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출범으로 전 세계는 충격에 휩싸여 있다. 그는 취임 직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개정을 기정사실화했다. 백악관에 장관급 국가무역위원회(NTC)를 신설하고 대(對)중국 강경론자로 트럼프의 통상 분야 대선 공약을 설계한 피터 나바로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를 보좌관에 임명했다. 또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썼던 윌버 로스를 통상장관에 내정하고, 미국 철강업계 변호사로 활동했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를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지명했다.
대통령의 막강한 무역 재량권 활용할 기세
트럼프노믹스는 미국 제조업의 재건을 통해 일자리와 임금, 소득을 증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미국 무역적자 규모가 연 8000억 달러(약 912조1600억 원)에 달하고 NAFTA 발효 및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래 수많은 미국 기업이 해외로 이전함으로써 미국 내 산업 기반이 무너져 일자리가 줄어들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엇보다 환율조작과 불공정교역으로 막대한 대미 무역흑자를 내고 있는 중국을 맹비난하면서, 미국 기업이 해외투자를 통해 제조한 물품을 미국에 재수출하는 경우 35% 상당의 ‘국경세조정(BTA)’을 통해 불이익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또한 미국에 이익이 되는 양자 통상협정 체결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하면서 다자협정 개정 또는 탈퇴 필요성을 설파했다.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기치 아래 ‘공격적 보호주의’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불확실성이 극대화되고 있다.트럼프는 중국의 환율조작 문제를 지속적으로 공격해왔다. 미 의회도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로 촉발된 불공정무역에 맞서고자 수많은 입법을 시도했다. 지난해 2월 발효된 교역촉진법(TFTEA)이 대표적이다. 미 재무성 지침은 무역흑자 200억 달러(약 22조8060억 원), 경상수지 흑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 초과, 12개월 내 외환 순매입액이 GDP의 2% 초과 가운데 한 가지 요건만 충족해도 환율조작국으로 분류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6개국이 감시 대상국에 포함돼 있다. 그러나 WTO는 수출국의 화폐가치 하락을 수출 국가에 대한 보조금으로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환율조작을 이유로 무역제재를 시행할 경우 WTO 패널에서 불리한 판정을 받을 개연성이 높다. 그럼에도 트럼프 정부는 환율조작국 카드를 강하게 밀고 있다.
최근 미 하원에서는 공화당 주도로 트럼프가 공약한 ‘국경세조정’ 관련 논의가 뜨겁다. 아직 개념이 모호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미국 수출품에는 법인세를 감면해주고 수입품에 투입된 요소에는 조세 감면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WTO 규범에 위배될 여지가 크다. 미국산 제품과 수입 제품을 차별하기 때문이다. 시행되면 WTO에 제소되거나 보복 조치를 받을 것이 자명하다.
미국은 통상 권한을 의회와 대통령이 분점하고 있지만, 미국 대통령은 제재조치를 시행할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1974년 무역법 제122조에 따라 미국 대통령은 국제수지 방어를 목적으로 수입품에 15% 잠정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일본과 독일 수입품에 10%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달러화 평가절하를 유도한 사례가 있다. 80년대 세계 각국을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WTO 규범 위반이라는 판정을 받았던 제301조도 미국 대통령에게 수입 규제 또는 양허 정지를 취할 권한을 부여한다. 이 조항이 이른바 ‘슈퍼 301조’로 불린 이유다. 또한 제337조는 상표 또는 지식재산권 위반 시 해당 제품을 미국 시장에서 퇴출할 수 있게 했다. 그 밖에 ‘1962년 통상확대법’과 ‘적성국교역법’ 등은 미국 대통령에게 일정 요건 하에서 수입 규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광범위한 재량을 부여하고 있다.
전략적 관점에서 분쟁 대응능력 갖춰야
미국발(發) 보호주의는 통상마찰을 극대화하고 기업의 투자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 제품을 사고, 미국인을 고용하라(Buy America, Hire America)’를 내세워 미국 내 투자 유치를 압박함으로써 미국 제조업의 부활에 집중할 것이다. 이에 따라 다자 통상체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힘에 바탕을 둔 양자 무역체제가 확산될 것이다. 미국은 당장 영국 및 일본과 양자협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양자 협정은 분절화된 규범을 양산해 글로벌 가치사슬에 역행할 수 있다. 물론 양자 협정이 높은 수준의 자유화를 추구할 경우 국제 통상규범에 부합하면서 무역 왜곡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한미 FTA는 시장 접근과 규범 측면에서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협정이다. 그런데 그렇게 흘러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트럼프 정부는 언제든 공격할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선제적으로 리스크 관리를 해나가야 한다. 먼저 정부 및 민간기관이 유기적으로 협조하면서 미국 신정부와 소통을 강화하고 미국의 새로운 통상정책을 면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 철강, 자동차, 화학·정유 등 미국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분야에 적합한 맞춤형 대응전략도 필요하다. 한미관계가 깊고 오래됐지만 미국 내 네트워킹 구축은 해묵은 과제다. 미국 정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의회 내 공화당 인맥을 기반으로 신정부 인사들과 접촉을 늘리고 민주당 인사들과도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둘째, 좀 더 포괄적인 시야를 가지고 통상 문제에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미 양국 간 통상 현안에 대한 대응은 물론 미국과 중국 간 갈등,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현안을 관찰하고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해야 한다.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FTA를 개정 또는 폐기하겠다는 트럼프식 통상정책은 경제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외교관계의 갈등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미국의 신고립주의는 통상정책을 외교정책의 핵심 축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우리 통상조직의 분쟁 대응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전문인력 충원과 예산 지원이 필수적이다. 분쟁이 확대되고 협정의 재검토 수요가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상정책과 현안 이슈를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컨트롤타워도 정부 안에서 작동돼야 한다. 이 조직은 수입 규제 조치 및 한미 FTA 이행과 개정 가능성에 대비해 공세적 이익과 수세적 분야를 사전 검토하고 통상 문제를 외교·안보 측면과 연계해 고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통상관계에 빨간등이 켜졌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불확실성과 점증하는 리스크를 슬기롭게 관리하려면 경직된 자세보다 유연하면서도 내실 있는 준비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