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2

2005.09.13

최선의 다산정책 쌍둥이를 낳아라?

  • 전 한국외국어대 과학사 교수/ parkstar@unitel.co.kr

    입력2005-09-09 08: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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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계청이 8월 말에 발표한 2004년도 한국인의 출생과 사망 통계를 살펴보면 출산율 대목에서 한숨이 터져나온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경제협력기구(OECD) 가운데 가장 낮은 1.16명이기 때문이다. 대표적 저출산국인 일본의 1.29명에 비해서도 한참 낮은 출산율이다. 머지않아 한국의 인구가 감소세로 바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니 걱정이 안 생길 수 없다.

    아이들이 나라의 가장 큰 재산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 진리다. 옛 기록을 살펴보면 다산(多産)에 대해서 국가가 적극 장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한 집안에서 아이를 많이 낳았다 하여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쌍둥이 이상을 낳으면 나라에서 곡식을 주어 이를 축하하는 식이었다.

    우리 역사에는 세쌍둥이는 제법 많고, 네쌍둥이 기록도 몇 있으며, 다섯쌍둥이 기록은 신라 때 딱 한 번 있다. 근래에는 배란촉진제 등 약물 사용 때문인지 다산이 더 많다고 하는데, 의약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다산은 정말 자연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유일한 다섯쌍둥이 기록은 193년(신라 별휴왕 10) 때로 ‘삼국사기’는 다섯쌍둥이가 4남1녀라고 기록하고 있다. 네쌍둥이 기록은 모두 8회로 통일신라 때 3회, 조선시대에 5회가 남아 있다. 통일신라 때인 680년(문무왕 19), 3남1녀를 낳은 사람에게는 200석의 곡식이 하사됐다. 네쌍둥이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중반까지만 나타나는데, 특이하게도 8회의 네쌍둥이 가운데 4회가 4남이고, 나머지 경우는 3남1녀가 2회, 2남2녀가 2회였다. 국가가 다산 장려를 위해 하사하는 곡식의 양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줄어들어 앞에 소개한 680년의 200석이 최고였다.

    세쌍둥이에 대한 기록은 제법 많다. 통일신라 때 4회, 고려 때는 거의 500년 동안 모두 12회뿐이다. 신라에서 고려까지의 이들 16회 세쌍둥이는 모두 3남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통계는 과거 남성 중심의 사회였음을 증명해준다고 생각된다. 세쌍둥이에 여자가 끼었을 경우는 아예 제외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392년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의 조선시대에는 모두 151회의 세쌍둥이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 3남이 53회로 가장 많았고, 3녀는 19회에 불과했다. 언뜻 보기에도 역대 실록에 기록된 세쌍둥이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 쌍둥이만 훨씬 많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해 보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인 1938~39년에는 세쌍둥이 통계가 정식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10만명의 출산 가운데 약 2회의 세쌍둥이가 출생했다는 내용이다. 또한 최근까지도 북한은 세쌍둥이 장려책을 펼쳤다고 한다. 국내 보도에 따르면 1996년 11월21일 평양에서는 ‘삼태자(三胎子ㆍ세쌍둥이) 군인 접견식’이란 행사가 있었는데, 여기 참가한 삼태자는 모두 22집안의 66명이었다. 김정일이 직접 참석해서 시상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 우리 형편에서는 세쌍둥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젊은이들이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나라에서는 탁아소와 유치원을 대폭 확장하는 방식으로 다산을 적극 지원하는 길이 유일해 보인다. 옛날처럼 곡식 200석이나 30석 정도로 다산을 장려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젊은 부부들이 안아야 하는 육아의 시간적·경제적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최선의 다산정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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