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3

2005.05.03

끔찍한 처형 장면 순교자 모델

성화 속에서 죄 뉘우치며 신에게 영혼 위탁 … 합리적 형벌제도는 확장된 권력 지배?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5-04-28 1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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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끔찍한 처형 장면 순교자 모델

    루카스크라나하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1500년).

    여당 의원들의 반대에도, 얼마 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서 북한의 공개처형 장면을 담은 비디오가 상영됐다. 이미 언론을 통해 널리 공개된 화면을 굳이 국회에서까지 반복해 볼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세상의 볼 것 중에서 가장 강렬한 구경거리가 사람 죽이는 것이어서, 그 잔혹한 장면을 보면 본능적 쾌감에 이념적 쾌감을 합해진 ‘멀티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제법 진화했다 하나 침팬지에서 그다지 멀리 걸어오지는 못한 모양이다.

    ‘처형’이냐 ‘공개’냐

    사형제도는 미국에도 있다. 아니, 미국이야말로 세계에서 사형을 가장 많이 집행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런데 왜 미국의 처형에 대해서는 ‘끔찍하다’는 비판이 없을까? 끔찍함은 주로 ‘사형’ 자체라기보다 그것이 ‘공개’된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18세기, 이른바 ‘문명화’된 사회에 들어서면서 점차 사형을 비공개로 집행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끔찍한 것이 된다.

    과거 서구인의 식탁에는 익힌 동물이 온전한 형태로 올라왔다. 그때 식사는 포크와 나이프로 동물을 해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부의 잔혹함을 주방에서 끝내고, 식탁에서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된 고기를 우아하게 써는 것. 그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말한 ‘문명화 과정’이다. 이 문명화를 통해 잔혹한 것은 공개된 장소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처형의 관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처형이 문명 이전의 현상, 즉 ‘야만’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처형의 호화로움



    회령의 인민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 처형장에 모였을까? 권력이 과시하는 위엄을 똑똑히 보도록 강제로 동원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참혹한 장면을 구경하려고 세워놓은 자전거 위에 올라가 목을 길게 빼는 것만은 자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혁명 이전에 벌어졌던 처형의 스펙터클을 연상시킨다. 미셸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공포의 장면에서 군중의 구실은 양의적이다. 민중은 관객으로서 호출된다.”

    공개 처형은 국왕이 자신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무서운 본보기였다. 하지만 그 화려한 육체의 향연에 초대받은 민중은 거기서 권력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동시에 관객으로서 즐거움을 느꼈다. 이 즐거움을 위해 처형은 단숨에 집행되지 않았다. 그런 자비는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루 종일 계속되는 끔찍한 고문을 끝낼 때에만 허용되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잡힌 어느 사내에 대한 판결문으로 시작한다.

    “처형대 위에서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가슴·팔·넓적다리·장딴지에 고문을 가하고,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버린다.”

    끔찍한 처형 장면 순교자 모델

    1759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행해진 반역죄인들의 처형 장면.

    순교자와 범죄자

    순교 장면을 그린 성화들은 당시의 공개처형이 어떠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000여년 전의 순교 장면을 그릴 때 화가들이 참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료는 바로 당대의 처형이었다. 그중에는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말뚝에 휘감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놓고 가랑이 사이를 톱질하여 몸을 두 동강 내는 장면도 있다. 이것은 그저 화가가 꾸며낸 상상이 아니라 당시의 법령집에 명시되어 있던 처형 방식이라고 한다.

    성화 속에서 사형수는 순교자의 모델이 되었다. 그림 밖의 현실에서도 사형수는 종종 순교자가 되었다. 기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에는 순교자가 있을 리 없다. 이 심심하던 시대에 유일하게 순교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범죄자였다. 생각해보라. 고문과 처형의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지은 죄를 겸허히 뉘우치며 신에게 제 영혼을 맡기는 사형수. 그야말로 순교의 고통을 통해 영생을 얻는 당대의 순교자였던 것이다.

    관객으로 호출된 이상 비평이 빠질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영화를 보고 평을 하듯이, “그 죄인이 분명히 보여준 종교심과 후회하는 마음에 감동되었다.” 18세기의 어느 신사는 일기장에 자신이 본 처형 중에서 감동적인 작품(?)을 소개해놓았다. 한 여인이 처형대에서 몸이 으깨지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찬송가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아름다운 대속의 죽음”이라 불렀다. 처형마저 미적 평가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인도주의적 고문

    몇 년 전 베를린의 거리에 있는 좌판에서 재미있는 책을 샀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으로 편찬된 형법전인데, 거기에는 죄인을 ‘인도주의적으로’ 고문하는 방법을 규정해놓고 있었다. 자기들 눈에도 당시의 고문과 처형이 비인간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과도한 고문을 규제하기 위해 아예 적절한 고문의 도구와 방식을 법으로 규정해놓았다. 이 책의 매력은 고문이라는 ‘야만적’ 관행과 고문 도구의 규격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합리적’ 정신의 공존에 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이렇게 형벌의 잔혹함을 누그러뜨리는 조처가 행해진다. 당시에 널리 퍼져나가던 인도주의와 계몽사상의 영향일 것이다. 그리하여 시민혁명이 일어난 1789년 프랑스의 대법관은 마침내 이런 판결을 내린다. “형벌을 완화해 범죄에 적합한 것으로 해야 한다. 사형은 살인범에게만 부과해야 한다. 인간성에 위배되는 신체형은 폐지해야 한다.”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시작되면서 체형은 서서히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게 된다.

