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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 무슨 소리! 끝까지 버틴다”

불황기 명예퇴직 신풍속 … 대기 발령에도 “사표 사절·소송 불사” 회사는 냉가슴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명퇴? 무슨 소리! 끝까지 버틴다”

“명퇴? 무슨 소리! 끝까지 버틴다”
명예퇴직. 실은 전혀 명예롭지 않은 사실상의 권고사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로부터 명퇴 대상으로 ‘찍힌’ 사람들은 분노와 자괴감, 굴욕감으로 심한 정신적 타격을 입게 마련. 여기에 더해 ‘자칫하다가는 그나마의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결국 회사 측 요구에 응하고 마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 요즘 “내 잘못이 뭐냐, 이 정도 받고는 못 나간다”고 버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실적이 아닌 연령만을 기준 삼은 경우가 많아 법적 대응이 가능한 데다, 나쁜 경기와 바닥을 기는 은행 금리로 명퇴 위로금의 가치가 확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2년만 더 버티면 12~24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위로금보다 사회적·경제적으로 훨씬 더 큰 부가가치를 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녀학자금 지원 등은 대기업 직원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법정 투쟁에서 승리할 경우 원직 복직도 가능하다.

“마음 약한 사람들만 그만둔 거지요. 갈 데 있거나 회사가 내건 조건이 맘에 들어 사표 쓴 이는 없어요.”

한 외환은행 특수영업팀 소속 직원의 말이다.

외환銀 명퇴 대상자들 “끝까지 투쟁”



10월 말, 외환은행은 20~50대 직원 240여명을 특수영업팀이라는 신생 부서로 발령 냈다. 행원부터 부장급까지 망라된 이 부서 발령자들은 사실상 회사로부터 내침을 당한 이들이다. 사 측이 일방적으로 정해 통보한 명퇴 대상자 중 끝내 사표를 내지 않은 직원의 절반가량을 이곳에 몰아놓았다.

외환은행은 이들을 발령 낸 이틀 후 ‘마지막 명퇴’ 시행을 발표했다. ‘이번에도 사표를 내지 않는 특수영업팀 직원은 월급을 100만원 이하로 깎고 격무에 시달리게 해 스스로 그만둘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라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떠돌았다.

“처음에는 마음이 흔들렸어요. 어차피 잘릴 거라면 목돈이라도 쥐고 나가는 게 상수 아닌가 싶었지요. 하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나더군요. 발령 난 이들 중에는 평소 능력 있고 잘나간다는 말을 듣던 사람들이 꽤 있어요. 저만 해도 2004년 상반기 우수점포장으로 선정됐거든요.”

“명퇴? 무슨 소리! 끝까지 버틴다”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1998년 제일은행의 가족 초청 행사에서 눈물짓고 있는 직원 부인들.

한 지점장 출신 특수영업팀 직원의 말이다. 그는 또 “그나마 명퇴금이라도 제법 됐다면 달리 생각해볼 수 있었을 거다. 퇴직금은 이미 중간 정산해 받은 상태고, 요즘 세상에 그 정도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느냐”고 했다. 결국 발령자들은 발빠르게 움직여 지점장 출신 40여명을 중심으로 ‘특수영업팀 부당전보 철회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구성했다. 이들은 성명을 내고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결과 발령자 중 40여명만이 회사의 마지막 명퇴 요구에 응했다. 203명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사 측에 명퇴 대상 선정 및 특수영업팀 발령 기준을 집요하게 캐묻고 있다.

외환은행 노동조합 관계자는 “사 측은 명퇴 압박에 이어 특수영업팀으로까지 발령을 내면 상당수가 그만두리라 예상한 모양이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타나 당황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유례 없는 ‘대량 부당전보’가 오히려 발령자들에게 힘이 되고 있다.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사 측도 노동조합도 일을 허투루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특수영업팀 사람들은 현재 이전에 받던 월급과 큰 차이 없는 급여를 받고 있다. 사 측은 애초 설명회에서 ‘가계 대출 170억원 유치’ 등 비현실적 목표를 제시한 뒤 이를 달성 못하면 기본금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별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자칫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대위는 회사와의 소송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다. 비대위 관계자는 “특수영업팀 직원 전원이 투쟁비를 납입했다. 분과별로 노동법 연구는 물론 판례 분석, 명퇴 압력 및 부당전보 증거 수집 등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10월31일, 굿모닝신한증권 직원 241명이 희망퇴직을 했다. 노동조합 관계자는 “회사가 찍은 대상자 300여명 중 180여명만이 사표를 냈다. 이에 사 측은 80명을 대기발령 내겠다고 했다. 노조가 반발하자 39명만 골라 대기발령이 아닌 ‘교육 대상’으로 분류, 현업에서 손을 떼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렇게 발령을 받은 이들 중 사표를 낸 사람은 없다. 월급도 이전과 다름이 없다. 노조는 현재 사 측과 이들의 현업 복귀를 협상하고 있다.

