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3

2007.05.01

중심과 마이너리티

  • 홍영용 학림논술연구소 부소장

    입력2007-04-27 18: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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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심과 마이너리티

    경기 파주의 한 외국인노동자 작업장.

    ‘애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최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다. 언뜻 보면 여자 이름 같기도 한 이 말은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욕설로, ‘장애자’라는 말에서 성(?)만 뺀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고 이 구분을 통해 차별을 정당화해온 우리의 자화상이 초등학생의 말 속에 담겨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 같은 구별과 차별은 비단 장애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주노동자, 혼혈아 등에 대한 구별과 차별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동남아 사람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월급이 적게 책정되고 생산량이 더 많아도 한국인만큼 대우받지 못한다는 게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또 한국에 있는 동안 유럽인이나 미국인을 대하는 태도와 우리 동남 아시아인을 대하는 태도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보면서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 한양대 2002년

    장애인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각기 다른 원인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논리가 관통하고 있다. 차별의 배후에는 한 사회의 동일성과 그 밑에 흐르는 자기중심성이 존재한다. 또 한편으로는 나 자신과 타자, 문명과 자연, 남성과 여성, 정상인과 장애인, 우리와 이방인 등 일련의 이항대립을 통해 중심과 주변을 구분한다. 이를 통해 지배자와 권력자는 정당성을 보장받아 왔다. 즉, 세상을 우리에게 속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고 타자를 자신의 논리 속에 포섭하며, 만일 포섭되지 않으면 배제하는 방식을 통해 한 사회의 통합을 이뤄온 것이다.

    이런 동일화의 논리는 공동체에서도 나타난다. 즉, 가부장 사회에서는 어느 여성이 남성의 관점을 내면화하고 공유하면 현모양처라는 이름으로 공동체 일원에 편입되지만, 이를 거부하면 결국 배제되고 만다. 그 예로, 현해탄에 몸을 던졌던 윤심덕이나 그보다 먼저 조선의 가부장 사회에서 버림받았던 허난설헌의 삶을 들 수 있다. 이런 남성중심적 편견은 위대한 철학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여성적인 것을 ‘하나의 기형 혹은 불구’로 생각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용어를 우주에까지 확장해 영원불변의 하늘을 남성으로, 변화무쌍하게 생성하는 땅을 여성으로 보았다.”

    - 린다 진 셰퍼드의 ‘과학의 여성적 얼굴’, 서강대 2007년 예시

    언뜻 보면 인류 역사는 강자에 의한 지배와 차별의 역사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우리 삶이 강자의 것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타자이자 소수자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식민지 시대 우리의 역사가 그랬고,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펼쳐지는 장애인운동 같은 수많은 소수자 운동이 그러하다. 소수자들은 이런 저항을 통해 스스로에게 정체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중심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타자와 소수자의 해방은 또 다른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심 권력의 획득은 단순한 중심 대체를 의미할 뿐이며, 이 같은 중심화는 또 다른 타자와 소수자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소수자의 해체(해방)는 중심 권력의 획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으로 중심의 해체를 통해 가능하다. 즉, 어느 누구든지 완전한 중심 혹은 주변인 경우는 없다. 가부장 사회에서 중심을 차지했던 한국 남성도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에서는 주변적 지위를 할당받는다. 반대로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소수자였던 남성이 그의 본국에서는 가장(家長)으로서 우월적 지위를 갖는 중심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중심화를 거부하는 것은 소수자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중심인 동시에 소수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다층적 존재다. 따라서 소수자운동은 역설적으로 다수를 위한, 즉 우리 모두를 위한 운동이다. 억압받는 소수를 타자화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소수자로 인정할 때 억압과 배제의 논리로 조직된 사회구조를 개선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 관련 기출문제

    중앙대 2007년 수시1 ‘인종주의’, 수시2 ‘민족주의와 국제결혼’, 한양대 2002년 정시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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