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2

2008.04.22

재계 총수들 “세일즈 외교 백댄서 No”

MB 訪美 면제받은 4대 그룹 “휴~” … 해외출장 등 활발한 경영 행보 예정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입력2008-04-14 14:2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재계 총수들 “세일즈 외교 백댄서 No”

    4월5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동 재정경제비서관실로 들어가고 있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저희 회장께서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기에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답니다. 대기업에게 4월은 사실상 한 해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주주총회를 마친 다음 새 사업계획에 따라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때죠. 이때 총수가 업무 공백을 가지면 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4대 그룹의 한 핵심 임원은 이번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서 총수가 제외된 데 대해 이같이 반색했다. 그룹 회장이 대통령과 동행한다면 단순히 업무 공백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전 준비와 사후 조처 등으로 번거로운 일이 엄청나게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전 준비로는 미국의 업계 파트너와 면담 일정을 잡아야 하고, 언론에 발표할 만한 ‘가시적 성과’를 미리 챙겨놓아야 한다. 과거엔 대통령의 해외 방문에 회장이 따라가는 바람에 가끔 졸속성 양해각서(MOU)가 체결되기도 했다. 현지에 나가 있는 계열사 임직원들이 대거 동원돼 정부 관계자들을 뒷바라지하느라 혼쭐나는 것은 다반사였다. 사후 조처에 대해서도 청와대가 자꾸 요구하는 바람에 알맹이 없는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고 한다.

    4월15일부터 4박5일간 이뤄지는 이 대통령의 미국 공식 방문 시 따라가는 공식 수행원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이태식 주미대사 내외, 사공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대통령 경제특보, 김태영 합참의장,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김병국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중수 경제수석 등 13명이다. 경제인은 경제5단체장을 포함해 26명으로 결정됐다.

    김은혜 청와대 부대변인은 수행단 명단을 발표하는 브리핑에서 “기업인의 비즈니스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투자설명회 등 현지 행사와 관련이 있거나 현지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기업을 중심으로 하되 분야별 업종별 대표성을 감안했다”고 밝힌 바 있다.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을 첫 방문했을 때는 공식 수행원이 16명, 경제인은 31명이었다. 이번에는 4대 그룹 총수가 빠져 외양을 중시했던 과거와 달리 업무 중심의 수행단 구성에 주력했다는 게 청와대 측 설명이다. 이 대통령이 ‘바쁘신’ 4대 그룹 총수를 굳이 동행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함에 따라 이들이 명단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인 가운데 경제5단체장을 비롯해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김윤 삼양사 회장,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등은 구체적인 업무 추진을 위해 참가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일 기업 대표로는 무역협회 국제무역위원장인 유진 풍산그룹 회장, 무역협회 FTA 특위위원장인 문희정 남영산업 사장이 참여한다.



    분야별 대표로는 백종진 벤처기업협회 회장, 안윤정 여성경제인협회 회장, 윌리엄 오베린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회장이 포함됐다. 중소기업 대표로는 반원익 씨마텍 사장과 강호갑 신영금속 사장이 간다. 금융인 참가자는 나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김남구 한국투자증권 부회장, 신창재 교보생명보험 회장, 강정원 국민은행장,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박해춘 우리은행장 등이다.

    경제5단체장 등 26명 동행

    이 대통령은 미국에 이어 4월20~21일에는 일본을 공식 방문한다. 구본무 LG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대기업그룹 회장이 미국에는 가지 않지만 일본 방문에는 합류할 예정이다. 이동관 대변인은 이와 관련해 “이 대통령이 21일 일본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이 주최하는 오찬 행사에 참석하는데, 이분들은 한국의 전경련 회원사 대표 자격으로 이 자리에 함께할 예정”이라면서 “일본은 가까운 데다 현안이 있기 때문에 미국 방문길에 같이 가지 않은 대기업 회장들이 동행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재계 총수들 “세일즈 외교 백댄서 No”

    대통령 방미 수행을 ‘면제’받은 재벌 총수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부터).