A씨(52)는 회사의 사직 압력에 직면한 이들에게 희망이 될 만한 판례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그는 국내 굴지의 은행에 근무하던 2000년 4월 회사로부터 명퇴 종용을 받았다. 대상자는 모두 248명이었다. 그중 17명이 회사의 요구에 불응해 사표를 내지 않았다. 사 측은 이들 전원을 보직 없이 각 지점 후선으로 발령 냈다. 이어 다시 원래 직급보다 월급이 20%가량 낮은 ‘상담역’으로 밀어냈다. 이들은 결국 대기발령 상태로 매달 본봉만 받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견디다 못한 A씨는 서울지방법원에 ‘부당전보 발령 무효 및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A씨가 승소하자 회사는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됐다. 회사가 다시 상고를 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A씨는 “내 인사의 합리적 이유를 사 측이 대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부당 전보’ 소송 제기해 승소하기도

“저는 지금도 회사의 조치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명확하고 타당한 이유 없이 이루어진 인사니까요. 아내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뜨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며, 여든다섯 살 노모에 대학생인 두 아이까지 있습니다. 저로서는 끝까지 버티는 것 외에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A씨의 말이다. 현대자동차 직원인 B씨 또한 회사를 상대로 1년째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B씨는 2003년 12월24일, 대부분 직영 영업점 지점장인 동료 30여명과 함께 회사로부터 명퇴 종용을 받았다. 회사가 제시한 위로금은 1년치 기본급. 4000여 만원에 불과한 돈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해마다 있어온 일이에요. 나도 웬만했으면 회사 측 요구에 따랐을 겁니다. 그런데 ‘윗분과 한 번만 면담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요. 인생을 다 바쳐 일한 곳인데, 이럴 수 있습니까.”

B씨와 동료 20여명은 명퇴에 불응했다. 그러자 현대차는 이들을 모두 현업과 상관 없는 부서로 무보직 발령을 냈다. 완전 연봉제인 까닭에 A등급이던 월급은 C등급으로 깎였다. 그와 12명의 동료는 각자 자신이 근무하는 지역의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전보 구제 신청을 냈다. 지방노동위는 B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노동부에서 원직복직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현대차는 이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듯하더니 일주일 만에 다시 엉뚱한 지역 영업점의 부지점장으로 발령 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서울 본사의 ‘중고차사업부’라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현재 이 ‘중고차사업부’에는 B씨와 같은 처지의 직원 19명이 소속돼 있다.

B씨는 “지난 2년간 받은 수모는 말로 다 못한다. 지금도 언제 또 어디로 발령 날지 몰라 방을 얻지 못하고 찜질방 등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B씨는 끝까지 사표는 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얼마 안 있으면 정년퇴임이다. 그럼에도 회사는 요즘도 매일같이 사표를 종용하고 있다. 정년까지 근무한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명퇴 종용에 버티는 근로자들이 늘고 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이전보다 마냥 좋아진 것은 아니다. 몇몇 사례가 있기는 하나 여전히 법정 다툼에서 승리하고 원직에 복직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노무법인 참터의 배동산 노무사는 “강압에 의한 명퇴 종용이나 부당한 전보 발령이라는 것을 증명할 자료가 있어야 한다. 녹취를 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근거를 손에 쥐어야 한다. 정황 설명만으로는 승소할 수 없다”고 했다. 김철희 노무사는 “대기발령은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경영상의 사유가 있었느냐가 문제다. 또 당사자에게 현업에 계속 종사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는 계량화한 고과나 객관성이 담보된 실적을 통해서만 증명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김선수 변호사는 “비슷해 보이는 경우라도 재판 결과는 다 다르게 나온다. 그만큼 회사에 따라, 개인에 따라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변호사에게 의뢰해 소송을 진행한 A씨는 “동료 C씨는 나와 매우 유사한 사례인데도 패소했다. 이길 수밖에 없는 소송이라 생각하고 변호사 없이 혼자 덤빈 것이 패착이었다. 개인이 거대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기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B씨 또한 “똑같은 사례라도 청구한 지방노동위가 어디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더라”며 “노동법이 잘 갖춰져 있다지만 아직 허점이 많다. 버티겠다고 마음먹었더라도 그 결심을 끝까지 지켜나가려면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주간동아 2004.12.30 466호 (p46~48)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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