달 채용공고에선 나이 제한을 28~35세로 명시해 회사가 원하는 나이대의 인재를 많이 뽑을 수 있었는데 내년부터는 어떻게 할지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은행 인사담당자는 “은행 텔레마케터의 경우 대부분 20~40대 여성들을 뽑는데 개정 법률이 시행되면 고령자와 남성 구직자들이 ‘괜한 수고’를 할 것 같다”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이런 ‘엇박자 고용’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서 훨씬 심각하다고 한다. 대기업은 기업 브랜드(인지도)가 있어 공고를 내면 우수한 인재들이 몰리지만 중소기업의 경우 어렵다는 것. 결국 ‘이중 플레이’와 ‘편법 힌트’라는 고육지책(苦肉之策)까지 등장했다.

    일부 중소기업들이 채용사이트 등에는 ‘더블 무관’으로 공고하고도 실제로는 헤드헌터 업체 등에 성별과 연령을 명시해 원하는 인재를 찾는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중소기업 임원은 “‘더블 무관’으로 채용공고를 하면 이력서는 꽤 날아들지만 회사가 원하는 연령대와 성별은 따로 있어 ‘그림의 떡’”이라며 “헤드헌터 업체는 회사가 요구하는 인재를 정확한 시기에 공급해줘 선호하는 편”이라고 털어놨다. 회사 처지에선 이중으로 채용 비용을 내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채용사이트 광고는 ‘줄광고’ 3만3000원(부가세 포함), 배너 광고나 박스 광고에는 수백만원이 든다고 한다.

    기업은 ‘채용공고 따로, 업체 의뢰 따로’라는 이중고를, ‘영문을 모르는 지원자’는 합격 소식만 기대하고 있는 셈이다.

    웃지 못할 편법행위도 이뤄지고 있다. 중소기업 H사는 최근 ‘성별 무관’으로 채용공고를 내면서 괄호를 넣었다. ‘(체력이 튼튼하고 건장한 사람)’. 남성을 뽑는다는 힌트다. 또 다른 회사는 ‘(표준어를 구사하고 세련된 매너를 갖춘 자)’라며 여성들의 눈썰미를 기대했다.

    H사 인사담당 부장은 “성별이나 나이를 제한하면 누리꾼(네티즌)이나 여성단체 등에서 항의하거나 관할 지방노동청에서 지도점검을 나오는 경우도 있다”며 “기업 이미지와 회사가 필요한 인재를 모두 고려해 ‘힌트 방법’이라는 고육지책을 짜낸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실제 노동부는 지난해 1359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고용평등 및 모성보호 지도점검’을 한 결과 1112개 사업장에서 2864건의 위반 건수를 적발했다. 이 가운데 모집채용 차별은 114건이었다(표 참조).

    여성·고령 실업자 채용 기업에 인센티브 주는 식으로 정책 바뀌어야

    그렇다면 ‘법의 함정’을 메울 묘수는 없을까. 한 헤드헌터 업체 대표는 “법의 취지는 맞다. 하지만 기업 처지에선 승진, 인사 등을 고려해 상사보다 나이가 적거나 특정 성(性)을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것보다 여성이나 장기·고령 실업자를 채용하는 기업 등에 인센티브를 줘 고용을 적극 유발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 중소기업 인사담당자는 “공무원이나 공기업, 대기업은 무리가 없겠지만 중소기업은 사업장 규모에 따라 제한을 차등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동부 서 사무관은 “법을 운용하면서 지방노동청에 접수된 기업들의 진정 내용과 애로사항을 확인해 보완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고용평등 및 모성보호 지도점검 결과 (단위 : 건수)
    연도 2007
    대상 사업장 수 1,359
    위반 사업장 수 1,112
    총 위반건수 2,864
    위반 내용 임금 차별 9
    임금 외 금품 차별 15
    근로시간 제한 246
    모집 채용 차별 114
    배치 승진 차별 11
    정년(퇴직) 차별 4
    성희롱 관련 565
    모성보호 규정 미비 등 145
    고충처리 기관 미설치 등 40
    기타 1,715
    2,864
    조치 내용 시정 2,845
    과태료 7
    사법처리 11
    시정 중 1
    2,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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