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3

2007.05.01

가난은 반항심 키우고 열등감은 싸움을 불렀다

최진 교수 노무현 리더십 분석 “성장기 하류생활로 난해한 정치행태 초래”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7-04-25 1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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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한 살 아래 여학생과 사귄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여자친구는 중학교 진학 후 남자친구 노무현에게 결별을 통보했다. 노무현은 헤어진 이유를 잘 몰랐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초라한 ‘행색’에서 답을 찾았다. 노무현은 중학교 3년 내내 이 열등감에 시달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첫사랑은 이렇게 비극으로 끝났다. 가슴을 아리게 한 노 대통령의 ‘사랑’ 이야기는 또 있다. 노 대통령이 20대 초반 때의 일이다. 울산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던 노 대통령이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노 대통령은 예쁜 간호보조사를 만났다. 노 대통령은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지만 그녀는 고졸 출신인 노 대통령보다 면회 온 대학생 친구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노 대통령은 슬픔을 소설로 승화시켜 ‘간호원 연가’라는 작품을 완성했다.

    가난은 반항심 키우고 열등감은 싸움을 불렀다
    초년 고생 강한 노무현 만든 원동력

    대통령의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는 고려대 최진 연구교수(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는 노 대통령의 실패한 사랑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아이콘으로 빈곤과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 열등감을 꼽았다. 최 교수는 당시 노 대통령이 좌절과 분노, 반항, 방황 같은 성장과정의 오류를 적지 않게 노출했다고 설명한다. 실제 노 대통령의 어린 시절은 반항심과 자존심, 우월감 등의 심리기제가 주변을 감쌌다. 최 교수는 노 대통령의 이런 성장과정과 성격에서 노 대통령의 리더십이 형성됐다고 주장한다. 노 대통령의 이런 성장과정과 성격은 강한 노무현을 만들어 권력의 정상에까지 올라서게 했지만 동시에 오늘날 리더십과 국정운영 스타일의 위기도 불러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최 교수는 노 대통령의 리더십을 연구하기 위해 그의 어린 시절 및 청장년 시절의 각종 경험과 주변 환경을 체계적으로 파악했다. 최근 공개한 자신의 학술서 ‘대통령리더십총론’(법문사)에는 이런 과정을 거쳐 분석한 노무현 리더십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이 저서는 또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의 성장과정과 리더십, 국정운영스타일 등을 심층 분석하고 2007년 대선 향방도 예측했다. 그 내용 가운데 노 대통령과 관련한 일화와 이를 리더십 관점에서 분석한 최 교수의 주장을 정리했다.



    아동기, 노무현은 영리했다. 여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외웠다.

    그러나 집은 매우 가난했다. 그 때문에 초등학교 때는 등록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못했다. 친구들 앞에서 여러 차례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가난에 대해 노 대통령은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가난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고, 거짓말을 하게 하며 황폐하게 만든다.”

    ‘눈물’은 위기 벗어나는 수단

    어린 노무현에게 극빈생활은 단순히 가난 콤플렉스를 심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성격 형성을 비롯해 정신세계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특히 유난히 자아의식이 강했던 노무현에게 가난 때문에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은 비굴함이었던 것 같다. 비굴하지 않기 위해 더욱 자존심을 내세웠고 때로는 자학적인 심통을 부리기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래서 최 교수는 아동기 노무현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강한 심리적 충격을 준 요인으로 ‘빈곤심리’를 꼽는다.

    가난은 반항심 키우고 열등감은 싸움을 불렀다

    1970년 사병으로 근무하던 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이 동료 전우와 함께 닭싸움을 하고 있다(사진 왼쪽). 2002년 대선 당시 눈물을 보인 광고로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한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은 어릴 때부터 가진 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잣집 아이의 새 가방을 몰래 면도칼로 찢고 자백을 거부했다.

    시골아이들과 작당해 읍내 잘사는 집 아이인 급장에게 걸핏하면 시비를 걸기도 했다. 이런 감정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대로 이어져 부유층, 기득권층, 특권층, 주류에 대한 거부감으로 연결됐다는 게 최 교수의 진단이다.

    비주류와 주류, 소외세력과 기득권층, 진보와 보수 등 매사를 둘로 쪼개는 피아 흑백논리의 뿌리도 여기서 출발한다는 게 최 교수의 진단이다. 최 교수는 노 대통령의 진보적 역사관 또한 어린 시절의 고통과 고난에 근거한다고 설명했다. 학창 시절의 빈곤과 소외감이 보수기득권 타파심리를 강화했고, 정신적 지주였던 맏형과 아버지에게서 광복 직후의 부조리한 정치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개혁적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노무현 가족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동네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노무현의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했다. 노 대통령의 고백(자전적 에세이)이다.

    “어머니는 한이 맺혀 있었다. 가난으로 인한 고생도 고생이려니와 친척들의 박대, 일본인의 마름 노릇을 하다 지주가 된 동네 유력자들의 횡포, 그에 저항하다 당한 수모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서 한 맺힌 얘기들을 들어왔다.”

