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6

2004.12.30

요르단 왕실 신데렐라는 없었다

명문가문 태생, 미모 실력 갖춘 여성들뿐 … 압달라 국왕 왕세제 지위 박탈 ‘세간의 화제

  • 예루살렘=남성준 통신원 darom21@hanmail.net

    입력2004-12-23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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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르단 왕실 신데렐라는 없었다

    압둘라 국왕의 가족 사진. 아내인 라니아 왕비와 세 자녀 이만·살마 공주, 그리고 후세인 왕자.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동화 속 공주가 되는 상상을 해보았으리라.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평범한 혹은 고난의 연속인 자신의 인생을 화려하고 낭만적인 삶으로 송두리째 바꾸어주길 꿈꾸며 말이다. 시대가 바뀌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점점 높아져가도 이런 꿈은 ‘신데렐라 콤플렉스’란 이름으로 드라마 영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돼왔고, 영국 등 유럽 왕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늘 세간의 화제가 된다.

    왕실은 유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동의 여러 국가들 중에는 왕정을 하는 나라가 적지 않다. 요르단 또한 그중 하나. 요르단의 현 국왕 압달라 2세는 1999년 2월 후세인 전 국왕이 암으로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압달라 국왕은 11월30일 자신의 이복동생 함자의 왕세제(王世弟) 지위를 박탈했는데, 이 사건은 요르단 왕실을 둘러싼 해묵은 이야기를 상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세인 전 국왕 네 번 결혼 5남7녀

    후세인 전 국왕은 모두 네 번의 결혼으로 5남7녀를 두었다. 99년 후세인 국왕의 사망이 임박하자 누가 왕위를 계승할지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당시에는 34년간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왕세제 지위를 누려왔던 후세인의 동생 하산이 가장 유력했다.

    원래 요르단 헌법에 따르면 왕위는 왕의 장자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하산이 왕세제에 지명된 65년 당시 요르단은 정치적으로 극도로 불안했고, 후세인의 장자 압달라는 겨우 세 살 로 혹시 있을지 모르는 국왕의 유고 상황을 대비하기에 턱없이 어렸다. 또한 압달라의 어머니이자 후세인의 두 번째 부인이 영국인이라는 점도 압달라를 왕세자에 봉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자 후세인은 왕의 친형제나 아들 중 17세가 넘는 성인을 왕세자(王世子)에 지명할 수 있게 헌법 조항을 고쳐 자신의 막내 동생 하산을 왕세제에 지명한 것. 이후 하산은 명실상부한 2인자 지위를 누려왔기에 하산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더욱이 하산은 후세인이 98년 암 치료차 미국으로 떠난 뒤부터 실질적인 최고통치권자 구실을 수행해오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후세인 국왕은 하루아침에 하산의 왕세제 지위를 박탈하고 당시 37세였던 장자 압달라를 왕세자에 앉혔다.

    후세인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하산이 군 조직의 변화를 꾀했고, 하산의 아내 사르바스가 왕궁을 새로 단장한 것이 하산의 왕세제 지위 박탈의 빌미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하산의 움직임이 ‘포스트 후세인’ 시대를 위한 준비라는 세간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병상에서 이 같은 소식을 들은 후세인은 대노했고, 결국 99년 1월25일 하산에게 보내는 친서를 통해 왕세제 지위를 박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사건의 또 다른 한편에는 후세인의 네 번째 부인 누르 왕비가 있었다. 후세인은 생전에 누르 왕비의 소생인 막내아들 함자를 특별히 총애했다. 누르 왕비가 국왕이 총애하는 자신의 소생을 다음 보위에 앉히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터. 특히 후세인이 병상에 누운 뒤 누르 왕비는 미국을 등에 업고 함자를 왕위에 앉히려 한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다. 누르 왕비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이다. 프린스턴 대학을 나온 누르 왕비는 아랍어보다 영어에 더 능통한, 요르단 국민의 시각으로 보자면 아랍인보다 미국인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

    그러나 99년 당시 함자의 나이는 18세. 반세기 가까이 요르단을 통치하며 중동의 대표적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후세인의 공백을 어린 나이의 함자가 메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세계 언론이 하산의 아내 사르바스, 누르 왕비, 압달라의 어머니 무나 왕비의 구실과 처지를 빗대 ‘아내들의 전쟁’이라고 명명한 왕위 쟁탈전은 결국 후세인 국왕이 장자인 압달라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막을 내렸다.

