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8

2005.01.11

노벨평화상의 고향 오슬로 이방인에게도 마음 문 활짝

생각보다 아담한 노르웨이 수도 … 길에서 만난 청년 덕분에 3일간 편안한 체류

  • 글·사진=행창/ 승려 haengchang17@yahoo.co.kr

    입력2005-01-06 18: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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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평화상의 고향 오슬로 이방인에게도 마음 문 활짝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이는 오슬로 전경.

    북유럽의 짧은 가을이 막 그 진한 생명 빛을 다하려는 즈음, 자전거를 타고 노르웨이 국경에 접어들었다. 자유분방한 바이킹의 자존심을 걸고 시대 조류인 유럽연합(EU) 가입조차 거부한 노르웨이는 유럽에서도 가장 높은 국민소득과 최고의 물가를 자랑하는 선진국이다.

    스웨덴-노르웨이 국경지대를 벗어나 얼마를 달렸을까.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로 이어지는 E18호선 국도는 긴 호수와 산맥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전거 여행 도중 만나는 산맥은 그다지 싫지 않은 상대다. 오르막만큼의 내리막이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오르막길에서는 고개를 숙인 채 그 오르막이 끝날 때까지 바로 앞만 보면서 달린다. 고개를 들면 남은 거리가 더 멀고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 생각 접고 그저 내 앞에 놓인 길을 달려가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레 내리막이 시작된다. 오슬로를 향한 국도변 풍경은 이웃 나라 스웨덴과 별로 다르지 않다. 산맥을 내려와 오슬로까지 60km 남짓 남겨둔 지점 국도변에서 야영에 들어갔다. 이번 여정 동안 대도시에서 몇 번 지붕 아래 잠을 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날들을 캠핑 생활로 보내고 있다. 북유럽의 비싼 물가 탓에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은 지 이틀째 오후, 산등성이를 넘어서자 바닷가 산비탈에 자리잡은 반달형 도시 오슬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아담한 느낌을 주는 도시다. 한반도 면적과 비슷한 크기의 노르웨이, 그러나 인구는 겨우 450여만명이다. 노벨평화상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성에 비하면 뭔가 허전한 면이 없지 않은 수도 오슬로의 인구 역시 한국 중소도시 규모에 불과한 50여만명이 전부다.

    노벨평화상의 고향 오슬로 이방인에게도 마음 문 활짝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시내 번화가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광대.

    낮은 출산율 ‘사회문제’ … 이민유입 정책도 문제점 노출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북유럽 국가들의 공통점은 이처럼 인구가 적다는 것이다. 핀란드가 500여만명, 북유럽 최고 강대국인 스웨덴이 900여만명, 다음 행선지인 덴마크 역시 500여만명에 불과하다.



    바로 이 점은 지상낙원처럼 보이는 북유럽에서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약 20%가 노인인 데다, 국가 존립에 위기를 줄 정도로 출산율이 낮기 때문이다. 인간 생태계의 순환이 멈출 정도로 최악의 사회구조에 이른 것이다.

    노벨평화상의 고향 오슬로 이방인에게도 마음 문 활짝

    늦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오슬로 주택가.

    북유럽은 물론 유럽사회 전체는 인구 격감 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기술이민 수용 정책’과 ‘EU 형성’에 힘쓰고 있다. 유럽의 공동번영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는 EU 형성 뒷면에는 동유럽으로부터 노동력을 확보하고 경제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서유럽 나라들의 생존 전략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국 위주의 이민유입 정책은 요즘 유럽 각지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바로 종교와 인종 문제다. 유럽사회보다 더 뿌리 깊은 전통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이슬람 지역으로부터 이민자를 받으면서, 종교와 문화의 차이를 감안하지 않아 이들을 배척하려는 유럽의 이율배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조명할 때, 오늘날 유럽의 시대 조류는 ‘탈종교’,‘인구격감’, ‘문명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늦가을 짧은 해가 더 짧게만 느껴지는 가운데 오슬로 시내에 들어섰다. 퇴근길에 나선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는 겨울이 묻어난다. 오슬로 시내 최대 번화가로 알려져 있는 노르웨이 왕국의 왕궁 앞 큰 길 ‘칼 요한스 거리’에서 두 명의 자전거 여행자들을 만났다. 독일에서 온 친구들로 노르웨이 횡단을 끝내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란다. 노르웨이를 동서로 횡단하는 길인 ‘오슬로-베르겐’ 구간을 베르겐 쪽에서 출발해 약 3주간 달려왔다고 하는데,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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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 왕궁 앞에 친구와 함께 선 필자.

