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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가 만난 따뜻한 세상 ④

행복한 세상 읽어주기… ‘천사의 목소리’

한국점자도서관 녹음 봉사자들…시각장애인 ‘눈’과 귀 역할 남다른 행복

  • 오진영 자유기고가 ohnong@hanmail.net

행복한 세상 읽어주기… ‘천사의 목소리’

행복한 세상 읽어주기… ‘천사의 목소리’
좁은 부스 안은 컴퓨터를 놓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만으로도 꽉 찬다. 방 하나를 여덟 개로 쪼갠 부스 가운데 하나로 들어가 문을 닫고 책을 펴면, 그 순간부터 이근희(53) 씨의 목소리는 누군가의 ‘눈’이 된다.

“책은 그냥 읽기만 해도 재미있잖아요. 그런데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용을 녹음해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좋아요.”

이씨는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자리한 한국점자도서관에서 6년째 녹음 봉사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다 자란 뒤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점자도서관의 녹음도서 과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바로 저거다!”라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도서관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침 도서관은 회사에서 멀지 않았다.



현재 80~90명 귀한 시간 쪼개 마이크 앞에 서



지난해 7월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는 하루 중 시간이 나는 대로 도서관을 찾았고, 요즘은 일주일에 사나흘 녹음 봉사를 하러 온다.

“하루에 두세 시간 녹음해요. 그 이상 읽으면 목소리가 잠기거든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글자 하나하나를 정확히 발음하고 문장을 또박또박 읽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책 한 권을 다 녹음해도 무슨 내용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베테랑’이 된 지금은 책 내용을 음미하면서 낭독을 즐기는 수준이 됐다.

“오늘은 김하인 씨의 ‘사랑에 미치다’를 읽었어요. 남녀 대학생의 사랑을 애틋하게 그린 연애소설이라, 마치 청춘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으로 읽었네요.”

한 시간 녹음하면 소설책 40쪽 분량의 진도가 나간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자원봉사자라면 2주일쯤 되면 책 한 권 녹음이 끝날 것 같지만, 그게 생각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도서관 편집팀에서 녹음파일을 검토해 잘못 띄어 읽은 부분, 침 삼키는 소리나 기침 소리가 들어간 부분 등을 골라내는 수정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저는 오래 한 편인데도 여전히 수정할 곳이 생겨요. 틀린 부분에 정확히 읽은 것을 덧씌워야 하는데, 때론 수정하고도 재수정해야 할 때가 있어요.”

행복한 세상 읽어주기… ‘천사의 목소리’

한국점자도서관에서 6년째 녹음 봉사를 하고 있는 이근희(오른쪽)씨.

이씨는 대사가 많은 소설이 특히 어렵다고 한다. 이왕이면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연기까지 하다 보니 금세 지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시각장애인들은 일반인보다 청각이 예민하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낭독하는 속도로 읽으면 좀 답답해해요. 약간 빠른 속도로, 그러면서도 듣는 사람이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죠.”

이씨는 “봉사활동은 자신이 건강하고 집안이 편안할 때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긴 시간 꾸준히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복받은 것이라고 했다.

“시각장애인 중에도 영어 일어 등 외국어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는 만큼, 외국어 낭독이 가능한 봉사자들이 점점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젊은이들이 자주 찾아와서 밝은 목소리로 동화를 읽어주면 더 좋겠고요.”

봉사하는 것 자체에 감사하면서 귀한 시간을 쪼개 한국점자도서관을 찾는 녹음 봉사자는 현재 80~90명이다. 녹음 봉사의 성격상 시간 제약 없이 도서관 근무시간에만 들르면 되기 때문에 다른 봉사활동보다 “부담이 없다”고 말하는 봉사자가 대부분이다.

2006년 9월 인터넷을 통해 한국점자도서관을 알게 돼 녹음 봉사를 시작한 김계향(55) 씨는 내성적이고 나이 들어 체력도 달리는 자신에게 딱 맞는 봉사활동을 찾아 기쁘다고 말했다.

“여유시간을 나를 위해서만 쓰다 보니 보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 하는 봉사활동인데, 이것을 통해 더 많은 일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한국점자도서관에서는 녹음 외에 교정, 편집 작업에도 봉사자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다른 일도 알아보려고요.”

김씨는 오전 9시30분 도서관에 와서 3시간 동안 녹음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녹음을 하면서 정독하면 그냥 눈으로 읽는 것보다 훨씬 진한 감흥을 얻는다”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초보자’들에게 “녹음 봉사는 재미도 있고 어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일이라 적극 권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1969년 설립된 한국점자도서관은 98년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 도서를 제작해오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 제작하는 DAISY(Digital Accessible Information System) 도서는 40여 개국이 사용하는 ‘유니버설 멀티미디어 콘텐츠’로, 노인이나 시각장애인 등 읽고 쓰는 일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

한국점자도서관은 한 달에 점자도서 300여 권, DAISY 도서 50~60권을 제작해 2000여 명의 도서 회원에게 우편 대출 서비스와 직접 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다. 도서관 녹음 도서팀의 오은진 씨는 “녹음 봉사는 봉사자들의 만족도가 높아 한번 시작하면 꾸준히 오래 하는 분들이 많지만 편집까지 끝나고 수정만 하면 되는데, 그 책을 녹음한 봉사자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 녹음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외국어 가능자·젊은이들 많은 참여 기대

봉사자들은 대체로 도서관 인접 지역 주민일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매주 토요일 이곳을 찾지만 휴가 중이라 평일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왔다는 김영숙(32) 씨는 한 시간 넘게 지하철을 타고 도서관에 오는 열성 봉사자다.

“봉사활동은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까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입니다.”

도서관에서 만난 봉사자들은 녹음 봉사가 “단지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기만 하면 되는 일”은 아니라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어떤 가치가 정말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닫힌 마음을 열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해줄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는 마음이 가장 소중하지 않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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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2008.01.29 621호 (p68~69)

오진영 자유기고가 ohn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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