    압달라는 왕위에 오르며 자신의 아버지처럼 막내 동생 함자를 왕세제에 지명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소생을 왕위에 앉히고자 하는 누르 왕비의 꿈이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세계 언론이 먼 훗날 함자 왕세제의 운명이 하산의 운명과 같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 바 있는데, 5년이 지난 지금 그 경고가 현실이 된 것이다.

    이복동생 함자, 하산과 같은 운명 되나

    현재 요르단의 왕세자 자리는 공석이다. 압달라 국왕은 왕비 라니아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는데, 아들 후세인의 나이는 9세에 불과하다. 요르단 헌법에 의하면 17세가 넘어야 왕세자에 책봉될 수 있기에 왕세자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법 조항과는 무관하게 압달라의 외아들 후세인이 실질적인 왕세자 자격을 가졌다는 데 이견이 없는 상태다. 또 필요하다면 법 조항을 개정해서라도 왕세자에 지명할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결과적으로 요르단 왕실의 복잡한 후계구도는 후세인 전 국왕의 네 번에 걸친 결혼에서 비롯된 셈이다. 후세인 국왕의 결혼 이력을 보면 그의 자유분방한 연애 기질이 엿보인다. 그는 동시에 2명 이상의 아내를 두지는 않았다(이슬람은 동시에 4명의 아내를 허락한다).

    첫 번째 결혼은 후세인이 19세였던 55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영국에서 유학하던 후세인은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디나를 왕비로 맞았다. 이집트 태생으로 후세인과 같은 왕실 가문인 하쉼가 출신의 디나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고 이집트 카이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하지만 이 결혼생활은 딸 하나를 둔 채 18개월 만에 끝났다.

    디나와 이혼한 후세인은 61년 영국군 장교의 딸로 학교를 갓 졸업한 19세의 안토이네트 가디너(무나)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아랍인도 무슬림도 아닌 영국 여성과의 결혼은 당시 요르단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후세인은 무나와의 사이에 현 국왕인 압달라를 비롯한 2남2녀(쌍둥이)를 두었으나 72년 돌연 이혼하고 같은 해 곧바로 요르단 외교관의 딸이자 에어 알리아(현 요르단 왕립 에어라인의 전신)에 근무하던 알리아 투칸과 세 번째 결혼을 한다. 요르단 태생인 알리아는 요르단 국민들한테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1남2녀(한 명은 입양)를 낳았으나 77년 불의의 헬기 사고로 사망했다. 현 요르단 수도 암만의 국제공항은 이 왕비 이름을 따 ‘퀸 알리아’ 국제공항이 되었다.

    후세인은 43세인 78년 자신의 임종을 지킨 네 번째 부인 리사 할라비(누르)와 결혼했다. 당시 누르의 나이는 26세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한 그는 업무차 요르단에 왔다가 후세인을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는 미국 팬암 항공사의 사장을 지낸 나지브 할라비로 누르 왕비는 함자를 비롯한 2남2녀를 낳았다.

    한편 93년 압달라 국왕과 결혼한 왕비 라니아는 의사의 딸로 쿠웨이트에서 태어나고 카이로의 아메리칸 유니버시티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재원. 팔레스타인 가문 출신인 라니아 왕비는 요르단 국민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출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요르단 왕실 여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신데렐라는 보이지 않는다. 후세인 국왕의 네 왕비와 압달라 국왕의 왕비까지 모두 영화배우 뺨치는 미모는 물론 명문가문 태생에 세계 유수 대학에서 공부해 실력까지 갖춘, 그야말로 왕실의 품격에 걸맞은 여성들이다. 결국 신데렐라 이야기는 현실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 동화 속 이야기에 불과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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