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8

2008.01.08

우향우 2년 독일 빈부격차 ‘경고등’

메르켈 정부 겉으론 순항, 노동과 생활안정 갈수록 위협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08-01-02 1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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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향우 2년 독일 빈부격차 ‘경고등’

    2007년 12월17일자 ‘슈피겔’지의 표지. 빈부격차를 크리스마스트리로 표현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독일 정부가 들어선 지 2년이 지났다. 메르켈 정부는 우파를 표방하는 기민련과 좌파 사민당의 연립정권이지만, 추진하는 경제정책을 보면 시장과 자유경쟁을 중시하는 우파 성격의 정권에 가깝다.

    2005년 가을, 독일은 총선을 통해 ‘좌파 슈뢰더’에서 ‘우파 메르켈’로 정권을 교체했다. 슈뢰더 정부(1998~2005)의 집권 후반부는 사상 최악의 실업률과 마이너스 경제로 우울한 나날이었다. 슈뢰더 정부의 이러한 실정(失政)은 거듭된 지방의회 선거 패배라는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급기야 임기를 1년 앞당겨 시행된 조기 총선마저 패배해 연방정부의 권력까지 내주었던 것이다.

    4년 임기의 절반을 갓 지난 메르켈 정부의 성적표는 어떨까? ‘대체적으로 잘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독일병’이라고까지 불리던 고질적인 실업자 문제는 정권교체 이후 실업자가 500만명에서 350만명으로 줄어들면서 한숨 돌리게 됐다. 경제성장도 2006년 2.9%, 2007년 2.6%를 기록했는데, 이는 유럽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좋은 성적이다. 슈뢰더 시절 소원(疏遠)했던 미국 프랑스와의 외교관계도 개선된 느낌이다. 무엇보다 메르켈 총리 개인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높다. 야당과의 갈등도 없고, 정부에 대한 언론의 태도도 아직까지는 호의적이다.

    여전히 높은 국민 지지율 … 성장 열매 부유층이 독식

    그러나 조금만 속으로 파고들면 이 모든 성과가 ‘빛 좋은 개살구’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든다. 성탄절을 앞두고 출간된 12월17일자 ‘슈피겔’지 표지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실렸다. 트리 꼭대기에는 독일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장이 세워졌다. 그런데 트리 모양이 기이하다. 나무 윗부분에는 화려한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반면, 아래에는 나뭇가지만 초라하게 남아 있다.



    슈피겔 표지가 지적하는 바는 다름 아닌 날로 심각해지는 빈부격차다. 메르켈 총리 취임 이후 경기가 좋아지고 있다지만 실상 그 열매는 일부 부유층이 독식할 뿐, 서민생활은 예전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독일경제연구소(DIW)에 따르면 현재 독일 국민의 1인당 실질세후소득은 15년 전인 1992년 기준으로 10% 증가했다(물가상승분 제외). 소득 상위 10% 사람들만 놓고 보면 이들은 같은 기간 무려 31%나 소득이 증가했다. 반면 하위 소득 10%의 경우 1인당 실질세후소득이 13%나 감소했다. 그리고 이 차이는 2005년 이후 급격하게 벌어지는 추세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중산층이 두껍고 계층 차이가 심각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중산층이 붕괴하면서 영국이나 그리스처럼 ‘계급사회’로 변모하는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메르켈 정부의 우파적 경제정책을 지목하는 것은 억지가 아니다. 새로 시행됐거나 입법예고된 대다수 정책의 수혜자가 저소득층보다는 자산이 넉넉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올해부터 시행된 부가가치세 인상(16→19%)은 우유, 빵, 버터 등 생필품 물가를 뛰게 했고 전기, 가스 등 공공요금도 최근 눈에 띄게 올랐다. 그로부터 오는 타격은 서민층이 부유층보다 클 수밖에 없다.