    노무현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무의식 세계의 중심부였다. 그런 어머니의 한은 노무현의 정신세계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이 유난히 눈물을 많이 흘리는 외향적 감정형의 성격을 갖게 된 것도 어머니 영향으로 인한 여성적 세계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의 여성관도 특별하다. 청소년기 노무현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마초이즘’에 사로잡혀 있었다. 노 대통령은 아버지를 구박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야박하고 극성스러운 여성의 이미지를 접했다”고 술회했다. 노무현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대학(부산대)을 나왔던, 가장 존경했던 맏형이 결혼과 동시에 형수에게서 심한 괄시를 받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형수의 구박에 못 이겨 형은 결국 고시공부를 포기했다. 이런 좌절을 보면서 노 대통령은 여성에게 강한 경계심과 거부감을 갖게 됐다. 이런 심리상태는 결혼 초기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젊은 시절 아내 권양숙 여사와 걸핏하면 싸웠다. 종종 선풍기 목이 부러지거나 문짝이 떨어져나가는 활극도 펼쳤다. 젊은 시절 그의 여성관은 어머니-형수-부인으로 이어지며 여성은 무조건 억압해야 하는 존재로까지 악화됐다.

    그러다 대학생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극을 받으며 긍정적인 여성관을 갖게 된다. 노 대통령이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과 여성 국무총리를 임명한 것은 보상심리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노 대통령의 중요한 지도자적 자질 가운데 하나는 창조성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모색했고 이는 창조성으로 이어졌다. 1966년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 마을 확성기에는 아침저녁으로 ‘새마을노래’가 울려퍼졌고 이는 공부에 큰 방해가 되었다. 견디다 못한 노 대통령은 베니어 합판을 두 겹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톱밥을 채워 방음벽을 만들었다.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대를 만들어 실용신안특허를 낸 것도 이때였다. 32억명에 달하는 엄청난 용량의 인물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도 노 대통령이었다.

    외향적 직관형에 해당하는 노 대통령은 눈물이 많다. 그의 초등학교 학적부에는 ‘각 과목이 우수하고 활발하지만 잘 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울음에 대한 노 대통령의 고백이다.

    “어릴 때 엉엉 울면 언제든지 작은형의 장난감은 내 차지였다.”

    2002년 대선 당시엔 눈물 흘리는 인간 노무현의 이미지를 활용해 큰 효과를 봤다.

    노 대통령이 국정운영 과정에서 감정의 기복을 심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도 눈물을 곧잘 흘리는 외향적 직관형과 관계가 깊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중학교 때 노무현은 덩치 큰 상급반 학생을 때려눕혔다. 이를 본 코치가 집으로 찾아와 권투를 권유했다. 큰형의 만류로 운동을 포기했지만 노 대통령은 정계에 투신한 뒤에도 가끔 대중목욕탕에서 알몸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원투 스트레이트 잽을 날리는 섀도복싱을 했다고 한다. 고시생 시절에는 이웃마을 청년 30여 명과 맞붙은 적도 있다. 도저히 승산이 없자 그는 웃통을 벗어젖히며 “일대일로 붙자”고 고함을 질렀다.

    최 교수는 노무현의 이런 모습에서 “미국이나 거대 언론, 심지어 여당 등 아무리 버거운 상대일지라도 손해를 감수하며 정면대결을 피하지 않는 승부사적 기질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기질은 변호사 시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는 주로 1심에서 패배한 어려운 사건을 맡아 2심에서 뒤집기를 시도하는 극적인 역전승을 즐겼다. 물론 승소를 위한 준비과정은 치밀했다. 다른 변호사들이 변론서를 10장 쓸 때 그는 100장을 썼다. 판사들이 그의 변론서를 참고 삼아 볼 정도였다.

    가난은 반항심 키우고 열등감은 싸움을 불렀다

    고려대 최진 연구교수(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

    권력 내리막길 리더십 위기 불러

    노 대통령은 청년기 막노동판의 하류생활을 했다. 막노동을 하는 몇 개월은 온갖 욕설과 싸움, 사고, 음식 훔쳐먹기와 같은 파렴치한 행동과 비행을 일삼던 시기였다. 그러다 발이 큰 못에 찔리는 바람에 일을 못했다. 밀린 밥값(2000원)을 떼먹은 채 야반도주했다.

    최 교수는 훗날 정치 지도자가 된 뒤에도 막말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적절한 언행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막노동판 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것 같다고 진단한다.

    노 대통령은 성장과정에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성장기의 고난은 노 대통령을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 권력의 정상까지 올라서게 했다.

    그러나 권력의 내리막길에 선 그는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비판은 주로 투박한 말투와 행동을 전제로 한 리더십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런 행동에 대해 최 교수는 ‘성장과정과 성격이 오늘날 리더십 위기를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성장기 그를 둘러싼 환경과 경험이 그에게 ‘약과 독’으로 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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