    지금껏 친구들이 달려온 길이 바로 필자가 계획하고 있는 경로라고 이야기하자, 이들은 환상적인 코스인 것은 사실이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으니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게 어떻겠느냐고 충고한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긴 낮잠에서 일어난 거리의 주황색 가로등이 하나 둘 예쁜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귀갓길 부산한 걸음으로 가득한 거리, 하루 저녁 몸 누일 곳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자에겐 쓸쓸한 시간대다. 혼자 벤치에 앉아 있다가 불빛을 가리고 선 긴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보니, 건장한 친구 하나가 자전거를 끌며 다가와서 머물 곳이 있느냐고 묻는다.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머물 곳이야 찾으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없는 것 아니겠냐는 답변을 했다. 의외의 답변인 듯, 무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면서도 추워 보이는데 괜찮다면 목도리를 선물해도 되겠느냐며 자신이 걸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건네주었다. 노르웨이에서 생산되는 양모 실로 직접 짠 목도리란다. 목에 걸치니 생각보다 상당히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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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에 사는 스리랑카 사람들의 명절 행사에 참석한 필자.

    추위 탓 ‘오슬로-베르겐’ 횡단 계획 내년 여름으로 미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얼마나 갔을까. 조금 전 목도리를 선물한 친구가 달려와서 괜찮다면 시내에서 멀지 않은 자기 집에서 머물러도 좋다는 말을 전했다.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문제 되지 않는 내가 아닌가. 결국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숙소를 제공하는 쪽에서 더 기뻐하는 모습이 고맙기만 했다. 스톡홀름을 출발하고 일주일 동안, 계속된 캠핑 생활로 인해 씻지를 못했다. 3개월이 다돼가는 자전거 여행으로 필자의 몰골은 한마디로 말이 아니다. 남루한 행색에 짐까지 잔뜩 실은 자전거를 옆에 끼고, 늦가을 저녁 가랑잎 떨어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에게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노벨평화상의 고향 오슬로 이방인에게도 마음 문 활짝

    유럽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중세의 흔적.

    그는 내게 정성이 담긴 따뜻한 저녁식사를 차려주며 앞으로의 여행 일정을 물었다. 그래서 ‘오슬로-베르겐’ 횡단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자, 그 역시 내년 여름으로 계획을 미루는 게 현명하다고 조언했다. 부러진 다리에 철심까지 박은 상태에서 여름철 장비뿐인 현재의 상황으로 가급적 모험은 피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 다음을 기약하고 남쪽 덴마크로 내려가자!

    결정을 지켜본 친구의 권유로 오슬로에서 3일간 체류하기로 했다.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바이킹의 전성기 11세기 중엽에 건설된 오슬로. 이곳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화재에 휩싸였던 탓인지, 몇 개의 중세풍 건축물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역사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좋은 친구와 함께한 3일간은 참으로 짧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내게는 여정이 남아 있다. 어린아이처럼 아쉬워하는 친구와 다음을 기약하고,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나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오슬로의 피오르드 해안을 빠져나가며 긴 뱃고동이 여운을 남기는 선상에서, 머지않아 다시 찾을 노르웨이에 재회의 그날까지 안녕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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