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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이 만난 영화, 영화인|‘안녕, 형아’ & ‘러브 토크’ 배종옥

거친 세상 뚜벅뚜벅 ‘당당함은 그녀의 힘’

거친 세상 뚜벅뚜벅 ‘당당함은 그녀의 힘’

거친 세상 뚜벅뚜벅 ‘당당함은 그녀의 힘’
그녀는 배시시 웃는다. 그녀는 종알종알 말하지만, 옥구슬처럼 맑다. 배.종.옥. 비음 섞인 허스키한 목소리의 그녀, 그런 연기로 어떻게 배우가 될 수 있겠냐는 핀잔도 들어본 그녀지만, 내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맑게만 들린다. 그녀는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이미지의 연예인들이 방송에 넘쳐나지만 그 누구도 배종옥과는 닮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녀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형성되어 있다. 그것은 드라마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라, 그녀의 실제 삶 속에서 솟구치는 어떤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20년이 걸렸다.

배종옥이 가진 이미지는 자의식이 강한 당당한 여자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연약한 여성이 아니라, 거친 세상의 한복판을 관통해가면서 자신이 결정한 삶을 자신 있게 살아가는 여성이다. 그녀의 또박또박한 말투, 감성보다는 이성적 판단을 더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면서 언뜻 비치는 풍부한 감성적 색채는, 그녀의 연기에 균형감을 부여한다.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그녀는 현재 중앙대 겸임교수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다른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이미지

영화 ‘안녕, 형아’ 홍보차, 영화 속에서 그녀의 둘째 아들로 나오는 박지빈 군과 함께 SBS TV 프로그램 ‘야심만만’ 녹화를 끝낸 뒤 여의도의 한 일식집으로 들어온 그녀를 보고, 나는 늦었지만 생일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5월13일이 그녀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열두 살인 그녀의 딸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배종옥은 초등학교 6학년인 딸과 한남동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아이에게 학교생활에 대해 묻지 않는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아이가 먼저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는 딸이, “나는 자유로워서 좋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들이 뭐 했냐, 공부해라, 일일이 간섭하고 신경 쓰고 그러는데, 나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엄마가 내버려두니까” 하고 말했다. 이것이 그녀의 자녀교육 방식이다.

여배우의 나이를 굳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지만 그녀가 마흔두 살이라는 것을 알면, 정말 눈이 동그래진다. 지금까지 그녀는 누군가의 애인이었고 항상 사랑 앞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왜 나이가 들면 사랑 같은 것 때문에 갈등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식사하기 전 그녀는 짧게 기도를 했다. 모태신앙인데, 지금은 교회를 열심히 나가지 않는다. 그녀에게 모태신앙을 안겨준 어머니는 2년 전 돌아가셨다. 그녀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다. “이제 저는 고아예요”라며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사람이 쓸쓸할 때도 저렇게 웃을 수 있구나 새삼스레 생각한다.

“어머니가 담낭암으로 2년 반 정도 고생하다 돌아가셨다.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했다를 반복하면서, 가족이 아프면 가정이 불안정해지고 모든 게 우울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았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내면 감정 절제, 섬세하며 질감 있는 연기

그녀는 건강을 위해 동네 헬스클럽에 나간다. 불규칙한 스케줄 때문에 꼬박꼬박 나가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날 때면 가능한 한 가려고 노력한다. 시속 6.5km로 30분 정도 러닝머신 위에서 뛰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그녀는 ‘안녕, 형아’에서 뇌종양에 걸린 열두 살 아이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그녀의 딸이나 그녀나 지금까지 심하게 아파본 적이 없어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영화를 찍으면서 다시 느꼈다.

거친 세상 뚜벅뚜벅 ‘당당함은 그녀의 힘’

배종옥이 최근에 출연한 KBS HDTV 문학관 ‘내가 살았던 집’, 영화 ‘질투는 나의 힘’(위부터).