    체형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처벌 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감옥이었다. 감옥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과거에 그것은 그 자체가 처벌 수단이 아니었다. 그저 죄수가 처벌받기 전에 잠깐 머무는 장소에 불과했다. 과거에 형벌은 사회를 교란한 적의 몸에 직접 가하는 공동체의 ‘복수’였다. 그게 이제는 감옥이라는 공간에 인신(人身)을 구속하는 것으로 행해지는 ‘처벌’로 변화한 것이다. 타인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을 보며 환호하던 짐승들은 이런 방식으로 인간이 돼왔다.

    끔찍한 처형 장면 순교자 모델

    마르틴 베 보스 ‘이사야 선지자의 순교’(1600년).

    원형의 감옥에서

    형벌의 방식이 완화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18세기에 들어오면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강력범죄가 아닌 경제사범이 범죄의 일반적 형태가 된다. 사기범을 살인범과 똑같이 처벌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형벌에 대한 관념이 변한 것도 형벌 완화에 기여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형벌은 죄수의 몸에 직접 가하는 공동체의 복수로 여겨졌다(‘보복론’). 18세기 이후에 형벌은 범죄의 재발을 막는 예방조처로 간주되기 시작한다(‘예방론’). 최근에는 형벌이란 범죄자를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는 교화사업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형벌의 의미가 변하고, 형벌의 방식이 완화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성의 승리, 휴머니즘의 승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쓴 것은 이런 상투적인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기획은 휴머니스트들이 말하는 ‘자율적 주체’를 권력의 명령을 내면화한 ‘타율적 객체’로 폭로하는 것이었다. 이 계보학자의 삐딱한 시선은 형벌의 ‘개량’이라는 인도주의의 승리 속에서 외려 더 철저해진 권력의 전략을 본다. 처벌의 인간화와 더불어 권력의 지배는 더 완벽해졌다는 것이다.

    처벌 대신에 등장한 것은 규율과 훈육이다. 과거에 권력은 신체의 외부만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제 권력의 지배권은 규율과 훈육을 통해 신체의 내부에 기재된다. 공간의 분리, 시간의 준수, 동작의 표준화, 규율에 대한 복종이라는 감옥의 원리는 군대, 학교, 공장 등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 이런 사회를 푸코는 벤담의 원형감옥에 비유한다. 모든 죄수들이 서로 격리된 방에 갇혀 소통하지 못하고 중앙에 있는 교도관의 감시를 받는 체제. 이게 바로 계몽과 이성으로 만들어낸 근대사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형제도

    형벌제도의 인간화를 푸코는 외려 더 강화되고 확장된 권력의 지배로 파악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기 나라에서 행해지는 ‘죽이기’의 잔혹함은 보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행해지는 ‘보여주기’의 야만성만을 질타하는 미국. 그들의 인도주의에는 모종의 알량함이 있다. 잔혹한 신체형을 온건한 금고형으로 바꿔놓은 것을 이성의 승리, 계몽의 성취, 휴머니즘의 발로라 상찬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라보며, 푸코 역시 그와 비슷한 알량함을 느낀 게 아닐까?

    언뜻 보면 형벌의 인간화라는 계몽주의의 기획을 매도하는 듯하다. 하지만 ‘시민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형벌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으니, 일체의 개량을 위한 노력이 의미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권력의 지배를 약화하기 위해 과거와 같은 신체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푸코의 것은 (우리 눈에는 차라리 부럽게만 보이는) 서구의 합리적인 형벌제도조차 잔혹하게 느끼는 예민한 감성이다.

    끔찍한 처형 장면 순교자 모델

    마리아 테레지아의 형법전에 실린 고문 방법에 대한 설명(오른쪽)과 다리를 옥죄는 고문 도구(1569년).

    실제로 그는 부르주아적 수형제도의 대안을 마련하려는 ‘실천’에 참여하기도 했다.

    중국에는 여전히 공개처형의 관습이 남아 있다. 일본도 몇 해 전에 형을 집행함으로써 사형제도를 폐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우리 사회에도 사형제도가 아직 남아 있고, 유영철을 보고 “찢어죽이라”고 외치는 감성도 널리 존재한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오랫동안 형의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근에는 제도마저 없애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

    푸코가 뭐라 그럴지 몰라도 이번에 사형제도가 폐지된다면, 나는 대한민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계몽된 나라’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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