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3

2017.01.25

트럼프 시대 개막 2

미·러 파워 재편 충격파의 향방

러시아 야심에 신안보체제 파편 맞을 위험

  • 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입력2017-01-23 18: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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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만 비난을 피해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세계 각국에 대해 막말을 쏟아내자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당시 트럼프 당선인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고립시켰던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미국 동맹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똑같이 신뢰한다고 말했다. 우방국과 적국을 가리지 않고 동급으로 상대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트럼프, 러시아에 약점 잡혔나

    이어 유럽 방어막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무용론을 꺼냈고, 유럽연합(EU)의 해체를 지지하겠다는 말도 했다.  미국의 전통 맹방들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든 그의 발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간 미국이 견지해오던 대외정책을 곧바로 휴지통에 집어넣을 정도로 ‘도발적 언행’이라고 미국 전문가들은 풀이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던 외교관이나 학자들조차 “그의 발언은 질서 재편을 위한 대외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의 대외 옵션을 열어놓기 위한 것”이라고 두둔하면서도 “어떻게 전개될지는 불확실하다”고 털어놓는다.

    미국 동맹국들이 불안에 떨 때 웃고 있던 나라가 러시아다. 유럽과 러시아는 지금까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서로 으르렁대며 대립해왔다. 유럽 국가가 트럼프의 ‘막말 폭탄’을 맞아 몸을 움츠리고 있으니 러시아 처지에선 ‘행복한 비명’이 나올 만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편애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나온다. 먼저 그가 러시아에 큰 약점을 잡혔다는 설이다. 최근 미국 미디어의 주목을 받은 섹스파티설이 그 예다. 미국 인터넷언론 ‘버즈피드’가 공개한 문건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2013년 미스유니버스대회를 열고자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리츠칼튼호텔에서 성매매를 한 증거를 러시아 정보당국이 갖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붉은광장 북쪽에 자리 잡은 리츠칼튼호텔은 소련 붕괴 직후 서방의 유명 인사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 호텔 종사자들은 당시부터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매수돼 서방 유명 인사나 크렘린 정적들의 엽색 행각을 몰래 카메라로 찍어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KGB는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나 푸틴 대통령의 정적을 제거할 때  그런 영상을 국영TV에 이따금씩 뿌려왔다.

    문제의 문건은 영국 비밀정보부(MI6) 요원 크리스토퍼 스틸(52)이 미국 공화당의 의뢰를 받고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옛 KGB) 요원들을 만난 뒤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 모습이 들어간 영상 한두 개만 나와도 그 파장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을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추잡한 정치 공작으로 만들어진, 완전히 가짜 주장”이라며 즉각 진화에 나섰다. 푸틴 대통령은 “그런 허위 내용을 주문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창녀보다 못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을 감싸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이런 논란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친러시아 행보는 미국의 새로운 국가 전략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전문가들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쌓아왔던 업적을 흔들어놓으면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그 결말과 상관없이 새롭게 보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종전의 외교관계를 원점에서 검토한다면 미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새로운 기회를 잡고 미국 안에서도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구사하던 미·중·러 삼각 외교를 떠올리는 분석가들도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대립시켜 미국이 이익을 취하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미국 CNN은 스티븐 세스타노비치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중국과 러시아가 70년대처럼 심하게 다투고 있지 않다’며 ‘이런 전략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 손잡고 중국을 압박하는 시나리오가 점차 현실화되리라고 예상하는 전문가는 늘고 있다.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과 환율조작을 견제할 세력은 러시아밖에 없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이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얘기다. 러시아와 함께 세계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면서 얻는 이익이 미·중 관계 현상 유지 비용보다 훨씬 크다는 계산을 끝냈다는 말도 나온다. 



    신얄타 체제의 부활?

    러시아는 새로운 야망에 부풀어 있다. 그 야망의 일각은 지난해 12월 푸틴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났을 때 잠깐 엿보였다. 당시 일본은 쿠릴 열도 4개 섬(일본명 홋포료도·北方領土) 분쟁 건이 정상회담 테이블에 올라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트럼프 시대가 열리면서 협상 카드를 갑자기 거둬들였다. 러시아 일간 ‘모스크바타임스’는 ‘70년간 이어진 러·일 영토분쟁을 해결하는 대가로 미·일 안보조약이 훼손될 것이라고 러시아 측이 일본에 알렸다’고 보도했다. 미·일 안보조약까지 무시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영토 문제 해결에 나서지 말라는 러시아의 경고였다. 러시아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일본의 쿠릴 열도 할양을 승인받았다. ‘강대국 놀이판’이던 얄타 체제에서 쿠릴 열도는 일본을 배제하고 미국과 러시아가 주고받은 게임이었다. 그런데 트럼프 시대가 열리는 지금 미국을 등에 업고 러시아와 협상하려는 일본을 ‘플레이어’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러시아 측 메시지였다.