    또 다른 일본 현지 합류 대상자는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최용권 삼환기업 회장, 강영원 대우인터내셔널 사장, 이성철 에스맥 사장, 이환용 디지텍시스템스 사장, 최규옥 오스템임플란트 사장, 양윤선 메디포스트 사장 등이다.

    미국 동행 부담을 ‘면제’받은 재계 인사들은 안도하며 각자 바쁜 국내외 일정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특검 수사를 받느라 대외 활동에 참여하기 곤란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대신에 그룹을 대표하는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당초 미국행 명단에 포함됐다. 하지만 4대 그룹 회장을 빼라는 이 대통령의 지시 덕분에 자유로운 몸이 된 윤 부회장은 16일부터 일주일간 유럽 출장을 간다.

    구본무 회장은 내년 투자 계획 일부를 올해로 앞당겨 집행하기로 하면서 구체적인 실행 일정을 구상하느라 고심하고 있다. 올해 투자 규모는 11조2000억원으로 잡았다. 정몽구 회장은 중국 베이징 제2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고, 8일 귀국해 총선에 투표한 뒤 국내 그룹 경영 상황을 점검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노사 대표 34명이 11일 울산공장에 모여 공장 간 생산물량 불균형과 이에 따른 임금 격차 문제를 논의하는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최태원 회장은 10~13일 중국 하이난 섬에서 열리는 보아오 포럼에 참석한다. 이 포럼은 2002년 아시아 지역 국가들이 아시아의 공동 번영 방안을 찾기 위해 창설한 것으로 ‘아시아의 다보스 포럼’이라 불린다. 이번 포럼의 주제는 ‘녹색 아시아, 변화를 통한 공동 번영’인데 최 회장은 포럼의 이사 자격으로 참여한다.

    재계 총수들 “세일즈 외교 백댄서 No”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2003년 5월 재벌 총수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재계 총수들로서는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에 ‘백댄서’ 역할을 하기가 탐탁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선 대통령 뒤에 우르르 따라가는 수행원 같은 모양새 때문에 정서적인 측면에서 유쾌하지 않다고 한다. 경호상 문제,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 등 의전 때문에 총수들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점도 동행을 꺼리는 요인이다. 일부 개발도상국에서는 대통령과 장관 등 고위 방문단만 챙기므로 홀대받는 기업인들은 모멸감마저 느낀다고 한다.

    2004년 9월13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러시아 및 카자흐스탄 방문을 앞두고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 해외 순방 때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기업 자체의 필요와 무관하게 기업인들을 동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면서 “수행(隨行)기업인단이라는 명칭도 바꾸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 ‘수행’ 대신에 ‘동행(同行)’이란 말이 쓰이고 있기는 하다.

    당시 대통령을 따라간 재계 인사는 무려 50여 명에 이르렀다. 이건희 회장, 구본무 회장, 정몽구 회장 등 ‘오너 빅3’와 강신호 전경련 회장 등 경제5단체장이 포함됐다. 그때 청와대가 거의 일방적으로 수행기업인단 명단을 발표하는 바람에 일부 기업인들은 비행기 티켓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각자 떠나기로 했기에 항공편이 적은 카자흐스탄행 표를 구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이들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미니버스를 타고 단체 이동했고, 회합장소에 미리 가서 한두 시간 대기하는 등 푸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국과 밀접한 거래 업체만 골라야

    청와대에 오래 출입하며 대통령 해외 순방 때 여러 번 취재를 한 바 있는 한 기자는 “말레이시아에서는 밤에 호텔에서 재계 인사들을 불러 예정되지 않았던 술자리를 가진 적도 있었다”며 “내키지 않은 호출에 당황해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았다”고 말했다.

    물론 기업인의 수행이 나쁜 면만 있는 건 아니다. 민간기업 차원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를 대통령 방문 때 함께 가서 상대국 정부의 힘을 얻어 해결하는 경우도 있다. 한 재계 인사는 “앞으로 대통령의 해외 방문에는 상대국과 밀접한 거래관계가 있는 업체의 대표만을 골라야 한다”면서 “경영활동에 몰입해야 할 기업인이 전시성 행사에 동원되면 그만큼 경제에 마이너스 효과가 난다”고 말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