여자 홍상수로 불리던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을 보면, 배종옥이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수의사이자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박성연으로 나온다. 출판사 편집장인 유부남 한윤식(문성근 분)과 섹스를 하는 사이이면서, 또 한윤식에게 애인을 빼앗긴 바 있는 출판사 직원 이원상(박해일 분)의 구애를 받는 역으로 등장한다. 이원상은 박성연에게 말한다.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 나도 잘해요.’ 그 말을 듣는 배종옥의 표정이 너무나 좋았다. 내면의 감정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그 질감이 섬세하게 살아 있었다. 나는 얼마 전 케이블 TV로 그 작품을 다시 보면서, 저 훌륭한 배우가 왜 영화를 많이 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그녀는 벗는 장면이 있으면 절대 출연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진위에 대해 물었다.

“벗는 장면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다. 이런 거부감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자라면서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여배우가 벗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우리 나이 여배우들에게 한번 물어보라. 아마 벗는 것에서 자유롭다고 말하는 여배우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내 딸이 내가 영화에 나와서 벗는 것을 좋아할 것 같지도 않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도 원래 상반신 노출 장면이 있었는데 그녀가 못하겠다고 해, 박찬옥 감독이 삭제했다. 나는 그녀의 이런 거부감이 작품 선택의 폭을 좁히고, 결국 이것은 그녀에게나 한국 영화에나 손해가 되는 결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오는 시나리오에 벗는 장면이 있다고 해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심한 노출 장면이 있는 역은 아예 들어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약간의 노출에 대해서도 나는 거부감이 있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녀의 다음 작품은 ‘여자, 정혜’를 만든 이윤기 감독의 ‘러브 토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달 정도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해야 한다. 약 30회의 촬영 횟수가 잡혀 있다. 석 달 전, 주간동아의 인터뷰를 위해 이윤기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차기작 ‘러브 토크’의 캐스팅을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전에, 이번에 부활된 KBS의 HDTV 문학관 작품으로 은희경의 소설 ‘내가 살았던 집’을 배종옥 주연으로 만든다고 했다. 마침 이 인터뷰가 있기 이틀 전 방영됐다. 나는 ‘내가 살았던 집’을 보면서 이윤기 감독이 배종옥과 ‘러브 토크’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런 좋은 배우를 그냥 둘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배종옥은 ‘러브 토크’에 캐스팅되었다고 했다. 배종옥은 ‘안녕 ,형아’에 이어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에 연거푸 출연하게 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20년 연기 인생 중 ‘안녕, 형아’가 처음이다. 물론 배우는 자기의 사고를 허구를 통해 투영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한한 꿈도 꾸고 그 안에서 슬픔과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때로는 허구보다 더 드라마틱한 게 삶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실재했던 이야기라는 사실이 배역을 맡은 나에게 힘을 부여한다. 가령 허구에서는, 대수술을 앞둔 아이를 앞에 두고 엄마가 울고불고할 수 있다. 어떤 고통스러운 순간에 감정 표현을 강하게 갈 수 있다. 그런데 실제의 에피소드를 영화로 표현하면서 감정이 폭발하기보다는 절제가 되었다. 허구는 때로는 과장하기도 하고 현실과는 너무나 다른 감정을 표현하려 하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에서는 오히려 너무 담담한 거 아니야, 라는 소리가 스태프들에게서 나올 정도로 외형적인 갈등이나 표현은 절제되어 있다. 그런데도 영화가 힘이 있는 이유는, 실화가 주는 살아 있는 힘 때문이다.”

‘안녕, 형아’의 실제 주인공은 소설가 김혜정의 첫째 아들 설휘. 배종옥은 촬영 도중 설휘 모자를 만났다.

“같은 여자로서 너무 마음 아팠다. 아이가 아프기 때문에 자기 인생은 없이 아이를 위해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그 엄마도 자기 색깔이 독특하고 자기 성취 욕구가 강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 아이 때문에 자기 자신은 제로가 되고 모든 삶과 시간이 아이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했는데, 그 순간들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해봤다.”

현실의 인물과 영화라는 허구 속의 배역이 만났을 때,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의 모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연기에 사명감, 좋은 작품엔 기꺼이 조연”

“촬영 들어가기 전, 사전조사 작업을 하면서 내가 저들의 아픔을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는 그 얼굴에 아무 이야기도 쓰여 있지 않았다. 마른 꽃 같다고 해야 할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정서를 내가 표현할 수 있을지 자문해보았다. 배우들은 때로는 많은 대화를 통해서 어떤 인물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어떤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구성하는데, 실제 그 엄마의 얼굴빛이 늘 생각났다.”

