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6

2005.10.18

유치하지만 그래도 고이즈미!

꾸밈없는 서민적 감성발언으로 인기 행진 … 외톨이 성격 청결한 정치인 이미지 유지

  • 도쿄=조헌주/ 동아일보 특파원 hanscho@donga.com

    입력2005-10-17 08: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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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민당의 총선 압승이 판명된 9월11일 밤. 일본의 한 TV 특집프로에 사자 갈기 헤어스타일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63) 총리가 나와 진행자와 일문일답을 했다. 진행자가 “대승하면 야스쿠니(靖國)신사를 곧 참배할 것이란 전망이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고이즈미 총리는 “적절히 판단하겠다”고 했다. 진행자가 ‘적절’이란 말뜻에 대해 수차례 집요하게 물었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앵무새처럼 그저 “적절이란 적절이란 뜻이다”를 되풀이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고, 장난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한 그의 태도에 진행자들은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헨진(變人·별난 사람)’ ‘외로운 늑대’ 등의 별명을 가진 고이즈미 총리. 2001년 4월 총리에 오른 이후 4년 반 동안 일본인들은 국회 중계와 TV 회견 등을 통해 그의 이런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 고이즈미 인기의 최대 비결은 바로 이런, 어찌 보면 유치한(?) 어법, 특이한 연설에 있다는 것이 일본 정치 분석가들의 견해다.

    TV 뉴스 보도용에 적합한 어법

    “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

    참의원에서 우정민영화법안이 부결되자 중의원 해산을 단행한 뒤 기자회견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한 말이다. 천동설이 종교 교리에 부합하는 학설임에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돼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재판정을 빠져나오며 중얼거렸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랬는지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하여튼 갈릴레이가 끝까지 지동설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로 자주 인용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의 우정민영화에 대한 신념을 지동설에 비유함으로써 우정민영화가 후세의 역사에 길이 남을 개혁 조치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 말에 이어 “국민에게 우정민영화 찬반을 묻겠다”고 했다. 유권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야말로 신념으로 지동설을 지지했던 갈릴레이와 같은 존재’라는 의식을 갖게 한 것이다. 이 말은 당시 TV와 신문을 통해 수없이 반복 인용됐다.

    고이즈미 총리의 어법은 TV용이다. 길어야 수십 초 나가는 TV 뉴스 보도용에 적합할 짧고 인상적인 말을 툭 내던진다. 그는 긴 연설이나 논리적 대화에는 능란하지 않다. 국회 답변을 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복잡하고 논리적 설명보다는 짧고 인상적인 이미지를 쉽게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사고 패턴과 고이즈미 총리의 어법은 일치한다.

    이 때문에 지식인, 언론 매체, 관료, 정치인 등은 “총리답지 않다”며 창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때로 앞뒤가 안 맞을지라도 언뜻 들어 재미있는 고이즈미 총리의 한마디에 시원해하고, 그것이 옳든지 그르든지를 떠나 “솔직 담백한 서민적 정치인”이라며 즐거워한다.

    2004년 고이즈미 총리가 대학 졸업 후 정치가로 입문하기 전에 자신의 뒤를 봐주던 후원인이 주인인 회사에 이름만 올려두고 실제 근무는 하지도 않은 채 월급을 챙긴 일이 들통 났다. 당연히 가입해야 할 국민연금에도 들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죄송하다. 그때는 잘 몰랐다”는 말이 나올 상황이었지만 그는 달랐다.

    전혀 잘못이 없다는 투로 “인생도 가지가지, 회사원도 가지가지”라는 말로 넘겨버렸다. 놀라운 것은 이런 낯 두꺼운 변명에 대해 대중은 비판하기보다는 허허 웃고 넘어갔다는 점.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기는 올라갔다. 서민적이고 인간적이라는 반응이었다. 오늘날의 일본이 ‘중우(衆愚)의 시대’임을 실감하게 해줬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의 집안 내력을 보면 3대째 대물림하는 ‘세습 정치인’ 집안으로 서민적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짧은 의원 비서 생활을 거쳐 부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인지라 세상 물정은 거의 모른다. 서민적이라기보다 귀족적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 외조부는 체신상, 그의 외동딸과 결혼한 부친은 방위청 장관을 지냈다. 외조부는 노동자에서 몸을 일으켜 국회의원, 장관이 된 강골 정치인이었다. 역설적인 것은 그의 외조부는 이번에 고이즈미 총리가 단행한 국회해산과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극렬히 반대하며 명연설을 남겼다는 점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주무기인 꾸밈없는 서민적 발언도 실은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다는 것이 정설이다. 젊은 시절 그는 성격이 유해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던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오늘날 효과 만점의 어법이란 분석이다.

    그는 성격상 외톨이다. 이런 성격은 그의 결혼생활을 평탄치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파경에 이른 생활은 그를 더욱 외톨이 성격으로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결혼은 당시로는 만혼인 36세에 했다. 14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으나 4년 만에 협의이혼했다. 두 아들은 자신이 맡아 길렀다.

    자민당 내 주류 모리파 소속

    그가 밝힌 여성관도 몽상가적, 비현실적인 성격의 단면을 읽게 해준다.

    “세상에는 말을 해보면 통하는 여성,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여성,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여성 등 세 부류의 여성이 있다. 이중 최고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여성이다.”

    그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여성’이 과연 현실 세계에 얼마나 존재할까.

