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3

2005.05.03

여성은 ‘일과 사랑’ 다 잘할 수 없나

  • 입력2005-04-28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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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은 ‘일과 사랑’ 다 잘할 수 없나
    30대 중반의 디자이너 A는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걸고 일한다. 대중매체에서 성공한 싱글 여성을 포장할 때 묘사하는 식으로 호화로운 주거공간이나 명품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수입으로 다양한 취미를 즐길 만큼은 된다. 게다가 세련된 외모와 재치 있는 화술까지 갖추고 있으니, 나 같은 어정쩡한 싱글은 그녀가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밤이면 친구들을 붙잡고 신세한탄하며 술 마시는 게 일상이다. 20대엔 일 배우고 경력 쌓느라 입에 대지 않았던 술을, “성공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 줄만 알았다”고 주절거리며 마시는 것이다. 인정받는 유능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사적 영역에서의 감정을 접어두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청춘이 후회된단다. 덕분에 A는 업계에서 살아남아 이름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일에 탄력이 붙을 즈음 스스로를 뿌듯하게 되돌아보려니 웬걸, 변변한 연애 경험도 없이 일만 하는, 나이 든 여자가 거울에 비치더란다.

    뒤늦게라도 로맨스를 성취하겠다고 가열 찬 노력을 기울이던 A는 그토록 자랑스러운 커리어가 누군가와 사랑하는 일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 문제로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하자가 수두룩하게 발견되는’ 늙수그레한 독신 남성들과 주로 데이트를 하게 되면서 마음만 지쳐간다고 고백한다. 성적 매력의 개발이나 유지가 점점 힘겨워지는 마당에 근사한 남자는 여전히 씨가 말랐다.

    나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질 순 없는 것 아니냐”며 위로 비슷한 걸 해주지만 함께 힘이 빠져버린다. 남성들과 경쟁하기 위해 여성성을 억누른 채 앞만 보고 달려온 친구들이 생물학적인 매력과 능력을 평가하는 싸늘한 시선 앞에서 새삼 당황해하는 모습을 최근 들어 이따금 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여성 B는 깔끔하고 치밀한 성격을 살려 굴지의 컨설팅 회사에 입사, 승진을 거듭하며 웬만한 또래 남자의 세 배는 넘는 연봉을 받고 있다. A처럼 술 마시고 강짜를 부리진 않지만 그녀 역시 “나이 들어 신경질만 는다”며 결혼과 출산의 흐릿한 가능성에 잠을 설칠 정도로 불안해한다. 하루라도 쉬면 뒤처진다는 위기감에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지나고 보니 일찌감치 결혼해 애 둘 낳고 취업했어도 어느 정도 기반을 잡긴 했을 것 같단다.



    성공한 커리어우먼들 “뒤늦게 연애하려니 힘드네”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나이만 많은 나를 괜찮은 남자들이 좋게 볼 리 없는데, 언제 결혼해 언제 아이 낳을 수 있겠어?”

    이제 서른둘이면서 노산(老産)으로 수술대에서 숨을 거두게 될 가능성까지 같이 짚어 보인다.

    그렇다고 A나 B가 자신의 직업에 대한 믿음과 애정까지 거둬들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자들이 그녀들의 성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할 뿐이다. 남자들은 돈 많은 여자는 환영해도 자수성가한 여자의 억척스러움엔 상당히 방어적이다. 연애엔 서툴고 성격만 질겨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잘 듣는 연하”에게 희망을 걸었다는 동시통역가 C의 경우를 보지만, 그 역시 쉬워 보이진 않는다. 일본 드라마 ‘너는 펫(pet)’의 주인공처럼 뽀송뽀송한 20대 중반의 ‘예술 하는’ 청년에게 용돈 쥐어주며 만나는 꼴이니 원조교제와 다를 바 없지 않나. 남의 일처럼 중개하고 있는 나 역시 일과 사랑 모두를 이루어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숱한 시행착오 끝에 각성하고 있는 처지다. 이 사회는 일하는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남성들이 결혼으로 일순간 보상받게 되는 것과 달리 우리에게는 잃은 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왜 성공한 여성들은 연애나 가정을 꾸려나가는 문제에 대해 채울 수 없는 결핍을 훈장처럼 여기고 살아가야 하는가. 나와 내 일을 사랑하는 동시에 여자로서도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다. 가능한 꿈을 꿀 수 있는 현실적인 역할 모델이 필요(!)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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