    러시아 정치분석가 알렉산드르 모로조프는 러시아 현지 언론에 “러시아는 지금 헬싱키 체제를 넘어 얄타 체제의 복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글을 게재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얄타 체제는 나토나 EU 없이 오로지 미국과 소련이라는 슈퍼파워가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구도였다. 헬싱키 체제는 1975년 8월 서방 35개국이 합의했던 영토 보전과 인권 존중을 토대로 한다. 러시아는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국경 침해로 이 협약을 정면으로 위배해왔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 미국과 손잡으면 러시아의 지분을 다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걸고 있다.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우정훈장을 받은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 내정자가 대러 화해정책을 본격 추진할 것은 예정된 수순처럼 보인다.

    미국과 러시아의 화해는 어디서부터 열릴까. 2012~2014년 주러시아 미국대사를 역임한 마이클 맥폴 스탠퍼드대 교수는 “친선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퍼주기 식’ 정책을 경계했다. 그는 1월 6일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기고문을 내고 “오바마 행정부의 미·러 관계 리셋(reset·재정립) 정책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러시아는 2009~2010년 리셋 정책으로 양국의 핵무기 30% 감축, 탄도미사일 정보 공유 등을 합의했다. 미국이 2011년 5월 중동 테러리스트의 두목이던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할 수 있었던 것도 러시아 덕분이었다. 러시아는 당시 중동과 인접한 자국의 영공 통과를 미군에게 허용했고, 이 공간이 열리면서 미군은 특수부대를 대테러 작전 현장에 직접 투입했다.



    미·러 화해로 한반도는 더 불안

    이 같은 국가 간 협력 방식은 지금도 재도입될 수 있다는 게 미·러 양국 전문가의 일치된 의견이다. 트럼프 시대가 시작되면 미·러 양국이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격퇴에 본격적으로 나설 개연성이 높다. 러시아 외교정책 전문가 블라디미르 프롤로프는 “미국의 안보 부담을 덜면서도 러시아가 세계질서 재편에 동참했다고 말할 수 있는 공간에서 양국이 협력할 공산이 크다”고 내다봤다.

    러시아는 이 같은 협력 과정에서 미국에게 대러제재를 풀어달라고 할 가능성이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내전 책임을 요구하며 2014년 3월부터 대러제재를 지속해왔다.

    미국의 대러제재가 풀리면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협력도 예전 수준으로 되살아나면서 우리에게도 호재가 될 수 있다. 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에 대해 러시아의 양해를 구할 기회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중국만 사드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남게 된다. 러시아는 남한의 사드도 유럽에 배치되는 미사일방어(MD)체계와 유사한 종류라고 주장해왔다. 그렇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협력이 크게 진척되더라도 러시아가 미국의 MD와 핵무기 증강에 긴장을 늦추지 않을 것이라는 엇갈린 관측도 나온다.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 내정자 등 매파가 어느 선에서 동의할지도 변수다. 이들의 시각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적’이다. 그러기에 우크라이나 문제 등을 그대로 놔두고 대러제재를 해제하는 것은 푸틴 대통령에게 개선행진곡을 추가로 선사할 뿐이라는 시각이다.

    미·러가 공동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 데이비드 섐보 미국 조지워싱턴대 중국정책프로그램 소장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중국과 대립하는 정책이 나오면 중국은 미국에게도 고통스러운 모든 종류의 대응을 할 것”이라며 “최악의 경우 군사적 충돌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 초기에는 중국 제품에 고율관세를 매기는 등 ‘저강도 정책’을 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중국에 대한 고강도 압박으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남한 측 전문가들의 희망 섞인 관측에는 아직 힘이 실리지 않았다.   

    미·러의 급속한 화해는 한반도에서 사드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우호적 태도를 불러올 수 있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한반도 안보 문제와 관련해 6자 회담 같은 다자간 해결을 지지해왔다. 그런데 러시아가 미국과 합의 또는 미국의 암묵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더 많은 지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모스크바 총영사를 역임한 신성원 국립외교원 경제통상연구부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불확실하지만, 한반도에서 강대국 간 이해관계가 새로 구축될 경우 러시아가 제목소리를 내려 할 것”이라며 “러시아의 독자 노선은 한반도 안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위협 요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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