    고이즈미 총리는 부정한 돈에 손을 대지 않는 청결한 정치인 이미지를 유지해왔다. 이것도 기존 정치인의 모습에 실망한 대중의 눈에는 고이즈미 총리를 높이 평가하게 하는 한 요소다. 하지만 투철한 도덕의식에 의한 자기통제 때문이라기보다 고독을 즐기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이다. 의원 시절 그는 곧잘 혼자 일본의 전통연극인 가부키나 영화를 봤다. 경제인을 만나 돈을 ‘만든다’는 것은 외톨이적 성격상 힘든 일이었다. 동료 의원들이 ‘왕따’를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대중은 이를 틀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의 표출로 봤고, ‘못된 정치인’들의 괴롭힘 때문에 외톨이가 된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동정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파벌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는 엄연히 자민당 내의 주류인 모리(森)파에 속한다. 편할 때는 파벌의 껍데기 속에 숨어 있다가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파벌과 무관한 개혁정치인 행세를 해왔다. 그가 적극적으로 파벌의 힘을 이용한 측면은 많지 않지만 그가 후생상 두 번, 우정상을 한 번 지낸 것은 바로 파벌의 힘이자 정치인 가문의 힘이었다.

    역사소설을 좋아한다는 그는 의리와 인정을 중시한다. 악의 무리와 외롭게 대결하는 선한 사람을 도와달라는 식의 감정적이고 직선적 단순 어법이 이번 총선에서도 먹혀들었다. 그래서 포퓰리스트(대중 선동주의 정치인)란 평도 나온다.

    그가 감명 깊게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자살특공대원 가미카제들이 남긴 수기집이다.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성 말살의 군국주의 상황에 대한 생각은 없고 그저 몽상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무고한 아시아 민중, 나아가 일본인을 희생시킨 주역들인 A급 전범이 합사(合祀)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면서 그는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짐하기 위해서”라고 말해왔다. 논리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극히 단순한 그의 행동에 대중은 오히려 갈채를 보내고 있다.



    또한 고이즈미 총리는 파괴에는 능하지만, 건설에는 취약하다는 평가도 많다. 정치인으로서 긴 경력인 4년여 총리를 역임하면서 변화와 개혁을 외쳐왔지만 변변한 실적이 없다는 것. 1996년 그가 쓴 ‘관료왕국 해체론’을 보자. 그가 가장 열변을 토하고 비판했던 부분은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 비례대표제로 바꾼 것이었다. “차기 총선에서 내 공약은 소선거구·비례대표 폐지”라고 공언했을 정도다. 이어 그는 총리직선제 도입이야말로 정치 개혁의 일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을 되새겨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임기응변형의 정치인이지, 결코 개혁의 청사진을 머리에 두고 일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집권 기간 동안 그가 이룬 업적을 꼽으라면 일본인들은 머뭇거린다. 별로 없기 때문이다. 굳이 꼽는다면 전국 도로건설과 관리 업무를 담당해온 도로공단의 민영화 정도. 하지만 10월부터 개편된 민영화의 실태를 들여다보면 과연 도로공단의 효과가 무엇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우정민영화법안 역시 궁극적인 효과보다 정치적인 선전 효과가 훨씬 크다.

    체계보다 임기응변형 정치인

    앞으로 1년여 동안 고이즈미 ‘일본호’가 과연 미래 지향적인 개혁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다. 하지만 미-일 관계는 걱정 없다는 것이 정치 분석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의 인간적인 친밀도가 상상외로 돈독하기 때문. 두 사람은 정치인 가문 출신인 데다 비논리적, 즉흥적인 성격도 닮은꼴이다.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허리케인 피해로 지지도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부시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견고한 편이다.

    물론 두 나라의 관계는 두 지도자 사이의 친밀도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론 국제정치학적 이익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 단일패권주의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엄연히 한계가 있겠지만 부시-고이즈미 핫라인이 적어도 향후 1년간은 순조롭게 작동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성격이나 정치 행태는 노무현 대통령과 곧잘 비교되곤 했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이란 위기 국면을 총선 승리의 호재로 삼아 정세를 바꾸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고이즈미 총리와 달리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줄곧 바닥을 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은 언론 활용술의 차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주요 TV, 신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일하게 적대하는 것이 아사히신문 정도. 물론 일본 언론들도 고이즈미 총리를 비판도 하고 때로는 조롱도 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언론 전체를 적대하지 않는다. 정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언론 매체 대신 이른바 자신에게 우호적인 매체만 활용하다 보니 효율성이 떨어졌다. 노 대통령도 고이즈미 총리처럼 감성적인 어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개혁 청사진을 설파해왔다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또 노 대통령의 단순함이 고이즈미 총리 정도였으면 좋았을 것을, 종종 너무 단순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이즈미 총리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일본 사회. 우경화란 말만으로는 적절히 표현하기 어려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도쿄대학의 탁월한 정치 분석가 후지와라 기이치 교수는 자민당의 총선 압승 후 이런 평가를 한 적이 있다.

    “일본인들은 자신이 던지는 한 표의 의미를 모른 채 투표했다. 그 표가 갖는 의미를 알 때쯤이면 이미 늦었을 것이다.”

    별다른 실적 없이도 인기가 높은 고이즈미 총리. 그의 인기도는 일본 사회가 일제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미화하는 ‘역사 역류’로 가고 있는 분위기와 정비례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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