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6

2005.10.18

日 장수 총리들 인기는 낙제점

재임기간 1, 2위 사토, 요시다 대중성 낮았지만 업적 탁월 … 3위 고이즈미와는 정반대

  • 도쿄=조헌주/ 동아일보 특파원 hanscho@donga.com

    입력2005-10-17 08: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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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장수 총리들 인기는 낙제점

    역대 최장수 총리인 사토 에이사쿠(왼쪽)와 2위인 요시다 시게루.

    일본이 일왕 중심의 군국주의 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로 전환된 지 올해로 60년이 됐다. 전후 총리를 지낸 사람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까지 모두 20명. 역대 최장수 총리는 1964년부터 72년까지 7년 8개월간 재임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 作, 1901~75), 그 다음은 1946년부터 55년까지 7년 2개월간 재직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다.

    사토 에이사쿠는 정국 안정을 기반으로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일어서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정치 현안도 착착 해결됐다. 1965년 한일 수교와 71년 6월 오키나와 행정권을 연합군으로부터 돌려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그는 핵무기는 만들지도 않고, 보유하지도 않고, 반입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비핵 3원칙’을 천명하고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했다. 이 공로로 1974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관료 출신 사토 전 총리 딱딱한 이미지

    사토 에이사쿠는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 엘리트로 철도성에 취직했으나 무려 11년간을 지방에서만 근무했다. 보다 못한 외상 출신의 큰아버지가 지인에게 전근을 부탁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다시는 인사 청탁을 하지 말아달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곧 그는 출세 가도를 달렸다. 2년간 해외연수 후 3단계 고속승진을 한 것. 완벽한 일 처리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1944년 차관 승진을 앞두고 지방으로 좌천됐다. 그는 말없이 부임했고 곧 패전을 맞았다. 하지만 당시 지방근무를 한 덕분에 패전 후 공직에서 추방당하지 않았고 정계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 좌천이 행운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 후 운수상을 거쳐 정계에 진출했다.

    최장수 총리였던 그는 퇴임 때까지 그토록 바랐던 국민적 인기는 얻지 못했다. 잘 정돈된 얼굴, 당당한 자세 등이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딱딱한 이미지를 준 탓이다. 그는 입이 무거워 기자들과의 사이도 나빴고, 특히 비판적인 신문 매체에 불만이 많았다. 퇴임 기자회견장에서 그의 불만이 폭발했다.



    1972년 6월17일 자민당 중참의원 합동총회에서 퇴진을 밝힌 뒤 그는 관저에서 회견을 시작했다. 그런데 신문기자들이 대거 몰려들자 “TV는 어디 있나. 편향 보도하는 신문기자들은 나가주시오”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분이 상한 기자단 간사는 “나갑시다”고 말하곤 기자들과 함께 우르르 나가버렸다. 아무도 없는 기자회견장에서 그는 TV 카메라를 앞에 두고 퇴진의 변을 말해야 했다. 빈틈없는 관료 출신의 사토는 대중성을 갖추지 못했지만 특유의 통솔력을 무기로 정국을 장악했고, 이를 토대로 경제대국 일본을 키워낸 공로자였다.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최초의 일본 총리이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나온 외교관 출신으로 주영공사를 지냈으며, 명분보다 현실을 중요시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패전 후의 일본을 하루빨리 재건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재임 중 최대 업적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를 통해 연합군 점령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한 것이다.

    폐허로 변해버린 일본에 부흥의 씨앗을 뿌린 요시다는 때론 여론을 무시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통해 리더십을 확보한 그는 국제정세에 대한 탁월한 분석력과 일본의 향후 진로에 대한 천부적인 선견지명을 토대로 정책을 밀어붙였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굴욕적이란 여론의 비판을 무시하고 체결하는 등 ‘원맨정치’를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일반 대중을 상대하는 정치가 타입이 아니었던 그는 정당을 혐오했고 정치꾼들을 멸시한 반면 관료를 중시했다. 특히 그가 좋아한 관료 출신 정치가가 바로 훗날 최장수 총리를 한 사토 에이사쿠였다. 요시다의 정치 스타일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당대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67년 그가 숨졌을 때 장례식은 전후 최초의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전후 최고의 재상으로 꼽히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에게 보내는 오늘날 일본인들의 환호. 세월이 지나면 당시 일본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빈곤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로 고이즈미의 이름이 오르내릴지 모른다. 명재상으로 꼽히는 두 명의 장수 총리, 사토와 요시다는 저세상에서 고이즈미가 5년 5개월여 임기의 역대 3위 장수 총리가 될 오늘의 일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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