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7

2005.05.31

부산을 울고 웃긴 ‘야구 드라마’

1984년·92년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 … 강병철·최동원·김용철 등 스타 배출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입력2005-05-26 15: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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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을 울고 웃긴 ‘야구 드라마’

    1992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뒤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프로야구계에서는 롯데 자이언츠를 3무(無) 팀으로 부른다. 이제껏 정규리그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고, ‘장타왕’(홈런왕·타점왕)도 배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마무리왕’(최우수구원투수·최다세이브왕) 또한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규리그 우승이 없었다는 것은 팀 전력이 막강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1984년과 92년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은 팀 전력보다 다분히 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84년 후기리그 우승의 경우, 전·후기 종합 성적이 6팀 가운데 중·하위권인 정규리그 4위에 머무르고도 최동원이라는 슈퍼스타와 유두열이라는 깜짝스타 덕에 우승을 차지했다. 92년에도 정규리그에서는 3위에 머물렀으나 플레이오프에서 박정태, 염종석, 이종운 등이 맹활약을 펼친 덕분에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부산을 울고 웃긴 ‘야구 드라마’

    84년 우승의 주역, 김용희 김용철 최동원 유두열(왼쪽부터). 84년 MVP를 수상한 최동원. ‘미스터 자이언츠’ 박정태가 한영준 코치를 부둥켜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맨위부터)

    롯데 자이언츠가 장타왕, 그러니까 홈런왕과 타점왕을 배출하지 못한 이유는 운동장 크기 때문이다. 과거 구덕구장이나 지금의 사직구장 모두 다른 팀 구장보다 넓다. 잠실구장을 쓰는 두산 베어스, LG 트윈스와 함께 상당히 불리한 조건인 것이 사실이다(그럼에도 두산은 95년 김상호, 98년 타이론 우즈가 홈런왕을 차지했다). 또 마무리 투수 부문에서 타이틀 홀더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팀 성적과 직결된다. 늘 뒤가 약한 상태에서 매 경기를 치르고, 페넌트 레이스를 전개하다 보니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노장진이라는 확실한 마무리 투수가 있어서 플레이오프뿐 아니라 정규리그도 한번 승부를 걸어볼 만하게 됐다.

    정규리그 우승, 장타왕·마무리왕 없었던 ‘3無 팀’

    프로야구 원년인 82년 창설된 롯데 자이언츠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로는 강병철 감독과 최동원·박동희 투수, 그리고 김용희·김용철·임수혁을 꼽을 수 있다(현역 제외).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보면 롯데의 지난 23년이 거의 다 드러난다. 강병철 감독은 롯데 자이언츠에 가장 어울리는 감독이었다. 그는 부산상고 출신으로 82년 롯데 자이언츠 수석코치로 프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83년에 박영길 초대 롯데감독이 경질되자 그 뒤를 이어 롯데의 제2대 감독대행이 된 뒤, 최동원을 앞세워 84년 후기리그와 한국시리즈에서 잇따라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후 85년 4위, 86년 5위로 등수가 처지면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강 감독은 86년 시즌 직전 구단 고위층으로부터 재계약 언질을 받아놓은 터였다. 그러나 재계약 협상 도중 그 유명한 ‘까자 값 사건’으로 그만 경질되고 만다. ‘까자 값 사건’이란 강 감독이 당시 이희수 코치의 재계약금을 “아이들 과자 값 정도로 줘서는 곤란하다”고 한 말에서 비롯됐다. 과자업체인 롯데의 경영진은 ‘푼돈’을 ‘아이들 과자 값’에 비유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터였다. 롯데의 박종환 당시 전무는 강 감독의 말을 조동래 사장을 거쳐 신준호 구단주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그러자 신 구단주는 “벌써 프로야구가 그렇게 컸나? 500만원을 과자 값이라고 하다니…”라며 야구인들의 도덕성까지 들먹이며 재계약 결정을 취소했다. 이어 일본인 도위창(일본명 도이 쇼스케)을 감독대행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강 감독은 이후 팀에 복귀해 91년 시즌 4위를 기록하며 롯데를 7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은 데 이어, 92년에는 3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라 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 빙그레 이글스를 차례로 꺾으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롯데가 첫 우승을 차지한 84년 한국시리즈는 ‘최동원 주연, 유두열 조연’이 엮어낸 가장 완벽한 야구 드라마였다. 우여곡절 끝에 7차전까지 온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는 선발투수로 각각 김일융과 최동원을 내세웠다. 당시 최동원은 1, 3, 5, 6차전을 계속 등판하면서 3승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중 5차전은 8회를 던져 완투패(2대 3)했다. 아니나 다를까, 삼성은 구위가 떨어진 최동원에게서 2회 3점 홈런, 6회 1점 홈런을 뽑아내 6회까지 4대 1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롯데도 지친 김일융에게서 7회에 2점을 더 내서 4대 3까지 따라붙었다.

    이어 롯데는 8회 원 아웃 이후 김용희, 김용철이 잇따라 안타를 치고 나가 원 아웃 1·3루의 기회를 맞았다. 그런데 다음 타자는 극히 부진했던 유두열이었다. 유두열은 2차전에서 안타 1개를 쳐냈을 뿐 그때까지 17타수 1안타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도운 걸까, 김일융은 3구째 몸쪽 낮은 공을 던진다는 것이 그만 가운데로 몰리는 실투를 했고, 유두열은 그 공을 놓치지 않고 받아쳐 3점 역전 결승 홈런을 터뜨렸다.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일궈낸 최동원은 이후 구단과 연봉 협상 때마다 마찰을 빚다 88년 시즌을 끝으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됐다.

    롯데 자이언츠 초창기 타선을 이끌던 김용희, 김용철은 모두 올스타전에 강했다. 두 선수 모두 부산 출신으로 김용희는 경남고, 김용철은 부상상고를 졸업했다. 김용희는 190cm가 넘는 장신이고, 김용철도 185cm의 대형 슬러거(강타자)로 롯데의 4, 5번을 치는 단짝이었다. 김용희는 프로야구 원년인 82년에 이미 올스타에 뽑혔다.



    제2 선동열 박동희 … 의식 잃은 임수혁 팬들 진한 아쉬움


    부산을 울고 웃긴 ‘야구 드라마’

    박동희

    박동희는 ‘제2의 선동열’로 불렸다. 부산고 시절 150km를 넘는 강속구를 앞세워 고교 3학년 때인 85년 봉황대기에서 전무후무한 ‘방어율 0’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국제대회에서의 맹활약으로 90년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르 제이스의 입단 제의까지 받았던 박동희는 당시 최고 계약금인 1억5200만원에 롯데에 입단했다. 데뷔 첫해 10승(7패) 7세이브를 올렸고, 이듬해 14승(9패) 3세이브를 거둬 팀 에이스로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92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2승 1세이브로 우승에 기여하며 최우수선수(MVP)에 오르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임수혁은 롯데 팬들에겐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다. 서울고를 나와 고려대, 상무를 거쳐 94년 2차 지명 1순위로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한 그는 국가대표 출신으로 공격력이 뛰어났고, 포수로는 드물게 도루 능력까지 겸비했다. 특히 중요한 순간에 한 방씩 쳐내는 클러치 능력에 많은 부산 팬들은 열광했다. 임수혁은 2000년 4월18일 LG와의 경기 도중 갑자기 쓰러져 호흡곤란을 일으킨 뒤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 당시 조금이라도 빨리 산소마스크를 갖다댔다면 식물인간 상태는 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팬들과 야구계 인사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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