    실업률 감소는 메르켈 정부의 중요 공적이다. 그러나 실업자 수 감소와 병행해 나타나는 현상도 주목해야 한다. ‘실업수당 및 노동조건의 악화’ 문제가 그것. 이른바 ‘하르츠 IV’라 불리는 슈뢰더 정권 말기에 단행된 실업수당제 개혁의 결과로 더는 실업수당만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이에 독일인들은 하르츠 IV를 모면하기 위해 노동시장에 몰려나갔고, 기업들은 노동력 공급 증가를 기회 삼아 기존 정규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워넣기 시작했다.

    ‘슈피겔’은 질케 클라홀츠(Silke Klarholtz)라는 36세 여성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는 ‘유렉스(Jurex)’라는 배송회사의 비정규직 직원이다.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일 400km 정도를 달리며 우편물을 배달하는 그가 받는 월급은 1436유로(약 195만원). 세금과 각종 공과금을 제외하면 1020유로가 남는데, 실제 그의 지갑으로 들어오는 돈은 785유로에 불과하다. 나머지 235유로를 회사가 자동차 사용료 명목으로 떼어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성탄절 보너스도 없다. 연금도 고용보장 장치도 없다. 클라홀츠 남편의 근로조건도 아내보다 나을 게 없다. 도축장 경비원으로 일하며 시간당 7.67유로를 받는다.

    이러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은 수년 전만 해도 독일에서는 낯선 일이었다. 실업수당만 받아도 괜찮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게 과거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정반대 상황이 됐다. 일을 해도 살기 어려운 것이다. 그 결과 독일에서도 비정규직 근로자가 전체 근로자의 절반을 차지하게 됐다.

    근로자 절반이 비정규직 … 한국도 닮을까 걱정

    반면 메르켈 정권하의 최고 수혜자는 전문경영인(CEO)들이다. 구조조정으로 직원들을 대량해고한 CEO가 회사 재무구조를 개선한 공로로 거액의 성과급을 받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시장이 좀더 유연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지만, 전문경영인의 경우 대체로 ‘임기 5년 보장’이 철칙처럼 지켜지고 있다.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고 떠난다 해도 이들은 끄떡없다. 계약 당시 약속된 거액의 퇴직금이나 연금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형 유통업체 칼슈타트-크레벨의 사장을 지낸 발터 도이스에게는 은퇴 후 연금 외에도 회사 차량과 운전기사 종신 이용이 보장됐다. 그런데 그가 운전기사를 수시로 이용하는 데 따르는 ‘근무시간 외 수당’을 누가 지불해야 하는지를 놓고 회사와 마찰이 생겼다. 경영 환경이 악화돼 수천명의 직원이 해고되기 직전임에도 도이스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이겼다. 회사의 위기에 본인이 전혀 책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텐데도 말이다.

    한편 독일철도 기관사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여러 달째 파업을 이어감에도 경영진은 꿈쩍하지 않고 있다. 기관사들의 임금은 수년간 경기침체를 이유로 동결됐다. 그러나 정작 독일철도의 사장 하르트무트 메돈의 수입은 지난 4년간 30% 이상 늘었음이 밝혀졌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회사를 제 몸처럼 생각하며 열심히 일할 수 있을까?

    노동과 생활의 안정성 상실. 물론 이러한 그림자가 메르켈 정부 때문만은 아니다. 좀더 근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때문이다. 좌파로 분류되던 슈뢰더 정부조차 이러한 세계적 변화를 거부할 수 없어 마지못해 신(新)중도의 길을 걸은 바 있다. 그리고 우파를 표방하는 메르켈 정부에 이르러 신자유주의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사회적 격차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를 선택함으로써 앞으로 메르켈의 독일처럼 ‘우향우’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로 인해 역시 독일처럼 빈부 차이, 계층 간 차이가 더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앞에 놓였다. 성장을 강조하면서 사회정의나 경제윤리를 아울러 추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우리가 추구하는 일류국가, 선진한국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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