‘안녕, 형아’는 일반인 펀드를 통해 제작비 19억원을 모았다. 한 계좌당 100만원이며 한 사람당 10계좌 이상 신청하지 못하게 했는데 모두 439명의 일반인 투자자들이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에 투자했다. 물론 투자 금액의 70%까지는 원금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단 하루 만에 펀드가 마감된 것은 시나리오가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뜻이다. 배종옥도 모두 5계좌, 500만원을 영화에 투자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투자 금액이 회수될 것 같은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무슨 소리예요. 이윤을 더 얻어야 되는데….”

거친 세상 뚜벅뚜벅 ‘당당함은 그녀의 힘’

그녀의 솟구치는 힘을 만들어낸 연극 ‘데드 피쉬’

그런데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대부분 작품성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대중적 지지는 받지 못했다.

“이제 내 마음 안에는 늘, 내 영화를 대중이 많이 봐주면 좋겠고, 우리가 했던 작업의 감정을 공유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배종옥의 영화 데뷔작은 대학로 화제작이었던 연극을 영화화한 ‘칠수와 만수’. 그리고 곽지균 감독과 ‘젊은 날의 초상’을 찍었고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뒀다.

“그때 좋았다. 내가 중대 3학년일 때 영화아카데미 다니던 학교 선배 장현수 감독의 졸업 작품에 출연했다. 그때는 TV 드라마가 더 주축이 되던 시절이어서 공채로 방송국 생활을 했다. 그리고 장 감독의 소개로 곽지균 감독의 ‘젊은 날의 초상’을 찍었다. 이어서 장 감독의 데뷔작 ‘걸어서 하늘까지’를 찍었다. 영화 개봉 때 영화사 사장이 죽어서 홍보를 제대로 못했다.”

배종옥은 ‘걸어서 하늘까지’로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안녕, 형아’에서 그녀가 꼽는 명장면은 화장실에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다. 역시 병든 아이를 둔 욱이 엄마를 화장실에서 만나는 장면인데, 욱이 엄마 역의 오지혜는, 세면대에 물을 가득 담아놓고 그 속에 얼굴을 담았다가 고개를 든다. 그렇게 물속에서 울면 눈도 안 붓고 실컷 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배종옥은 그 장면에서 슬픔은 혼자 끙끙 앓을 때보다 나눌 때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주 우는 편이다. 좋은 작품을 볼 때도 눈물이 줄줄 흐르기도 한다. 이번 스승의날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데 괜히 눈물이 나왔다. 어떤 감정의 자극 때문이다.”

하나의 직업을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윤리의식, 혹은 뚜렷한 직업관이 있지 않을까?

“그걸 단어로 표현하면 사명감이겠지만, 어떤 사회적 역할 같은 것을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연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래서 더 좋은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주연은 아니지만 ‘안녕, 형아’의 엄마 역을 수락했다. 처음에는 이걸 해야 되느냐 갈등도 했지만, 좋은 작품이라면 내가 기꺼이 주인공을 받쳐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작품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작품이 좋은지에 중점을 두고 영화를 선택할 것이다.”

‘가족’의 박희순, ‘연애술사’의 박진희가 함께 캐스팅된 이윤기 감독의 ‘러브 토크’도 배종옥에게 아주 중요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내면의 무늬를 한국의 어느 감독보다 뛰어나게 형상화하는 능력을 보여준 이윤기 감독과 배종옥이라는 배우는 무척 잘 어울린다.

이 인터뷰를 시작한 이후 처음 여성 영화인, 그것도 좋아하는 여배우와 만나게 되어서 개인적인 욕심으로 카메라를 가져갔지만, 다다미가 깔린 일식집 테이블에 앉아 있어서 사진을 찍자고 청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녀는 “다음에 또 만나죠”라고 말했다. ‘러브 토크’의 완성을 기다린다. 그래도 같이 사진 찍지 못한 것은 무척 아쉽다.



주간동아 2005.05.31 487호 (p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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