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8

2005.08.16

휴대전화, 만화를 정복하다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5-08-11 16:3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휴대전화, 만화를 정복하다

    백주연의 ‘베개 가발’. 졸릴 때 쓰기를 권한다.

    결국 휴대전화는 ‘아홉 번째 예술’인 만화도 정복했다. 지금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005 동아·LG 국제만화페스티벌’은 오늘날 사람들의 ‘뼈와 피’를 이루고 있는 것이 휴대전화 단말기와 네트워킹임을 보여준다.

    9회째를 맞는 이 페스티벌은 경쟁 및 기획전으로 이뤄지는데, 경쟁 부문은 매해 자유 주제로 치러지다 올해 카툰 부문에서 처음 ‘휴대전화’란 테마를 선택했다. ‘휴대전화’만으로 전 세계에서 응모한 만화가들은 다양한 픽션과 논픽션을 지어냈고, 사람들은 단 한 컷의 그림만으로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 주제인 극화 부문의 대상 수상작 ‘돌고, 돌고, 돌고’도 남대문시장에서 휴대전화를 든 두 친구가 만나기까지, 전화로 연결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희비극의 세상사를 다룬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나 ‘토끼와 거북이’처럼 휴대전화는 현대 문명의 보편적 토대가 된 것이다.

    카툰 대상 수상작 ‘실연’(이아미 작)은 ‘실연=끊어진 휴대전화’라는 디지털 시대 연애의 정의를 담았다. 실제로 거리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뭔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존재감이 실감 나지 않는가. 그 전화를 통해 그들이 어딘가의 세계에 연결돼 있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하므로.

    휴대전화 소재로 한 기발한 만화적 상상력



    휴대전화, 만화를 정복하다

    ① 전시장은 만화와 놀 수 있도록 연출됐다. ② ‘자유로운 감성’전의 체험 만화.

    죽는다는 것은 결국 더 이상 휴대전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보여주는 세르비아의 류도미르 얀코빅의 ‘프리메시지’나 루마니아 작가 크리브의 ‘죽음의 휴대전화’도 마찬가지 뜻을 갖는다. 동시에 휴대전화라는 ‘창살’에 갇힌 삶을 그린 작품도 많다. 죽을 때 휴대전화도 같이 묻힌다는 카툰 몇 작품이 본선에 진출했고, 사막에서 인간은 오아시스 대신 휴대전화의 신기루를 보게 되었다는 유머도 있다. 작가들은 ‘현대인의 정체성이 곧 휴대전화’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시장 1층은 해외 독립만화가들의 ‘자유로운 감성’전이고, 2층은 경선 수상작 전시 및 국내 작가들의 기획전 ‘유쾌한 상상’전이다. ‘자유로운 감성’전은 벨기에, 프랑스 등에서 거대 출판사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11명 작가들의 원화전이다. 그러나 말 풍선의 텍스트를 읽을 수 없어 매우 아쉽다. 만화가 만화인 것은 스토리와 그림이 하나의 이미지로 완성돼 있기 때문이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유쾌한 상상’전이다. 예년의 이 전시회나 다른 만화 페스티벌에서의 고질은, 만화의 속성은 스토리에 있는데, 전시는 독립된 그림을 뚝 떼어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과연 만화 전시가 가능한가라는 회의까지 갖게 했다.

    휴대전화, 만화를 정복하다

    ③ 이아미의 카툰 부문 대상 수상작 ‘실연’. ④ ‘무제’, 슬라보미르 루첸스키(폴란드). ⑤ 남철의 극화 부문 대상 수상작 ‘돌고, 돌고, 돌고’. ⑥ ‘프리메시지’, 류도미르 얀코빅(세르비아).

    그러나 ‘유쾌한 상상’전은 만화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만화적 상상력’을 가진 작품을 보여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큐레이터 사환규 씨는 “만화전 기획자로 늘 고민하던 문제를 ‘상상력’이 만화적인 작가들을 통해 풀어보고자 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니 만화가와 미술 작가가 함께 참여할 수 있고, 관객 처지에선 어른과 어린이가 자기 눈높이에서 즐길 수 있다.

    그렇다면 ‘만화적 상상력’이란? 만화의 과장된 ‘표현’을 ‘조각품’으로 만든 권경환의 ‘두고보자’, 침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도깨비를 보여준 델로스(그리스어로 ‘보인다’는 뜻)가 바로 ‘만화적 상상력’이다. 관람객들의 절대적 인기를 얻고 있는 백주연의 가발 시리즈를 보자. 졸릴 땐 커다란 베개에 머리를 끼울 수 있는 ‘베개 가발’을, 열 받을 땐 흰자와 노른자로 이뤄진 ‘내 머리 위의 계란후라이’란 말랑 가발을, 우울할 땐 자살 상상용 ‘목끈’을 전시장에서 착용해볼 수 있다.

    휴대전화, 만화를 정복하다

    ‘Cellular Phone’, 이레네즈 파르지제크(폴란드).

    평소 습관처럼 내뱉던 말들이 말 풍선이 되고, 내가 만화의 주인공이 됐으니 웃지 않을 수 없다.

    전시장 한쪽에 극화 부문 수상 작품집 ‘드림2005’가 비치돼 있다. 대상 수상작 ‘돌고, 돌고, 돌고’와 우수상 ‘진실이를 아시나요’는 인간 존재의 허약함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만화의 스타일과 텍스트에서 매우 탁월하다.

    전시장 앞에 눈사람의 ‘응가’를 받아 만든 100원짜리 아이스콘이 있으니, 꼭 맛보기를 권한다. ‘동아·LG 국제만화페스티벌’의 쿨하고, 유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8월21일까지, 02-2020-2055.



    문화광장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